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국, 일본 측에 1015개 반환 문화재 목록까지 제출했지만…생각 달랐던 일본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국, 일본 측에 1015개 반환 문화재 목록까지 제출했지만…생각 달랐던 일본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1부 ⑤ 제4차 한일회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

한일회담 재개와 문화재소위원회 설치

한일 양국은 1953년 10월부터 4년 넘게 중단된 한일회담을 1958년 4월 15일에 재개한다. 다음날 일본정부는 주일대표부에 106점의 문화재 인도와 함께 489점의 문화재 목록을 건넸고, 4월 22일과 4월 26일에는 한일 양국이 각각 억류자들을 석방했다. 5월에는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특사로 야쓰기 카즈오(矢次一夫)가 방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 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 5월에 한국을 방문한 야쓰기 카즈오(오른쪽) 특사의 인사를 받고 있다. ⓒ 국가기록원

제4차 한일회담 개최 이후 한일 양국은 실무자 회의를 열고 위원회의 구성과 그 명칭을 논의한다. 한국 측은 '기본관계 분과위원회', '한국의 대일청구권에 관한 분과위원회('선박 반환 문제 소위원회', '한국 문화재 반환 문제 소위원회', '그 외 청구권에 관한 소위원회')', '재일한인의 법적지위에 관한 분과위원회', '어업 문제 및 평화선 위원회'를 제안했다.

한편 일본 측 제안에는 한국 측 제안과 명칭만 다를 뿐 주요 의제들을 논의하는 위원회가 모두 있었다. 다른 점으로 '한국청구권위원회'에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하는 소위원회 없이 청구권 문제와 선박 문제를 논의하는 소위원회만 있었다. 한국 측은 문화재 반환 문제 관련 소위원회가 없었지만, 일본 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아래와 같이 구두전달사항 합의로 이전처럼 청구권소위원회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일본 측은 제4차 한일회담을 진행하기 위해 '기본관계 위원회', '한국 청구권 위원회(청구권 소위원회, 선박 소위원회)', '어업 및 평화선 위원회', '재일 한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위원회'를 제안했다. ⓒ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일본이 과거 우리나라에서 탈취해 간 예술품에 관해서는 작년 12월 31일 한일예비교섭 종결 때 조인된 합의사항에 따라 일본정부는 즉시 이전이 가능한 아국 예술품을 조석한 기일에 반환하기로 되어 있음은 이미 귀하도 아는 사실로 그 후 전기 협의사항의 시행을 위해 개최된 한일 실무자 회의에서 이와 같은 예술품의 반환 문제가 토의되어 방금 그 시행단계에 있으며, 또한 지난 4월 15일에 재개된 한일회담 제4차 회담에서도 계속 이 문제가 의제로서 채택・토의될 것인 바…(후략)…".

그러나 한국 측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 측이 문화재 반환 문제 논의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당시 일본 측은 4차 한일회담 개최 전에 내부 회의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해 "겉치레든 진짜든 문제를 남기기 때문에 이 점은 향후 교섭 또는 공작을 통해 적당한 범위에서 그치도록 여러 노력을 하겠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동 문제 논의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한국청구권위원회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지 않자 한국 측은 다음과 같이 문화재소위원회 설치를 다시 주장했다.

"청구권소위원회는 크게 문화재 문제와 그 외 청구권 두 개를 포함하고 있으며, 청구권 소위원회에서 양쪽 모두 토의해야 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종래의 경위에서 볼 때 문화재는 선박문제소위원회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문화재 문제는 청구권소위원회에 들어가야 하며 일본 측이 말한 문화재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토의한다는 제안은 의외의 발언이다."

한일 양국은 문화재 반환 문제 관련 논의와 진행 방법에 대해 별도의 회의를 진행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에 한국 측은 사와다 렌조(沢⽥廉三) 수석대표와 이타가키 오사무(板垣修) 아시아 국장을 찾아가 일본 측 주장 철회를 요구했다. 결국 사와다 수석대표는 청구권위원회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말하면서 문화재소위원회 설치에 동의했다.

▲ 한국 측이 일본 측을 찾아가 문화재소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는 기록이 담긴 외교문서. ⓒ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이와 같이 한국 측은 문화재 반환 문제 관련 소위원회 설치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일본 측을 설득시켜 이 문제만을 논의할 수 있는 '문화재소위원회'라는 틀을 마련했다. 이전에는 문화재 반환 문제가 청구권 문제와 함께 다뤄지면서 구체적으로 논의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제4차 한일회담부터는 문화재소위원회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논의가 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한국 측의 적극적인 교섭 준비와 '제1차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항목' 제시

한국 측은 문화재소위원회 개최가 결정되자 청구권 문제보다 문화재 반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문화재 반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칙인 구두전달사항이 이미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일본 측이 반환할 수 있는 문화재 목록 제출받고, 전문가를 일본에 파견하여 문화재를 조사하기로 하는 등 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준비를 했다.

한국 측은 제1회 문화재소위원회(6월 4일)에서 일본 측에 반환할 수 있는 문화재 목록 제출을 요청하는 한편 한국미술품의 정의를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그 외 문화재 및 지도원판을 포함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문화재의 반출 시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한국으로서는 국내에 여러 가지 다른 의견도 있지만, 1905년 이후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한다. 한국 국내에는 1905년 이전에 일본이 가져간 것도 많아 이에 대한 반환을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본 소위원회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일단 1905년 이후로 한다. 따라서 일본 측에서 한국에게 반환할 용의가 있는 한국 문화재의 전 목록을 제출해 주실 것을 요구한다."

한국 측은 이후 여러 차례 열린 문화재소위원회와 비공식 회담에서 489점의 양산부부총 문화재 목록과 그 외의 목록 전달을 요청한다. 하지만 일본 측은 '문화재 반환 문제 관련 기본방침이 정해지지 않았다', '정부의 훈령을 받지 못했다', '문화재보호위원회 등을 설득해야 한다' 등 내부 사정을 설명하면서 한국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한국 측은 제5회 문화재소위원회(10월 25일)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계속 보이는 일본 측을 실질적인 논의로 끌어들이기 위해 '제1차 반환청구 한국 문화재 항목'을 제시한다. 이는 '지정문화재(「중요미술품」을 포함)', '소위 조선총독부(「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해 반출된 것', '소위 통감・총독 등에 의해 반출된 것', '경상남북도 소재 분묘 그 외 유적에서 출토된 것', '고려시대 분묘 그 외 유적에서 출토된 것' 다섯 항목 총 1015개의 문화재를 포함하고 있었다. 한국 측은 이 항목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또 다른 문화재 목록도 제출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한국 측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은 좀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이유를 들면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가 하면, 문화재소위원회를 잠시 중지하고 내년에 다시 개최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 한국 측이 문화재 반환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를 위해 제출한 '제1차 반환청구 한국 문화재 항목'. ⓒ日本政府(일본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한국정부의 문화재 반환 교섭 평가

제4차 한일회담은 1958년 하반기부터 북송 문제로 인해 중단과 재개를 거듭한다. 북송 문제는 재일조선인들 중 북한으로 가길 희망하는 자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둘러싼 문제였다. 제4차 한일회담에서 이 문제가 부각되면서 문화재 반환 문제 등 다른 주요 의제들은 좀처럼 논의될 기회가 없었다. 한일회담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제4차 한일회담은 결국 막을 내렸다.

제4차 한일회담이 중단된 시기에 한국정부는 1958년 4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열린 제4차 한일회담을 평가했다. 이 시기의 교섭은 전체적으로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고, 주요 의제들도 제대로 논의를 할 수 없었다고 평가하면서 그 원인이 일본 측에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문화재 반환 교섭에 대해서는 일본 측이 내부 사정을 들면서 소극적인 태도를 계속 보였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58년 6월 4일에 동 소위원회가 개최된 후 전후 12차례나 회담을 거듭하였는데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하였는데 일본 측의 지연 작전은 소위원회에서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다. 일본 측은 106점 외에 문화재를 더 이상 반환하려 하지 않을뿐더러 반환하겠다는 언질도 주지 않고 심지어는 한국 점령 중 한국으로부터 탈취하여간 문화재 목록을 제시하여 달라는 우리 측의 요구에 대하여 변변히 회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우리 측은 일본이 동 목록을 제시하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도 없으므로 11월에 우리에게 반환되어야 할 문화재의 요목을 제시하였든 바 일본 측은 이것을 '참고'로 받아둔다고 할 뿐 이 내역에 대한 구체적인 토의조차 거부하였다."

"이리하여 소위원회는 우리에게 반환되어야 할 문화재에 관한 구체적인 토의를 할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 제4차 한일회담을 평가하는 기록이 담긴 외교문서. ⓒ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한국 측의 입장에서는 구두전달사항을 통해 106점의 문화재를 인도받았고, 그 외의 문화재도 제4차 한일회담에서 논의하고 돌려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문화재소위원회 설치 문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 측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다.

한국 측은 일본 측을 구체적인 논의로 이끌어 내기 위해 '제1차 반환청구 한국 문화재 항목'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일본 측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문화재 반환 교섭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 측이 제4차 한일회담의 성과가 부족했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화재보호위원회, 여전히 문화재 반환 반대

제4차 회담이 종료된 이후 일본에서는 외무성이 문화재보호위원회와 문화재 반환 문제 관련 회의를 열었다. 외무성은 문화재 반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재를 어느 정도 한국에 건넬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문화재보호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기본적으로 외무성의 입장에 반대했고, 돌려준다고 하더라도 일본 측이 선택한 것을 주면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종래 한국 측은 돌려받는 일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는 일한병합조약 무효론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시 그렇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입수한 것을 건네는 일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국립대학의 것은 문부성도 손을 쓸 수가 없다. ···(중략)··· 민간 소유 조선 문화재를 조사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입장으로서는 건넬 수 없다고 거절한 경위가 있다"

"권리・의무의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적극적으로 반환할 의무도 없고 일본 측이 자발적 의사에 기초한 증여라고 한다면, 건넬 품목도 일본 측이 자유롭게 고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외무성은 이와 같은 내부 사정들을 한국 측에 설명하면서 문화재 반환 교섭에 임했고, 한국 측도 문화재보호위원회를 종종 비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한 문화재보호위원회의 부정적인 입장은 문화재 반환 교섭에 걸림돌이 되었다.

1957년 12월 31일에 한일 양국이 합의한 구두전달사항은 재개되는 회담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할 것을 명시했다. 한국 측은 이를 통해 제4차 한일회담에서 문화재를 돌려받고 그 외의 문화재도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여러 이유를 대면서 문화재 반환 교섭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국 측이 '제1차 반환청구 한국 문화재 항목'을 제시하면서 일본 측을 적극적인 논의로 끌어내려 했지만, 일본 측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로 인해 한국 측이 생각하고 있었던 또 다른 문화재 '반환'이라는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문화재소위원회 개최라는, 문화재 반환 문제만을 논의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문화재 반환 교섭은 물론이고 한일회담에서도 중요한 국면이 나타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한국정부 및 日本政府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엄태봉,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구조'>, 경인문화사, 2024.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엄태봉 대진대학교 강의교수

엄태봉 대진대학교 국제학부 강의교수는 정치학자로 문화재 반환 문제, 강제동원문제,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인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문가다. 역사인식문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 <교과서 문제는 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일본 '영토·주권 전시관'의 영토 문제 관련 홍보·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