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 시각에서 북한은 급할 수밖에 없다.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중국과의 관계가 어려우니 러시아로 급선회할 정도다. 미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며 세계적 현안들을 흔들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위기이자 기회인 지금 시점이 움직이기 좋은 타이밍이다. 특히 미국이 이란을 공격한 것은 다음 대상으로 북한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으며 북한과의 좋은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이재명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위해 철책선의 대북 확성기 중단에 이어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대북 방송 중단, 북한 관련 자료 일반공개 등을 추진한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 지명자는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한국이나 미국 모두 북한이 스스로 대화를 선택하게 판을 깔고 있다. 일본도 참의원 선거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대북 관계 개선에 호의적인 이시바 정권은 당분간 지속될 분위기다.
북한으로서는 지금과 같이 좋은 환경은 또다시 마주하기 힘들 수도 있다. 북한 경제는 고난의 행군 시기만큼 어렵고 북한 주민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다고 한다.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은 대화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호기를 놓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므로 조만간 이 기회를 잡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자 기대다.
그런데 막상 북한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 심화하고, 중국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있으며, 트럼프의 친서를 거부하고 있다. 한국의 확성기 중단에 북한도 확성기를 중단했지만, 여전히 대남 관계에는 냉랭하다. 2018년 동계올림픽 참가 및 2019년 하노이 회담 등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다르다.
비록 김정은 위원장이 2020년에 미국이 확실하게 입장을 변화할 때까지 대미관계 개선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남한과는 적대적 2국가 관계라고 선언했지만, 다시 오기 힘든 좋은 환경을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북한의 관점에서 본 북한의 자신감
그러나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가 다시 등장했기 때문에 '호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재명 정부이기 때문에 기회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김정은 위원장은 젊은 나이에 권력을 승계받고 북한이 변하면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전에는 핵 개발 과정에서 미국과 협상을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핵무기 완성을 선언하고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북한으로서는 큰 결심이었다.
그런데 회담이 결렬됐다. 김정은 위원장은 당초 미국은 북한과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미국에 대해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말을 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중재했던 한국의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든 표현으로 비난했고, 윤석열 정부 시절 진보도 보수도 믿을 수 없다면서 '적대적 2국가'를 선언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재명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도 믿을 수 없으며, 믿을 건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북한이 스스로를 믿기 위해서는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력과 독자적인 경제 능력,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우선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력은 북·러 군사동맹으로 정리를 했다. 단순히 서류만으로 동맹관계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 러·우전쟁에 북한군을 참전시켜 북한이 먼저 동맹관계를 확인했다.
러시아는 북한군 참전에 따른 대가를 지불했지만, 북한의 노림수는 러시아와의 동맹 확인과 북한군의 실전 능력 제고에 있었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라는 동맹 국가의 어려움에 북한이 도와주었다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김정은 위원장은 러시아 전승기념일에 주북한 러시아 대사관을 방문하여 1945년 광복 당시 러시아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북한이 외부의 도움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북한 이념체계의 기본 중 하나인 '자주' 개념에는 어긋나는 파격적 발언이었다.
그만큼 북한은 외부의 군사적 공격에 대해 민감하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역시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와의 군사동맹 재건은 북한에 절실한 문제였다.
반면 중국에 의존하기는 위험성이 컸다. 휴전 이후 중국이 보였던 모습, 한·중 수교 당시의 배신감, 시진핑 정권에서 북한을 압박했던 다양한 모습들로 인해 중국을 믿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비록 러시아는 중국만큼 경제 지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안 되지만, 군사적 배경은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북·러 군사동맹이 건재하는 한 미국은 군사적 옵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핵무기는 북한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북·러 군사동맹은 대외적 안전판이다. 이로써 북한은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내외적 대응력을 갖췄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미국의 대이란 폭격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동요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는 긴밀하지만 군사동맹까지 가지는 않았다. 이란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주변에 이란을 경계하는 세력(이스라엘, 사우디 등)이 많다. 반면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주변에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중국, 러시아)이 있기 때문에 미국은 군사적 공격을 선택할 수 없다고 자신한다.
둘째, 경제 문제에 대한 자신감이다.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소련 붕괴와 동구권의 연쇄 붕괴는 북한체제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살기 위해 북한은 남한을 선택했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남북 간에 상호 협력의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핵 의혹을 제기하며 마지막 남은 북한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직후 미국은 북한 핵의 확산을 막기 위해 김영삼 정부를 배제한 채, 동년 10월 제네바 핵합의를 도출했다. 그 당시 미국의 협상 대표였던 갈루치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에 북한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을 받아들였다. 경제적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북한은 미국에 핵 개발력을 공개하고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네바 핵합의는 10년 만에 물거품이 됐고,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주력했다.
문제는 경제였다. 사회주의 경제에서 중앙의 공급능력이 상실되면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1990년대 북한경제는 폐허만 남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대부분의 공장은 가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전기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으며, 고려호텔에서 밥 한 그릇, 계란 한 개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북한 내부에서 조달할 수 있는 것들은 구할 수 있었지만, 대량으로 생산해서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중앙 공급 기능은 거의 상실된 상태였다. 식량난이 심각했던 것이다.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물물교환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0여 년 후 북한은 달라졌다. 가동되는 공장들이 늘어났고, 노동자들은 정해진 임금이 아니라 생산성에 따라 차등 월급을 받았다. 거리에 있는 상점에는 상품이 늘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대중 정부와 미·일 등 국제사회는 연간 200만 톤에 가까운 식량을 북한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은 주민들이 최저 수준으로 먹기 위해 적어도 400만 톤은 필요했는데 자체 생산량이 약 150만 톤에 불과했다. 250만 톤이 부족했다. 이 부족분을 밖으로부터의 지원으로 메꾼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자체 생산량을 높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1990년 중반 자연재해로 인해 황폐화된 농지를 정비해서 약 120만 정보의 농지를 확보했다. 아울러 물길도 정비했다. 그 결과 북한은 자체 생산량이 4~500만 톤(연 수준)으로 올라왔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적어도 외부에 손을 내밀지 않아도 되는 정도까지 올려놓은 것이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은 시장을 확장했다. 북한당국은 시장 확대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중앙의 공급능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억제할 경우 주민들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었다. 2002년 북한은 시장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고, 연이어 중국 자본의 진입으로 공장은 가동되기 시작했다. 남북 간의 경제교류도 한몫을 했다.
이렇게 기사회생한 북한 경제를 김정은 위원장이 이어받았다. 북한은 무역계획을 풀어서 석탄 수출을 늘릴 수 있도록 했고, 북한의 각 기관들은 경쟁적으로 석탄 수출과 투자유치를 연계했다. 이 시기에 많은 중국기업들이 생필품을 중심으로 북한에 들어갔다.
북한은 시장을 억제하기보다, 시장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했다. 2019년 4월 헌법 개정에서 북한 경제 운영방식을 '대안의 사업체계'에서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로 대체했다. 시장을 북한경제 운영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북한은 시장과 관련된 각종 법을 도입하고 있다. 최근에는 개인들이 자동차를 등록할 수 있도록 한 자동차 관련법을 도입했다.
코로나 사태를 전후해서 국경 폐쇄와 경제제재 강화 등으로 북한 경제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국가개발5개년계획'을 제시하면서 "앞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어려운 시기가 올 수 있으니 각오하라, 자력갱생만이 살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2025년은 5개년계획이 마무리되는 해다. 비록 목표치만큼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외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체계는 어느 정도 잡힌 듯하다.
중국과의 무역이 급감했기 때문에 시장에 물자는 과거와 같이 풍부하지 않다. 그러나 자체 생산한 제품과 식량 등을 이용하여 변화된 시장 유통망에서 돈벌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북한 주민들의 절박함이 작동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북한 주민들은 중앙의 외환관리, 실질적 세금 징수(자릿세 등)와 같은 불편함이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응해 가고 있다.
최근 시장 환율이 급등하는 현상은 오히려 북한 원화 가치가 평가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북한당국이 공무원 등 시장 활동과는 무관한 월급 생활자들의 월급을 대폭 인상했다. 시장 물가와 기존 생활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는 시장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조치로도 해석할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오늘도 열심히 먹고 살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조금이라도 돈벌이가 되면 몰려든다. 북한의 경제 문제는 외부 잣대로 볼 때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의 잣대에서는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수준이다. 북한은 경제 문제에서도 자신감을 가진 듯하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기 위해 원칙과 인내가 필요
이제 북한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2020년 "대미관계 개선은 장기적 과제다. 미국이 스스로 잘못된 것을 고쳐서 우리와 관계 개선을 하자고 할 때까지 자력갱생으로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다르다. 트럼프 행정부는 앞으로 3년 반, 이재명 정부는 5년 남았다. 김정은의 시간은 현재의 한국이나 미국 정부가 끝나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트럼프가 자신의 업적을 위해 북한에 접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여도 답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은 묵묵부답, 자신들이 정해 놓은 길로 갈 것이며 그에 맞지 않을 경우 거부할 것이다.
북한이 정해 놓은 길은 분명하다.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 및 그에 맞는 대우와 경제제재 해제, 내정 불간섭, 남북 간 2개 국가 등이다. 경제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북한은 외부의 식량 지원이나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대외 협상을 위해 북한의 가치를 높이려는 특별한 행동이나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가 유엔대표부를 통해 보낸 친서를 거부했다. 북한이 요구하는 사항을 수용하고 실행에 옮길 경우라야 북한은 관계 개선에 응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물론 미국이나 일본이 북한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시간은 북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원칙과 인내가 필요하다.
우선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북핵 문제는 물러설 수 없다. 북한은 국제질서를 무시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에 경제제재를 받고 있다. 북한이 국제질서에 순응할 경우 순차적으로 제재는 완화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음으로 남북관계는 국가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점 또한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남북정상회담에서 서로 간 합의한 것이다. 북한의 일방적 파기는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 북한에 매달리는 모습을 연출할수록 시간은 북한 편이라는 생각은 더 강해진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관계 개선하는 것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지역의 안정에도 바람직하다.
북한이 반드시 한국을 거쳐야 한다는 이른바 '한국 패싱'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 한국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패싱할 이유가 없다. 시간은 절대 북한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임기가 제한되어 있는 각 국의 정권은 북한 문제를 풀어서 성과를 올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북한은 이러한 각국의 속성을 너무 잘 안다. 조급함은 북한의 느긋함을 강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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