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은 또 한 번 위대함을 증명했다. 친위 쿠데타로 촉발된 내란 사태를 이토록 단호하고 명확하게 극복할 수 있는 민주적 역량을 지닌 국민이 과연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 시민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사실에, 잠시 뿌듯한 자부심을 느껴본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한 시선으로 돌아가야겠다. 필자는 이번 내란사태를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구조적 결함이 노출된 사건으로 본다. 그래서 영국의 사회비평가 이보 모슬리의 책 <민중의 이름으로>(김정현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를 펼친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저자는 책 첫머리부터 매우 도발적 주장을 제시한다. "양의 탈을 썼다고 해서 늑대가 양은 아니다. 스스로 '민주적'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뜻은 단순하다. 즉 '민중이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이 통치하고 있지 않다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다."(상기책 인용, 인용미기재시 동일) 저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가 아닌듯하다. 저자는 우리의 통념을 돌파하고자 민주주의를 말했던 사상가들을 인용한다.
"가난한 자들이 승리하여, 일부의 사람들은 처형되고 또 일부는 추방되고 나머지는 모든 사람에게 통치권력이 동등하게 분배될 때 민주주의가 성립된다."(플라톤 <국가>)
"추첨으로 공직을 임명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과두정치였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매우 급진적이다. 선거를 통해 좋은 정치가를 선택한다는 생각과는 아예 결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근대 정치사상가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통치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 군주제는 단 한사람이 통치권을 갖는 경우이고, 데모크라시는 민회에 통치권이 있는 경우이며, 귀족정은 (임명되었든 선출되었든 상관없이)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되는 일부 특정한 사람들로 구성된 기관이 통치권을 갖는 경우이다."(홉스 <리바이어던>)
"공화국에서 민중이 주권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민주주의다. (중략) 대표자를 추첨으로 뽑는 것은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대표자를 선거로 뽑는 것은 귀족정의 방식이다."(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이상하게도 이들은 하나같이 선거를 통한 정치인선발을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정'이라 말하고 있다. 모슬리는 귀족정이 현대에 들어와서 '민주주의'로 탈바꿈하게 된 연유를 설명한다.
변화는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 출발점에는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있다. 그는 고대적 의미의 직접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단하면서도, 당시 유럽의 군주제 체제 내 일부 선출 제도를 '민주적 요소'로 간주했다. 스미스는 잉글랜드 하원과 같은 일부 기관에서 일부 구성원이 선거로 선출되는 제도를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그의 발언 이후, 대의제(대표제)를 '민주적 절차'로 보는 새로운 관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흐름에 힘을 더욱 실어준 인물이 바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볼테르의 친구였던 아르장송 후작이다. 그는 고대의 직접민주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며, 오히려 혼란을 야기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 민주주의는 이내 무정부 상태에 빠진다. (중략)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민중은 대리인을 통해서 행동을 하며, 이들 대리인들은 선거를 통해서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처럼 18세기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선거에 의한 대의제'를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로 재정의하려는 흐름이 본격화되었다. 고대 민주주의에 대한 단절과, 새로운 민주주의 개념의 형성. 그 분기점에 스미스와 아르장송 같은 사상가들이 있었다.
이 흐름이 급진화된 계기는 로베스피에르였다. 그는 아르장송 후작의 대의제 개념과 몽테스키외의 일부 사상을 결합해, 대규모 '민주적 테러'를 정당화했다. 즉, 정치적 대리인인 우리가 혁명의 적들을 처형할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이는 자코뱅당이 주도한 '대리의 정치'의 시작이기도 하다. 한편, 영국·미국·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새로운 정부 형태를 설계하면서, '추첨을 통한 공직 임명'(고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을 아예 배제해버렸다. 이는 루소, 해링턴, 몽테스키외가 모두 추첨제를 민주주의의 본질로 여겼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땠을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당시의 시민의회, 즉 추첨에 기반한 고대 민주주의의 의미로 이해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주주의에 강하게 반대했다.
미국 헌법의 설계자인 제임스 매디슨의 말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소요와 논쟁의 도가니였다. (중략) 그리고 통상 난폭하게 종식되면서 오래가지도 못했다."
또 다른 건국의 아버지 알렉산더 해밀턴의 단호한 주장이다. "민중이 스스로 숙의하고 결정했던 고대 민주주의는 좋은 정부의 특징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의 본성은 전제정치였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였던 토머스 제퍼슨은 또한 이런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소도시(타운)의 규모를 넘어서면 실행할 수 없다."
18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선거', 곧 대의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과두제의 일종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 인식은 19세기를 지나며 바뀌기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변화의 배경에는 유산계급의 현실적 필요가 있었다.
"대의민주주의라는 신화는, 중산층 자신들이 통치하는 것을 공인받고, 자신들이 사회를 경영하는 것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쐐기를 박은 인물이 바로 토크빌이었다. 민중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가 폭정과 혼란, 심지어 살육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 그는, '민주적이면서도 폭정을 피할 수 있는 정치 체제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상대적 안정성과 제도적 정교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를 프랑스에 이식 가능한 대안적 모델로 제시하고자 했다. 토크빌은 그 이후, 민주주의는 가능하되 그것은 절제되고 균형 잡힌 대의제 형태여야 한다는 신념을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저자는 토크빌이 예찬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노예제, 유력한 비밀집단 세력, 금권주의 입법, 부의 거대한 불평등과 같은 명백히 평등하지 않은 (미국의) 현실을 무시하면서,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주권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토크빌의 국제적 영향력 덕분에 대의정부가 최선이란 생각이 굳어졌다. 우드로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내세운 구호는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었다. 이러한 슬로건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그 결과, 대의민주주의는 곧 민주주의 그 자체로 여겨지게 되었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그 밖의 민주주의 가능성은 점차 지워졌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대의제는 본래 왕이 귀족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민중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제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민중 스스로의 통치는 대리인을 통한 통치로 대체되었고, 그 결과 민중의 이익은 공론장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영국의 '인클로저(enclosure)' 정책이다. 1700년부터 1850년까지 영국 의회는 3,000건이 넘는 법령을 통해 공유지를 사유화했고, 이는 영국 섬 전체 면적의 약 24퍼센트에 해당하는 광대한 규모였다. 전통적으로 가난한 농민들은 군주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이제 군주는 더 이상 실질적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법적 절차라는 이름 아래, 빈민들의 땅은 부유층에게 배분되었고, 대의제 의회는 민중의 이익이 아닌,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되었다.
오늘날의 금융 시스템에 의한 대중 수탈은, 과거 인클로저 운동과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유산 계급이 장악한 의회는 은행 시스템을 통해 신용 창조라는 새로운 수탈 장치를 설계했다. 이 신용 창조는 반복적으로 거품을 낳고, 거품이 꺼질 때마다 경기 침체는 오히려 계급 간 격차를 더욱 벌리는 역할을 한다. 은행업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의회는 농민층에 불리한 조건을 제도화했다. 예컨대 토지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현금 유통이 거의 없던 농촌에 현금 납부를 강제했던 것이다. 그 결과, 농민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땅을 팔거나 저당 잡힐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은 유산 계급의 자산 축적과 민중의 몰락을 동시에 초래했다. 은행 시스템은 처음부터, 유산 계급에 의한 민중 수탈의 제도적 도구였던 셈이다.
저자는 간접·대의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직접민주주의로 직진하기를 독려한다. 필자는 저자와는 생각을 약간 달리한다. 직접민주주의의 몇가지 아이디어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그 못지않게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 관료주의척결이란 관점으로 현실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능부전의 가장 큰 이유가 관료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회학자 로베르토 미헬스가 주장한 '과두제의 철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좌우를 막론한 모든 대중 조직은, 시간이 흐를수록 필연적으로 소수 엘리트의 지배 구조로 수렴하게 된다. 이 이론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능동적으로 방어하지 않는 한, 그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과두제로 쉽게 귀결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과두제에서는 민주주의가 관철되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관료주의 경향을 띄게된다. 선한 의도로 출발한 조직이라 하더라도, 관료화와 과두화의 구조적 압력을 피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돌파구는 탁월한 리더십에 의한 현장 중심의 개입과 실행일 수밖에 없다. 왜 이재명 대통령의 타운홀 미팅에 대중들이 열광하는가?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이미 오래전 관료주의로 타락했고 기능부전상태에 빠져있음을 드러내는 현상이며, 동시에 민중이 '직접 접속 가능한 정치'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금껏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백낙청 선생이 "촛불혁명 이후 이재명 하나 건졌다"고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남는다. 개인의 탁월함이 민주주의의 지속적 성공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선한 사람들도 조직을 이루면 민중의 의지로부터 점점 유리되어 결국 엘리트 과두집단으로 변해버린다는 '과두제의 철칙'을 이재명은 과연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성군 정조의 역량으로 조선은 중흥기를 맞는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조선은 몰락하고 만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고, 더 치열하게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이재명 이후'에도 살아남고, 더욱 성숙한 형태로 진화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성군 정조가 떠난 후 조선은 망했다. '이재명 이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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