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1939년 1월30일 독일 의회에서 이번 전쟁은 유대인이 상상하는 것처럼 유럽 아리아 종족의 절멸로 끝나진 않으며 이 전쟁의 결과로 유대인이 절멸할 것이라고, 너무 성급한 예언인지는 모르지만, 선언한 바 있다. (나는) 고대의 유대법을 처음으로 적용할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적어도 지난 천년 동안 이 세상을 위협해온 역사상 전무후무한 악마도 드디어 갈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이언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606쪽).
위에 옮긴 글은 아돌프 히틀러가 1942년 1월30일, 나치 열성 지지자들로 가득한 베를린 스포츠궁전의 드넓은 강당에서 했던 연설이다. 그 날은 마침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 지 딱 9년째를 맞은 날이고,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1일-1945년 5월8일)이 터지고 2년 반쯤 뒤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이란 이름 아래 대량학살에 뜻을 모았던 '반제(Wannsee)회의' 열흘 뒤의 일이기도 하다(반제회의는 연재 91 참조).
히틀러는 그가 3년 전(1939년 1월30일) 제국의회에서 꺼냈던 '유대인 절멸 예언'을 되풀이하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고대 유대법'이라 했다. 아마도 히틀러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독자분들도 잘 아시듯, '눈에는 눈'은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기원전 1810-1750년 생존 추정) 왕이 만들었다는 성문법이다. 히틀러는 1942년 한 해 동안 '유대인절멸'을 주제로 한 연설을 적어도 다섯 번(1월1일, 1월30일, 2월24일, 9월30일, 11월8일) 되풀이했다. 11월8일 연설은 "사람들(유대인)은 나를 보고 예언자라고 비웃었다. 유대인들이 지금은 웃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더는 웃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은 멸종될 것이다"라는 섬뜩한 예언을 내놓았다.
히틀러는 말로만 '유대인 멸종'을 외칠 뿐, 문서로 학살 명령을 내리질 않아 빼도 박도 못하는 전쟁범죄의 증거물을 남기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데이비드 어빙 같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명령하지 않았다"고 우긴다(마치 일왕 히로히토가 난징 학살이나 '위안부' 성노예 관련 문서를 남기지 않았으니 전쟁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일본 극우들이 떠벌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빙에 대해선 연재 120 참조).

현대문명의 '산업화된 학살'
히틀러의 스포츠궁전 연설 뒤 나치의 민간인 학살이 본격화됐다. 6개의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 헤움노,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루블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 가운데 아우슈비츠 가스실은 규모가 가장 컸고, 희생자 숫자도 가장 많았다(유대인 100만 명 포함, 110만~130만 명). 게다가 가장 늦게까지 가스실 학살이 이뤄졌다(1944년 11월 폐쇄). 그렇기에 나치 전쟁범죄 하면 사람들은 아우슈비츠를 떠올린다(희생규모 2위는 트레블링카 90만 명). '죽음의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우리 인류문명사의 부끄러운 기록들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산업화된 학살'로 일컬어진다. 옛중국이나 로마황제들이 해내기 어려운 대량학살이 가능했던 것은 잘 짜인 관료제와 콘베어 벨트로 상징되는 현대문명 덕이다. 폴란드 유대인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 영국 리즈대)은 그의 역작(Modernity and Holocaust, 2000)에서 홀로코스트를 '현대의 관료제적 합리성'과 관련지어 풀이했다.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조직한 이야기는 (도덕적․정치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경영의 교과서로 만들 수 있다"라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지그문트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새물결, 2013, 252-253쪽).
바우만은 비평가들로부터 "통찰력을 지녔다"고 격찬을 받은 그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현대의) 합리성과 윤리가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체제에서는 인간이 주된 패배자'라고 했다. 현대문명의 합리성이 홀로코스트를 낳았다는 사실은 얼핏 역설(逆說)로 들릴 수도 있지만 섬뜩하다.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21세기에 또 다른 홀로코스트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생전의 바우만은 유대인들의 배타적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억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홀로코스트를 내세워 부당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못 마땅해 했다).
아렌트, "독일 국민도 전쟁 책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관련 다큐들을 보면, 대규모 정치집회장이나 가두 행진 때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히틀러를 쳐다보는 장면들이 눈길을 끈다. 괴테의 문학작품을 읽고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이른바 '문명 민족'이라 자부하는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독선을 비판하기는커녕 동조 또는 침묵하면서 타민족․타자의 생존권을 배려하지 않았다. 일찍이 프랑스로 도망쳤다가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갔던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나치를 지지했던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정복전쟁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정복한 첫 번째 나라였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 주민 대다수가 (히틀러의 침략에 따른) 정복을 지지했고,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독일 주민이 정복을 수동적으로 묵인하거나 심지어 암묵적으로 찬성했다고 덧붙여 말하는 것을 잊지 않을 경우에만, 이 주장은 옳다](한나 아렌트, <유대인문제와 정치적 사유>, 한길사, 2022, 573쪽).
아렌트의 요점은 히틀러가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많은 독일인들이 비판은커녕 침묵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반유대 정책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인종차별이다. 그런데도 많은 독일인들은 비판을 삼가고 못 본 체 했다. 나치의 삼엄한 통제도 한 요인이겠지만, 독일인들 마음속 오랜 반유대 정서가 침묵을 지키도록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패전 뒤 독일인들이 내놓은 반응들은 어땠을까.
"너희들만 고통 받은 게 아니다"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셰필드대)는 그가 펴낸 두 권의 대작(1998년에 낸 <Hitler, 1889-1936 Hubris>와 2000년에 낸 <Hitler, 1936-1945 Nemesis>)으로 히틀러 연구에 관한 한 권위자로 꼽힌다. 커쇼는 패전 뒤 독일인들은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모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지적한다.
[히틀러 밑에서 자기가 한 일을 해명해야 하는 사람 중에서 죄책감은커녕 후회하거나 뉘우치는 사람도 드물었다. 어쩌다가 예외는 있었지만 그들은 나치 시대가 야만주의로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친 것은 자기도 거들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도대체 인정하지 못했다. 사람이기에 거짓말, 왜곡, 변명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것 말고도 자기가 저지른 행동에 책임지는 것을 꺼려하는 심리적 장벽 같은 것이 있어 보였다](이언 커쇼, <히틀러 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1020쪽).
커쇼의 눈에 비친 나치 간부들은 '언제는 히틀러를 우러러보면서 그가 그리는 유토피아를 열심히 따르더니', 패전 뒤엔 히틀러가 화려한 수사로 자기들을 속여 '야만적 (전쟁범죄) 계획의 무력한 공범'으로 만들었다고 원망하는 모습들이었다. 커쇼가 보기엔, 전쟁 지도부에 책임을 미루긴 독일의 보통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많은 평범한 독일인들도 왜 자기가 히틀러한테 속아 그런 행동을 했는지(혹은 마땅히 했어야 할 행동을 안 했는지)를 설명하거나 항변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구원을 약속한 지도자가 알고 보니 저주를 가져왔다는 논리였다. 아니면,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안을 허용하지 않았던 전체주의 공포통치 때문에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이언 커쇼, 1020쪽).
커쇼는 "위 두 개의 논리 모두 과녁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비판한다. 언젠가는 뜨거운 박수와 함성으로 히틀러에 열광했던 독일 보통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연합군의 잇단 공습을 겪으며 고생했다. 그러다 끝내 항복 소식을 듣자, "나도 힘들었다"며 피해자 타령을 늘어놓았다. 실제로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풀려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너희들만 고통 받은 게 아니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나는 사무실에서 공무를 수행했을 뿐"
독일의 보통사람들은 대량 학살 사실을 어느 정도 아는 상태에서 1945년 패전을 맞이했을까. 독일인들이 나치 홀로코스트를 몰랐는가, 또는 알았는데도 모른 체 했는가의 물음은 독일의 전쟁범죄 책임을 어디까지 물을 것인가에도 관련된다. 많은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몰랐다고 하는 근거를 모아보면 이렇다. △강제수용소 학살(가스실 운용 등)은 하인리히 힘러가 지휘 하는 친위대원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나치의 용어도 '동부로의 재정착'이니 '최종해결' 등과 같은 기만적이고 모호한 완곡어법(euphemism)으로 진실을 가렸다. △나치 정권은 전시 언론통제를 했고, 게슈타포(비밀경찰)는 모든 독일인들을 밤낮없이 감시했다.
전쟁 뒤 독일의 많은 보통사람들은 이런 이유들을 내세우며 "나는 전혀 몰랐다"고 우겼다. 진실을 알고 보면, 딱히 그렇지 않았다. 1942년 1월 반제회의 뒤 나치는 '유대인 없는 유럽'을 만들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이웃 유대인 주민이 트렁크 하나를 들고 떠나는 것을 창문 너머로 봤다.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은 화물열차를 타고 멀리 떨어진 동유럽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런 대규모 이송에는 철도청 직원을 비롯한 여러 민간인들이 나름의 역할을 맡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구경꾼들이 길에서 지켜봤다.
매튜 휴즈(영국 브루넬대, 전쟁사)와 크리스 만(런던 서리대, 유럽사), 두 연구자는 나치 히틀러 시대를 살았던 독일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에 초점을 맞춘 책(Inside Hitler's Germany: Life Under the Third Reich, 2000)을 냈다. 내용 가운데 철도청 고위간부와의 인터뷰를 보자.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이 '재정착'되었습니까?" 답: "글쎄요. 그것까지는 몰라요. 우리가 바르샤바에서 피난 갈 때가 되어서야 이송된 사람들이 유대인이나 범죄자나 그 비슷한 부류였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열차들이 트레블링카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나요?" 답: "물론 알고 있었죠." △"그곳들로 가면 처형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나요?" 답: "당연히 몰랐죠!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곳들에 가본 적도 없는데... 난 크라크푸나 바르샤바 사무실에 붙어 앉아 단지 공무를 수행할 뿐이었어요"](매튜 휴즈, 크리스 만, <히틀러가 바꾼 세계> 2011, 플래닛미디어, 372쪽).
이 철도청 간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상황을 몰랐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나치의 유대인 '최종 해결' 과정에서 그 자신이 했던 역할이 '거대한 학살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죄의식을 못 느끼는 공감 제로의 작은 나치요"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작은 나치'는 연재 118, 119). 그가 생각이 모자라서 '작은 나치'가 됐을까. 1961년 4월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지켜봤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생각이 모자란' 아이히만에게 누군가가 '제대로 된 생각'을 불러 넣어주지 않았기에 그가 악행을 이어갔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유대인 절멸정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21, 186쪽).
위의 두 연구자는 철도청 간부처럼 당시 유대인 수송에 관여한 독일 민간인 수천 명은 수용소 학살을 알았을 걸로 본다. 화물열차 안에 유대인들을 가득 싣고 떠난 특별열차(나치의 용어를 빌자면, '동부 지역으로의 재정착 열차')는 텅 빈 채 돌아왔다. 열차를 움직인 사람들만이 홀로코스트를 알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가기 전 검진을 했고, 우체국 근무자는 독일 유대인들에게 이송을 지시하는 최초 서신을 전달했다. 경찰은 종종 독일에서 유대인 검거를 맡았고, 유대인들은 대낮에 이송 준비를 위해 거리를 옮겨 다니기도 했다. 독일 대중이 유대인 학살을 상세하고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어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의심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매튜 휴즈, 크리스 만, 375쪽).
강력한 소문의 네트워크
홀로코스트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라울 힐베르크(1926-2007, 버몬트대)에 따르면, 특히 아우슈비츠를 드나드는 독일 민간인들이 입소문의 주요 전파자였다. 전쟁 물자를 만드는 대규모 공업단지 성격을 지녔던 아우슈비츠에는 여러 민간회사의 직원과 기술자들이 오갔다. 힐베르크는 바로 이들이 독일의 구석구석까지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크고 작은 소식을 전한 주역으로 봤다. 아우슈비츠 근처 주민들도 입소문을 퍼뜨렸다.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어느 역무원은 집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시신을 태우는) 단내가 가득 차오르더니 창문이 푸르스름한 얇은 막으로 뒤덮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조차 학살의 물리적 증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19km 남짓 떨어진 카토비체 주민들은 아우슈비츠의 (시신 태우는) 불길을 볼 수 있었다. 주민들은 절멸과 소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소식을 정기적으로 독일의 친지들에게 퍼뜨렸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324쪽).
그 무렵 유대인 체포-강제이송-처형에 대해선 많은 얘기들이 나돌았다. 터무니없는 헛소문도 유럽에 퍼졌다. 수용소의 희생자 시신에서 나오는 지방으로 비누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 따위다. 오늘날까지도 이 비누 얘기가 사실인양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힐베르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력한 소문의 네트워크' 때문에 "수용소 이주자들이 비누로 가열되고 있다", "폴란드 사람들도 유대인들처럼 비누가 될 것이다"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알고 있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티머시 스나이더(예일대, 동유럽사)는 많은 독일 보통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해도, 유대인 대량학살 사실에 대해 몰랐을 리는 없다고 여긴다.
[유대인의 대량학살은 독일에서, 적어도 가족들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우슈비츠가 (1942년) 학살 시설이 되기 훨씬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토론 대상이었다. 3년에 걸쳐 수만 명의 독일인들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구덩이 위에서 사살했던 동유럽에서, 대다수 주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다. 수십만의 독일인들이 학살을 목격했으며, 동부 전선의 수백만 독일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전쟁 중에 아내들과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학살 장소를 방문했다] (티머시 스나이더, <블랙 어스>, 열린책들, 2018, 294쪽).
많은 독일인들이 알게 된 또 다른 이유로는 우편물이다. 군인들은 고향집에 있는 가족에게 전선 상황을 설명하면서 학살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때로는 학살 현장의 사진을 곁들이기도 했다. 독일인 가정에는 살해된 유대인에게서 빼앗은 물건들이 쌓였다. 그것들은 우편으로 전달되거나, 또는 병사들과 경찰들이 휴가 나올 때 들고 온 약탈품이었다.
독일인들은 나치 정권이 잇달아 내놓는 반유대적 조치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여기엔 독일인들의 오랜 반유대 정서도 한몫했다. 어떤 이들을 대놓고든 속으로든 기뻐했다. 자신에게 이롭다고 봤기 때문이다. 유대인 상점이 불매운동의 표적이 되면, 사람들은 일반 독일상점에서 물건을 사게 된다. 유대인 의사나 변호사가 폐업을 하면, 독일인 의사와 변호사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유대인들이 비운 자리도 독일인들이 메웠다. 독일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라파엘 젤리히만의 책(Hitler: Die Deutschen und ihr Führer, 2004)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때때로 공개적으로 열리는 '유대인 경매'에서 값진 의복과 가재도구를 싸게 구입하는 사람들, 그리고 유대인 이웃과 친구가 믿고 맡긴 재산과 물건들을 착복하는 경우까지,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재산을 노골적으로 약탈했다. 많은 독일국민들은 나치가 유대인들을 거만하다며 혼내주겠다 해도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학대와 집단학살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다](라파엘 젤리히만,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생각의 나무, 2008, 211쪽).
[독일 민중은 히틀러를 점점 더 두드러지게 환호했다. 강제수용소의 건립에,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태도와 출신 때문에 사람을 체포하는 일에 대부분의 독일인은 모르는 척 무시해버렸다. 실업자를 없애고 민족적 자의식을 강화해주는데, 정치범 3만 명을 체포하거나 유대인 몇 천 명이 학대당하거나 추방당한다고 대수겠는가?](라파엘 젤리히만, 214쪽).

"수치심을 느꼈고, 악몽으로 잠을 못 이뤘다"
독일의 패전은 독일인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1945년 4월 독일 중서부 바이마르 지역 고타 마을 주민들은 미군에 이끌려 가까운 오르드루프 수용소를 둘러보도록 강제 동원됐다. 오르드루프는 부헨발트 수용소의 하위 수용소 가운데 하나다. 부헨발트에는 모두 합쳐 28만 명이 수감됐고, 그 가운데 5만 6,500명이 식량 부족과 열악한 환경, 처형 등으로 숨을 거두었다. 오르드루프엔 1945년 3월말 1만 1700명이 수감돼 철로 건설 등에 동원됐다. 그해 4월초 미군이 다가오자 친위대 경비병들은 오르드루프 수감자들을 부헨발트로 옮기려고 '죽음의 행진'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걷기 어려운 병약자들은 모두 사살됐다(⇒www.buchenwald.de/en/geschichte/chronologie/konzentrationslager).
그 바로 뒤 미 육군 제4기갑사단이 오르드루프 수용소를 접수했다. 미군 병사들은 곳곳에 비참하게 죽은 수감자 시신들과 마주쳤다. 일부는 불에 타 재가 되거나 검게 그을린 채 부패해가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몇몇 미군 장병들은 흥분한 나머지 부헨발트 수용소로 몰려가 포로로 붙잡은 친위대 경비병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쏴 죽였다(이와 관련된 처벌은 없었고 쉬쉬하며 덮었다).
워낙 오르드루프 현장이 참혹했기에 4월12일 아이젠하워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이 직접 보러 왔다. 오마르 브래들리 중장, 조지 패튼 중장 등과 함께였다. 기자들이 따라 나섰고, 참상을 담은 동영상은 훗날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상영됐다. 미군은 나치 잔혹성을 봐야 한다면서 인근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데려왔고, 시신을 묻는 궂은일도 시켰다. 주민들은 '악몽 때문에 그 뒤로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미군 병사들이 우리를 수용소로 데려갔을 때, 그곳 모습은 끔찍했다. 시신 더미, 깡마른 생존자들, 그리고 죽음의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에서 살았지만, 이 공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미 홀로코스트기념관, USHMM Oral History Archives).
[우리는 수용소를 걸어 다니도록 강요받았다. 옷, 신발, 머리카락 더미를 봤다. 이제 누구도 이 끔찍함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경험은 내 조국에 대한 나의 생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이스라엘 Yad Vashem Testimony Collection).
나치 시녀가 된 독일교회. 침묵을 깬 고백교회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나치 정권의 전쟁범죄 뒤에는 독일 시민들의 무관심과 침묵이 있었다. 독일인 대다수는 1930년대 나치 정권의 유대인 차별과 1940년대 유대인 추방을 그냥 바라만 봤다. 여기엔 크든 작든 반유대 감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안 그래도 밉상인 유대인들이 없어진다니 잘 됐다고 여겼을 것이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그런 독일인들의 무관심과 침묵, 반유대정서가 나치의 전쟁범죄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체코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오토 쿨카(1933-2021, 히브리대, 유럽사상사)는 "인간으로서 유대인이 겪는 비참한 운명에 대해 독일인들이 보인 놀라운 무관심은 나치 정권으로 하여금 보다 과격한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집단학살)로 나아가도록 행동의 자유를 주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도 "아우슈비츠로 나아가는 길은 증오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됐다"는 명언을 남겼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책과함께, 2010, 299쪽 참조).
무관심은 곧 침묵의 다른 표현이다. 나치 정권의 인종차별 정책에 침묵한 것은 독일의 보통사람들만 아니었다. 독일교회도 나치 시녀로 전락했다. 히틀러가 '국가주교'(Reichsbischof)로 임명한 루트비히 뮐러(개신교 연합조직인 '독일 복음주의교회' 대표)는 "히틀러 총통은 하느님의 손이 내린 선물이며 누구도 (히틀러를 지지하는) 우리를 말릴 수 없다"는 아첨을 늘어놓았다(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교양인, 2008, 416쪽). 가톨릭 성직자들도 이렇다 할 비판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로버트 에릭슨(퍼시픽 루터란대, 역사학)은 그의 책(Complicity in the Holocaust, 2012)에서 독일 교회가 히틀러를 지지하고 유대인 탄압에 침묵한 배경을 '독일 민족주의'라는 잣대로 풀이한다.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목사들과 교수들은 모두 특히 강력한 민족주의가 두드러졌다. 민족주의는 그들 마음속의 많은 타협된 가치들을 정당화했다. 위기의 때에 민족주의가 독일을 강하게 만든다면, 책을 불태우고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이웃국가들을 공격하는 것은 모두 합리화될 수 있었다. 히틀러를 지지한 사람들은 오로지 독일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았고, 모든 행동을 정당화했다](로버트 에릭슨, <홀로코스트의 공모: 나치 독일의 교회들과 대학들>, 한국기독교연구소, 2024, 17쪽).
에릭슨이 말하는 '민족주의'는 '생활권(Lebensraum) 확보'를 내세워 다른 국가나 민족, 소집단들을 열등하다고 깔보고 힘으로 뭉개는 파시즘으로 이어졌다. 비판의 목소리가 없진 않았다. 칼 바르트(1886-1968), 마르틴 니묄러(1892-1984)를 중심으로 한 '고백교회'(Bekennede Kirche, 1934년 창립)는 베스트팔렌 지방의 바르멘에 모여 이른바 '바르멘 신학선언'으로 히틀러가 바라는 '교회의 국가 종속' 정책에 맞섰다. 1936년 3월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 권위가 되려는' 나치당을 하느님이 심판해주길 바라는 성명서를 냈다. 그 성명서를 함께 읽은 고백교회 목사 700명은 모두 게슈타포에게 끌려갔다.

"그들이 유대인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고백교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르틴 니묄러는 "기독교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복종해야 한다"라고 설교했고, 그 때문에 붙잡혀 재판 끝에 7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구금 기간을 넘긴 상태라서 출소하게 되자, 히틀러가 직접 나서서 게슈타포로 하여금 그를 다시 잡아넣도록 했다. 1938년 3월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힌 니묄러는 그 뒤 다하우 수용소로 옮겨가 노예노동으로 7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독일 패망 뒤 풀려났다(같은 고백교회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1944년 7월의 히틀러 폭살미수사건에 얽혀 1945년 4월 교수형으로 숨졌다).
나치의 잘못을 비판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적극 지지했던 독일인들이 치른 대가는 컸다. 6년 전쟁(1939-1945)의 패배로 무려 700만의 독일인 사망자를 내고 모든 것이 망가졌다. 완전한 파괴와 단절(또는 새출발)을 뜻하는 '0시'(Stunde Null)이란 용어마저 생겨났다. 나치에 맞서다 수용소에 갇혔던 니묄러는 아래와 같은 경구(警句)를 남겼다. 그 깊은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 글을 마친다.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martin-niemoeller-first-they-came-for-the-socialists).
이 연재는 이제 단 1회만 남았다. 최종회 글에선 독일의 과거사 반성, 이웃 국가들과의 화해를 주제로 (이웃 일본에 견주어) 살펴보고 연재를 마무리할 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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