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 왼팔을 꼽으라면 단연 김병준과 문재인이다. 노무현은 자서전 <운명이다>에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 꾸준히 정책자문을 해준 유일한 대학교수"가 김병준이라 썼다. 2002년 대선 유세에선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나는 대통령감이 됩니다"라고 외쳤다. 김병준은 노무현의 임기 5년을 함께 했고 문재인은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이다.
둘 사이가 멀어진 계기는 정책실장이었던 김병준의 교육부총리 임명, 그리고 낙마다. 2006년 김병준이 부총리에 내정되자 곧 그의 교수 시절 논문 표절 논란이 일기 시작했고 연이어 자녀들의 특목고 편법 편입학 문제가 불거졌다. 임명을 강행했지만 논란이 잦아들지 않자 결국 14일 만에 사퇴해야 했다.
김병준은 조금만 더 버티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의 판단은 달랐다. 논문표절도 문제지만 자녀 편법 편입학은 민심이반을 가져올 것이라 본 것이다. 결국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김병준은 그 결론을 주도한 사람이 대통령의 정무특별보좌관이었던 문재인이라고 여겼다. 참여정부의 성공을 위해 함께 일한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원망을 갖게 된 그는 이후 친노들과 결별한다. 정부의 성공을 위해선 서로 척지더라도 민심을 우선하고 스스로 냉정해져야 한다.
'지키자'며 민심 이기려다 망해
문재인 정부의 결정적 패인은 부동산 정책 실패와 이른바 '조국 사태'다. 이 두 논란의 공통점은 민심을 이기려 했다는 것이다. 스무 차례 넘게 내놓은 정책들이 모조리 역풍을 맞고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음에도, 또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김현미 장관 경질'을 요구하는 청원이 수백개가 올라왔음에도 청와대는 김현미를 지켰다. 3년 6개월. 문재인 정부는 기어이 그를 역대 최장수 국토부 장관에 등극시켰다. 조국사태는 '조국을 지키자'를 외치다 나라를 두 동강 내고 결국 윤석열이라는 차관급 출신 역대 최약체 후보에게 권력을 내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지키자,' '밀리면 안 돼,' '조중동 프레임'을 외치며 민심을 이기려다 망했다.
이러한 현상은 문재인 정부 때 특히 심해졌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떤가. 여당의 이른바 개딸이라 불리는 지지자들과 이들에게 휘둘리는, 아니 이들에게 잘 보이려는 의원들로 인해 여당 일각은 상식적 판단이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이재명을 지키자'더니 '강선우를 지키자'며 민심과는 정반대로 간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식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강선우 의원의 여가부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면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크게 잃을 뻔했다. 첫째 여성. '여성계'가 아니다. 여성은 민주당의 최대 표밭이다. 여성 담당 주무부처에 갑질하는 여성 의원을 장관으로 보내면 같은 여성 입장에서 동의가 되나. 둘째 2030세대. 젠더 문제에선 젊은 남녀가 갈리지만 공정, 갑질 문제에서는 함께 분노한다. 셋째 보좌관. 과거 의원과 동지였던 이들이 이젠 의원으로부터 갑질과 모욕을 당하는 게 당연한 사람들이 된다. 강행했다면 앞으로의 모든 대화는 녹음됐을 것이다. 막판에 사퇴로 유턴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여성, 2030, 그리고 중도는 다음 선거가 오기만 별렀을 것이다.

여야 모두 소신 발언 사라져, 왜?
'지키자'와 함께 민주당의 또다른 문제는 대통령 눈치 보기이다. 강성지지자에 휘둘리고 대통령 복심까지 살펴야 하니 소신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재미있게도 국민의힘에서 넘어온 김상욱 의원 외에 강선우 임명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표한 민주당 의원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은 대통령의 의중만 살핀다. '내부총질'이라는 화살을 맞을까 입을 다문다. 당이 군대가 됐다. 국민의힘이 이미 그래서 망했지만 민주당도 수직적 당정관계가 고착화되는 분위기다.
김영삼 정부 때 신한국당 초선의원이었던 이재오, 홍준표, 김문수 등이 당내 쇄신을 외쳤다. 김대중 정부 때 소장파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 최고 실세 권노갑의 퇴진을 주장했고 이명박 정부 때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은 대통령 형 이상득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했다. 2006년 김근태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며 도발했다. 2007년 대선 패배 후 대통합민주신당 초선의원들이 참여정부 총리, 장관 출신 중진들에게 백의종군을 요구했다. 2021년엔 여당인 민주당 초선의원들이 장관 후보자 3인 중 최소 1명은 낙마시켜야 한다고 청와대에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아무도 내부총질이라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소신 있는 의원들 씨가 말랐다.
노무현 정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전 의원은 국회의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청와대 눈치를 보게 된 계기를 참여정부가 초재선 의원들을 장관에 임명하면서부터라고 회고한다. 참여정부 1기 내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44세 남해군수 김두관을 행자부 장관에 앉히고 검찰총장 한참 후배인 46세의 여성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19명 장관 중 60대는 단 한 명이었고 나머지는 40~50대였다. 이후 유시민 등 초재선의원들도 장관으로 보내 경력관리를 하게 했다. 의원들이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 경쟁하기 시작했다.
의리, 여의도에서 고생한다
시간은 변화를 만든다. 그런데 정치 쪽은 이상하게 흘렀다. 과거 민심을 따라야 한다고 배웠는데 지금은 지지자 눈치만 본다. 수평적 당정관계가 수직적 당정관계로 변했다. 국회의원과 보좌진의 관계가 동지 관계에서 갑질 관계로 변질됐다. 소신 발언을 내부 총질이라고 한다. 과거 쇄신을 외쳤는데 지금은 의리를 외친다. 여야가 따로 없다.
의리는 어떤 이들에게 중요할까. 건달 아닐까. 아니라면? 능력 없는 이들이다. 의리 외치며 강선우 옹호하고 나선 정치인들 심리는 간단하다. 그래야 나중에 자기도 보호받을 수 있으니까. '기브앤테이크'요 자기애적 동지애일 뿐이다. 의리가 여의도에서 많이 저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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