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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남' 분석에 '안티페미니즘'을 우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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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대남' 분석에 '안티페미니즘'을 우회할 수 없다

[대학문제연구소 논평] '이대남' 현상과 페미니즘을 보는 시각

'이대남'은 왜 그럴까. 6.3 대선 직후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이 질문이 사회적으로 떠올랐다. 20대 남성의 37.2%가 이준석 후보를, 36.9%가 김문수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이들의 선택을 둘러싼 논의가 뜨거워졌다. 이어서 발표된 서울대 학부생 대상 정치의식 조사에서도 남학생의 49.5%가 이준석을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세대나 20대 여성의 투표성향과 뚜렷하게 차이나는 이들의 보수·극우 정치인 지지 이유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엇갈렸다. 우선 20대 남성을 '이대남'으로 묶어 극우로 명명하는 흐름에 반대하는 목소리다. 20대 남성 내부의 의견이나 특성이 다양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질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남'이라는 말로 이들을 묶는 것이 청년 남성들을 문제집단으로 단정 짓고 비난하는 낙인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다른 하나는 청년 남성의 극우화는 실재하며 이를 인정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가령 김정희원 교수는 청년세대의 보수화 및 극우화는 세계적 현상이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극우화 진단에 유보적일수록 대응이 난망하다는 것이다. 또 김창환 교수는 다년간의 사회조사 데이터를 제시하며 한국 청년 남성의 보수화와 극우화 경향이 분명히 드러났고 내부 다양성이라는 논리로 집단의 경향성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두 관점 모두 일면의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누락된 것은 '이대남' 담론 자체가 페미니즘과 맺고 있는 관계다. 이 글에서는 '이대남' 담론이 어떻게 생성되고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그 정치적 문화적 의미는 무엇인지 페미니즘과의 관련 속에서 톺아보고자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국민의힘 김문수·민주노동당 권영국·개혁신당 이준석 대선후보가 2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21대 대선 2차 후보자 토론회 시작에 앞서 기념 촬영하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대남'이라는 명명은 2010년대 후반 등장했다. 문재인 정권 당시인 2018년 겨울, 대통령 국정지지율 조사에서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이 확인되면서 20대 남성은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특히 보수언론이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하며 부각했다. 2019년 2월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20대 남성 지지율 분석 하락요인 분석 및 대응방안'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정권이나 정치인 지지율 지표와 20대 남성의 집단 특성을 연결짓는 언설이 본격화됐다.

이들을 안티 페미니즘과 남성 피해자 의식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는 시각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때부터 대규모 여론조사와 통계지표 생성으로 20대 남성의 인식과 행태를 분석하고, 이를 중요한 사회 문제로 바라보는 담론이 자리 잡았다. 아울러 페미니즘 친화적 정부에 대한 남성 청년의 반감이 지지율 하락과 젠더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렇게 되자 문재인 정부에서도 페미니즘은 점차 언급조차 하기 조심스런 말이 됐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비롯한 성평등 정책은 답보 상태로 공전했다.

'이대남'은 이처럼 안티 페미니즘 성향으로 비판받긴 했지만, 대개는 지지율 반등과 정책 성공을 위해 어떻게든 고려하고 의식해야 하는 사회적 집단이 되었다. '이대남'이 정부와 정치 실패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일종의 '문제집단'으로 대상화된 것이다. 특정 집단을 고정된 속성으로 정형화하고 이에 기반해 편견을 가지는 것은 해당 집단에 대한 차별과 폭력, 혐오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같은 흐름에 맞서 그러한 담론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으로 청년 남성들의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려 시도한 것은 누구보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이었다. 권명아 교수는 2021년 '옷을 갈아입은 성차별-'젠더갈등' 프레임과 '이대남' 현상을 비판한다' 토론회에서 '이대남' 담론이 불평등과 고용구조의 문제를 세대 문제로 전치시키는 잘못된 프레임이라고 비판했다. 촛불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실패, 기업의 고용책임이 청년세대의 문제('청년실업')로 읽히면서 가려지고, 보수와 진보 진영 가릴 것 없이 한정된 파이를 두고 싸우는 청년 여성과 남성의 갈등 구도로 이 문제를 담론화했다는 것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가 제21대 대통령 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출정식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청년 남성을 낙인찍지 말자는 주장 또한 페미니즘의 언어이자 실천이었다. 계엄령 선포와 탄핵정국을 거치고 조기 대선을 치른 최근의 숨가쁜 정치 일정 속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쟁점이었다. 청년 남성이 다수 가담한 서부지법 폭동 사태 후에 여성학자 정희진은 '내 옆의 타자인 극우'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질문했다.

이같은 문제의식에 대해 당시에는 많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몇 달 후 대선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사태가 달라졌다. 보수·극우 정치인 지지 청년 남성을 이해하고 공존을 모색하자는 이야기가 주로 남성 지식인·전문가 그룹에서 속속 나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대남'을 낙인찍지 않아야 한다는 타당한 관점의 이면에 극우 보수화된 남성집단을 '타자'로 용인해야 한다는 몰가치적이고 그야말로 반페미니즘적인 측면이 숨어 있는 것일까?

대선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표면화된 이같은 남성 지식인 전문가 그룹의 관점이 이 정치 문제를 페미니즘 담론과 운동의 차원에서 고민해온 여성운동가·연구자들의 비판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가령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김혜정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를 "20대 남성 극우화 못박지 말자" 담론으로 명명했다. 보수 투표를 할수록 특정 지역이나 특정 연령대에 대한 진단 및 비판적 검토는 당연한데, 20대 남성만 특별히 그것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지 반문했다. 담론의 낙인효과를 고려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같은 태도와 관점은 먼저 안티 페미니스트의 페미니스트 담론화를 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법정투쟁을 돕는 활동가 마녀 D의 분석도 이와 상통한다. 그는 칼럼('이준석 키즈'가 오게 된 까닭)에서 청년 남성의 불만을 들어주면 바뀔 수 있다고 낙관한 결과가 바로 이준석의 성장이며, 한국형 인셀의 온오프라인 공간 잠식이라고 말한다. 현재 청년 남성들은 다양한 성향을 갖지만서도 안티 페미니즘으로 단결할 수 있기에 문제적이라 본다.

마녀 D는 그럼에도 이들을 이해해보자는 '경청'에의 의지가 젠더폭력과 성차별의 현실을 방기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그리고 과연 청년 여성 일반이나 보수·극우화된 여성들에게도 이같은 관심과 포용력이 동일하게 발휘되고 있는지를 되묻는다.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메리퇴진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2030 남성들의 이준석+김문수 지지율이 70프로를 상회한 것도 충격이지만, 같은 연배 여성들의 지지율이 35-40%로 나온 것도 놀랍다. 다만 '이대남'에 집중된 담론 환경에서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도 하나의 딜레마이자 해명해야 할 정치적 현실이다. 필자의 한 연구자 동료는 이번의 대선을 두고 만약 청년 여성들이 '이대남' 같은 선택을 했다면, 아마 "가루가 되도록 까였을 텐데"라고 표현했다. 그 친구는 최근에도 남자친구의 스토킹, 임신중단 시술비 지급 거부 등으로 괴로워하는 여학생들을 상담한 경험을 들려줬다. 젠더폭력 가해자와 수업을 열심히 듣는 보통의 남학생이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도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학생이자 동료 시민이라는 점이 바로 페미니스트들이 늘상 처하는 '이대남' 딜레마다.

따라서 우리는 '이대남'을 손쉽게 손절하려는 움직임도 경계해야 하지만 '이대남'에 단호하지 못한 작금의 현실, 그리고 '이대남'의 문제가 마치 페미니즘의 한계인 양 전치되어온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대남'의 문제는 최근 일부 언론에서 그러하듯 '페미니즘이 싫어서', '군대나 연금 문제를 이준석이 해결해줄 것 같아서' 등의 목소리를 나열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또 학계 일각에서 그러하듯이 극우·보수화 측정과 데이터 수집·조사를 강조하면서 이 현상을 일종의 데이터 사이언스의 영역으로 가져가는 것으로도 풀리지 않는다.

결국 '이대남' 문제는 이를테면 그러한 데이터 '해석'을 둘러싼 담론 투쟁의 영역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안티페미니즘에 대한 분석과 페미니즘적 개입을 우회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번의 정치적 격변을 통해 더 분명해진 2030 세대의 정치적 선택의 성별화에 대한 해석과 이를 극복하는 실천 또한 페미니즘의 영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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