메인화면으로
'빨갱이', '간첩' 소리까지…산불 이재민은 '피해 지원 신청서'를 찢어 버렸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빨갱이', '간첩' 소리까지…산불 이재민은 '피해 지원 신청서'를 찢어 버렸다

[인터뷰] 의성군산불피해주민 대책위 이장 박기 씨와 김경희 씨의 지난 3개월 이야기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1리의 박기(69) 이장은 지난 5월부터 관할 경찰서 정보관을 종종 만난다. 정보관은 박 이장의 동태를 살피는 듯 그의 주변에 머물렀다. 박 이장은 답답한 마음에 정보관 차 안에 있는 생수를 꺼내 먹고 "경찰 물을 맘대로 꺼내 먹었으니 이제 나를 유치장에 가두라"며 "따라다니지 말고, 차라리 가둬놓고 대화하라"고 말한 적도 있다.

박 이장이 마을에서 '대책위'를 언급한 후 생긴 일이다. 사촌1리는 지난 3월 의성산불 피해를 직격으로 받은 마을이다. 소나무림으로 둘러싸인 윗마을은 집 열 채 중 아홉 채가 전소됐다. 박 이장도 윗마을 전소 피해 주민이다. 지난 4월 그를 만났을 땐 "우리 주민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뭐라도 할 거다"라고 말했다. 두 달이 지난 후 그는 "우리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단 걸 그동안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의성군산불피해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5월부터는 점곡면 산불피해주민위원회를 먼저 결성해 위원장을 맡아 왔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9일 점곡면 대책위 활동을 하고 있는 박 이장과 주민 김경희 씨를 만나 대책위 결성 이야기를 들었다.

공무원 없는 현장, 스스로 헤쳐 나갔던 이재민

"우리는 산불이 난 일주일 동안 서로 안부도 못 물었다.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후부턴 애가 탔다. '뭐라도 해야 해. 근데 뭘 해야 하지?' 생각은 가득한데, 혼자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혼자 애만 탔던 여성들 다섯이 모였다. 모두 피해자거나 피해자의 가족이었다. 피해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가는 것부터 했다. 면사무소는 우리가 실체 없는 모임이니 피해 주민 명단을 주진 않았다. 알음알음 알아내 70여 가구를 찾아다녔고 실태를 조사했다."

▲의성군 및 점곡면 산불피해주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점곡면 주민 김경희 씨. 지난 6월 29일 의성사촌문화공간에서 열린 주민 집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손가영)

김경희 씨는 4월 초중순 경 꾸려진 '점곡면 피해 주민 모임'을 만든 사람 중 하나다. 이들은 주민을 만나면서 제일 먼저 "제대로 전달되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 피해 회복 및 지원 대책이 언제, 어떻게, 어디까지 진행될지를 아무도 몰랐고 현황 전달도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구호 물품을 받지 못한 주민도 적잖았다. 피해 주민들은 아는 선에서나마 소식을 전달해 주는 이들에게 "참 고맙다"고 말했다.

공무원이 배치되지 않았던 '현장 실무'도 이들이 스스로 맡았다. 지원 물품, 봉사 인력 등은 쌓이는데, 이를 조정하고 배분하는 인력은 없어 당시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점곡면에선 김 씨를 포함한 주민 모임의 여성들 예닐곱 명이 물품부터 정리했다. 쓰지 못할 수준의 물품이 많아 이를 걸러냈고, 더러운 그릇 등은 직접 씻고 닦았으며 주민 실태조사 때 메모해 놓았던 옷, 신발 사이즈를 참조해 물품을 배분했다. 방충망 설치, 미용 등의 기능장들이 봉사를 오면 마을 수요를 일일이 조사했고, 장소도 섭외했다.

'이렇게 움직여선 부족하다'고 느낀 이들은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상황을 공유하고 토론할 필요를 느꼈다. 처음엔 군청, 면사무소 등과 얘기가 잘 됐다. 주민간담회를 5월 9일 열기로 하면서 점곡면사무소 2층을 빌렸다. 그런데 당일, 면장이 공간 이용을 불허했다. 명확한 이유는 듣지 못했다. 김 씨는 "홍보 현수막에 적힌 피해 주민 대책 모임 문구 중 '대책'이 문제가 됐던 것 같다"며 "다른 경로로 '대책위를 왜 만들려고 하느냐', '가만히 있어라', '우리 지역만 피해 본다' 등의 말이 나왔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5월 9일 급히 장소를 의성사촌문화공간으로 바꿨다. 주민모임은 '갑작스러운 변동에 과연 주민들이 모일까' 걱정했다. 그런데 2층 회의실은 80여 명의 점곡면 주민들로 꽉 찼다. 회의 도중 주민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는 "주민 모임이 뭡니까?"라며 "관에서 도저히 나 몰라라 하는데, 피해자 대책위를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모임은 현장에서 점곡면 산불피해 주민 대책위원회로 바로 전환됐다. 모든 참석자가 동의했다. 위원장은 박기 이장이 뽑혔다. 첫 회의에선 피해 조사도 제대로 안 된 문제, 주택 피해가 심각한데 공무원 누구도 배상과 지원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 문제, 미등록 건물이 많은 농촌의 현실 문제, 농지·농산물 보상은 사각지대로 밀려날 것이란 두려움 등이 우후죽순 제기됐다. 이를 계기로 두 달 후인 지난달 30일, 여러 면의 주민들 150명가량이 모여 의성군 산불피해주민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6월 29일 점곡면 사촌리에서 프레시안과 만난 박기 이장. ⓒ프레시안(손가영)

'가만히 있으라. 우리가 주는 대로 받아라'

박 이장은 모임을 꾸린 이유로 "아무도 제대로 답변을 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면사무소와 군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이건 불합리하다'거나 '무엇이 어떻게 되느냐'를 계속 물었지만,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대책위에서 직인 찍어 공문을 발송하면 답변을 주지 않겠느냐"며 "이렇게 하지 않고선 관의 답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게 참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농사 지원 어떻게 될는지 그렇게 물었는데도 못 들었다. 우려한 문제들이 이제 터지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사과밭에 바구니, 팔레트, 창고 다 탔다. 사과 담을 데가 없다. '이거 지원이 어떻게 되냐'에 '알아서 하라'는 답만 듣는 거다. 또 1000만 원 무이자 2년 대출? 돈을 아무렇게 쓸 수 없으니, 사업계획서, 견적서, 세금계산서 만들어 오란다. 5~6년 키워야 수확할 수 있는 사과밭 사업 계획을 지금 세워서 그 자금으로만 쓰라고? 당장 생활자금이 없어서 허덕여서 갔는데? 원금을 또 2년 내 갚으라고? 면장 앞에서 서류 찢었다. 분할 상환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답이 없다. 지원의 실상이 다 이렇다."

박 이장이 답답함을 쏟아내며 말했다. 과수원이 탄 주민들은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까지 수확물이 없다. 즉 그동안 밭을 소생하고 관리하는 비용은 들지만, 수입은 없다. 이걸 물어도 "관은 '우리는 모릅니다'라는 답만 한다"고 그는 말했다. 박 이장이 "전염병이 돌 때 국가에서 주는 지원책이 있다. 가령 3년 키워야 수확물이 나는 나무에 3년간 수확물에 대한 자금을 지원해 준다"며 "이런 게 있으니 이에 준하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해도 소용없다. 1년 치를 준단 말도 없다. 농민은 뭘 먹고 사느냐?"고 울분에 차 말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그 정도로 많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에 더해 "산불에 충분히 대비하고 대피할 수 있었는데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며 "재난 시작부터 지금까지 주민의 알 권리는 지켜진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 씨는 지난 29일 주민 간담회에서 "군에서 지침을 알려주지 않으니 강 건너에 산불이 났는데도, 우린 농사를 계속 짓고 있었다"며 "농촌은 스프링클러, (수십 미터까지 물을 뿌릴 수 있는) 약차(동력분무기) 등이 집마다 갖춰져 있는데, 이 좋은 자산을 활용하지도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씨는 "우리는 산불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도 듣지 못했다"라며 "재산이 모두 타고 일터, 공장이 모두 탔는데 보상과 복구가 어떻게 되는지는 당연히 설명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관은 '지금도 가만히 있으라. 우리가 알아서 할게'라는 태도"라며 "피해자들은 당당히 자신의 권리, 필요한 것, 부족한 문제 등을 말할 수 있다. 대책위는 이걸 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 드론으로 촬영된 경북 의성군 점곡면 동변리 인근 산 풍경. ⓒ정정환(지리산사람들)

'군수에 대드냐' 비난... "피해 주민 눈높이 정치인 없다"

어떤 이들은 이들을 '빨갱이'라거나 '간첩'이라는 등의 혐오까지 나타내며 손가락질한다. 의성군 대책위에 참가하는 이장은 400명가량의 이장 중 박기 이장밖에 없다. 박 이장은 이장협의회에서도 대책위를 언급했다가 비난과 조롱을 맞닥뜨렸다. 날 선 비속어부터 '잘 되는지 두고 보자', '어용 띄워서 대응할 거다', '너희 때문에 군수님한테 찍힌다' 등의 말을 전해 들었다. 그는 "대책위를 그저 이유 없이 '하지 말라'고만 하더라"며 "'이장은 군수에게 봉급을 타기 때문에 안 된다'는 말도 들었다"고 말했다.

박 이장의 마을 주민들만 317L(리터) 냉장고를 받은 것을 두고 점곡면에선 '군수에게 찍혔다'는 입말도 퍼졌다. 다른 지역엔 모두 500L 이상의 냉장고가 지급됐다는 것이다. 그는 "누구와 싸우자는 게 아니라, 관과 민이 같은 목소리로 정부에 요구하자는 것인데 (이런 비난의 이유를) 참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박 이장은 지난 두 달간 의성 내 모든 피해 면을 돌아 다녔다. 또 안동, 영양, 청송, 영덕까지 산불 피해를 본 4개 시군도 모두 방문했다. 그는 이때 만난 이재민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주 울었다. 그는 "가족 유품을 다 태워버려 마음에 골병이 든 어른이 내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주민들 상처가 정말 아프고 깊다"며 "재난 지원이란 게 돈 몇 푼 쥐여 주고 땡인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관(정부와 지자체)은 왜 없는가?"라 물었다.

박 이장도 사과밭 3000평과 집 두 채를 포함해 총 9억 원가량의 피해를 봤다. 당장 수입도 막막하다. 그럼에도 매일 풀을 베야 하는 등 농사일은 쌓여 있다. 박 이장은 새벽 4시 일어나 오전 10시까지 농사일을 하고 이후부턴 대책위 업무를 본다. 지금까지 수백만 원가량의 사비를 털었다. 그는 "앞으로는 후원회를 만들어 후원을 받으려고 한다"며 "농촌 어르신들 푼돈은 도저히 못 받겠더라"고 말했다.

의성군 대책위가 참여하는 경북산불피해주민대책위는 산불 피해 지원과 복구에 대한 12대 과제를 세워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산불 확산 저지 실패 원인 분석 및 책임 규명 진상조사 △사망자에 대한 현실적 배상안 마련 △산불재난특별법 제정 및 실효성 있는 피해 복구 체계 마련 △피해 기업에 대한 대책 마련 △민간 재난 기부금 운영 투명성 강화 △과수농가 생계 지원책 마련 등이다. 특히 지원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 지원체계의 실효성을 강화하는 요구를 산불재난특별법으로 법제화하려고 한다. 경북대책위는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첫 상경집회를 열고 요구안을 국회에 전달했다.

박 이장은 "농민들은 올해 농사가 잘되든, 망하든 꼬박꼬박 세금을 낸다. 어쩌다 못 내면 압류를 해서라도 다 받아 가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국민의 생명, 안전을 지키기 위해 세금을 걷는다는데, 내 재산 9억 원을 다 태웠을 때, 이렇게 거리에 나앉았을 때 국가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주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또 "가장 좋은 약이 관심이더라. 봉사자분들, 관심 가져 주는 시민들에게 정말 가슴 깊이 감사하다"며 "산불 이재민들에게 관심을 놓지 않아 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1일 국회 앞에서 열린 경북 산불피해 특별법 제정 촉구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손가영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