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미쳐가고 있다. 새벽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현실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다. 그런데 왜, K-팝과 자주포, 반도체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 나라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사태에 암묵적으로 동조했을까? 경제적 곤궁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납득되지 않는다. 일본이나 대만 직장인의 실수령액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 한국은 여전히 '될성부른 나라'로 비쳐진다. 그렇다면 이 모순된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오래된 철학자 한 사람을 다시 찾았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그는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마르크스의 이론을 결합해, 억압과 해방의 조건을 새롭게 사유한 철학계의 거성이었다. 그가 20세기 중반,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통과하며 써낸 책 <에로스와 문명>(김인환 옮김, ㈜나남 펴냄), 필자는 이 책을, 숨 막히는 7월의 한낮에 다시 펼쳤다.
마르쿠제가 가장 깊이 의지한 이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프로이트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넘어서려 한다. 마르쿠제가 문제 삼는 핵심 개념은 바로 '쾌락 원칙'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동물적 속성을 지닌 존재다. 본능의 충족, 곧 쾌락의 추구가 인간 행위의 일차적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쾌락 원칙'이라 불렀다. 그러나 문명이 성립하려면 이 쾌락 원칙은 억제되거나 변형되어야만 한다. 모두가 각자의 욕망에만 몰두한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고, 문명도 성립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인간의 심리적, 성적 에너지, 즉 리비도는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한된 리비도는 특정한 목적, 즉 문명 건설과 유지를 위한 방향으로 조직되어야 했다. 이 에너지의 조직화된 표현이 바로 노동이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사회에서 성적 도착은 억압되고 금기시되어 왔다. 리비도는 생산적 노동에 투입되어야 하는데, 비생산적인 성적 활동은 생식에도, 노동에도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명은 억압을 통해 유지되고, 억압은 리비도의 방향을 제어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무제한적 욕망 추구에 제동을 거는 심리적 원칙을 프로이트는 '현실원칙'이라 불렀다. 쾌락원칙에서 현실 원칙으로의 전환, 이것이 곧 문명의 발전 과정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단순한 심리적 조정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교체는 인간의 발전-개인의 발전(개체발생)과 인류의 발전(계통발생)에 매우 커다란 외상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러한 사건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개인과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반복된다."(상기책 인용, 미인용 기재시 동일)
프로이트는 이 현실원칙에 대한 인류사 차원의 사고실험 뒤 대담한 가설적 서사를 제안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현실원칙은 원시 유목 사회에서 재화와 여성을 독점하던 가부장에 대한 아들들의 반란, 즉 친부 살해를 통해 처음 발생한다. 가부장이 제거된 뒤, 자식들은 서로 협의하며 재화를 분배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형제 씨족'을 구성하게 된다. 친부 살해의 기억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아버지를 신격화하고 형제간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금기와 억제가 유도된다.
친부 살해는 죄의식이란 원초적 감정, 정동(affect)을 촉발했다. 이후 죄의식은 문화에 스며들어 억압과 억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형제 씨족에서 비롯된 규범과 질서는 점차 사회적·정치적 지배체제로 제도화되었다. 이와 같은 문명의 구조는 다시 개인에게 되돌아온다.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곧 가정과 학교, 사회 속에서 이러한 현실원칙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내면화하게 된다. 문명이란 결국 억압의 체계를 통해 개인의 욕망을 조직하고, 통제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현실원칙의 승리는 결코 완전하거나 안전하지 않다.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현실원칙이 반복해서 재확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쾌락원칙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곧, 쾌락원칙을 억압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요구됨을 의미하며, 문명이 본능 억압 위에 서 있다 해도 그것은 항상 내적으로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되어 등장하는 구체적 현실원칙을 수행원칙이라 한다. 그리고 이 수행원칙은 적정수준일 수도 아니면 과잉억압일 수도 있다. 과잉억압의 예는 인도를 떠올려보면 된다. 인도의 물질적 수준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선배가 만들어놓은 최상층 지배계급에게만 이득이 되는, 카스트 등의 제도·문화적 관습으로 인해 모두가 괴로워한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 군대, 기업 문화 등은 억압과 통제를 통해 현실원칙을 반복적으로 강요한다. 전세계 어디에도 '태움'과 같은 문화가 정착된 곳은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김우창은 책 <정치와 삶의 세계>(민음사 펴냄)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한국 사회는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다." 심리학자 김태형도 한국 사회를 '학대위계사회'라고 질타한다. 최근 들어 증가하는 이상한 길거리 폭력은 사람들의 내면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다. 사회 구성원들이 감내하기 버거운 과잉억압이 지속될 경우, 그 사회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과잉억압 상황에서도 살아날 방법은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유럽이 그랬듯 신대륙으로 대규모 이민을 방출하는 정착식민주의, 세계대전처럼 청년층의 상당수를 사라지게한 전쟁, 아니면 압도적인 경제성장뿐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세계가 극우로 물들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문명은 인간이 가진 삶의 본능, 즉 에로스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에게는 이와 반대되는 죽음 본능, 타나토스가 있다. 두 본능은 서로를 견제하는 길항관계에 놓여 있다. 둘 다 강력하지만, 그나마 상대의 힘으로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문명의 고도화는 에로스를 점차 소진시킨다. 문명이, 그리고 문화가 발달할수록 오히려 폭력성이 강화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문명 안에서의 기본적인 작업은 리비도적이 아닌 노동이다. 노동은 불쾌한 것이며, 그러한 불쾌는 강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이란 것이 주로 에로스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보다 리비도의 회수일 것이다. 문화는 그것이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정신적인 정력을 성욕으로부터 빼낸다."
한국의 내란사태, 독일의 나치즘, 고대국가 건설기의 희생제의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문명과 문화의 완숙도가 절정을 구가할 때 벌어진 이 터무니없는 사실은 인간이 문명을 성립시키는 에로스를 과도하게 소진시키고, 억제한 후과일뿐이다. 에로스가 쇠잔해지면 죽음본능이 우리를 공격한다. "문화는 끊임없는 승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문화는 문화의 건설자인 에로스를 약화시킨다. 약화된 에로스에 의한 비성화(非性化-에로스의 약화, 필자주)는 파괴적인 충동을 풀어놓는다." 고도의 문명이 형성되어가던 고대 그리스에서 인신을 희생시키며, 광란에 빠지는 희생제의가 왜 지속되었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 문명, 문화의 고도화는 인간의 공격성을 축적해가고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 사회는 몰락하고 만다.
마르쿠제는 불안한 우리에게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에로스'다. 문명은 에로스의 소모를 통해 구축된다. 하지만 에로스가 줄어들수록, 그 자리를 죽음 본능이 채운다. 폭력과 냉소, 소외와 분노는 그렇게 확대된다. 마르쿠제의 해법은 명료하다. 줄어든 에로스를 다시 성장시키는 것, 그것이 문명의 방향을 전환하는 길이다. '에로스를 살리자'는 말이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인간의 생명력, 따뜻함, 함께 하려는 마음, 존재에 대한 기쁨—이 모든 것이 바로 에로스다. 마르쿠제는 삶의 놀이화, 즉 놀이가 일상으로 스며든 사회를 상상했다. 놀이는 쾌락원칙에 속하며, 무엇을 위한 노동이 아니다. 성과나 목적이 아닌, 그 자체로 즐거운 경험이다. 예를 들어, 서로 눈치보는 회식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만남의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런 것이 진짜 놀이다. 예술과 놀이, 마을공동체와 같은 연대와 우정의 공간 확대도 쾌락원칙에 부합한다. 이러한 공간은 억압을 누그러뜨리고, 에로스를 회복시키는 터전이 된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진보 정당의 당원공동체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단지 정치조직의 문제를 넘어서, 필자가 늘 강조하는 '심리적 보상'을 제공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여는 일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가 말하는 '인정'의 공간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야만적 경쟁이 아니라 상호인정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성의 복원이 바로 그 지향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삶의 놀이화는 쾌락원칙의 전면화보다는, 과잉억압의 축소가 우선되어야 한다. 쾌락원칙을 전면화하기엔 우리 사회의 조건이 너무 척박하다. 그러하기에, 지금 절실한 과제는 '놀이화'의 이상을 말하기 전에, 과잉억압부터 줄이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과잉억압을 줄일 수 있을까? 핵심은 분명하다. 모든 한국 성인들의 내면에 남아 있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만들어낸 학교와 교육시스템을 혁명적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해냄 펴냄)에서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과의 일화를 소개한다. 김누리가 다니엘에게 "독일에서의 학교생활은 어땠습니까?"라고 묻자, 다니엘은 이렇게 답했다. "저에게 고등학교 시절은 하루하루가 파티였습니다." 파티처럼 기억되는 학창 시절. 그런 기억을 품고 성장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어떤 사람으로 자라날까?
김누리는 책에서 자문한다. "내가 독일에서 오만한 엘리트를 본 적이 있느냐? 결론은 놀랍게도 본 적이 없다"였다. 김누리는 독일에서 오만한 사람도, 열등감에 짓눌린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주변에 물어본 이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열등감이 없으면 오만함도 없다. 응어리가 없으면 타인에게 오만할 필요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마르쿠제가 그려낸 '억압 없는 사회의 시민상'에 가까운 사회가 아닐까? 한국인들을 옥죄왔던, 불행한 시대의 잔재인 과잉억압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신명의 민족답게 매일을 축제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부자다. 그럼에도 모두가 불행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부유한 인도, 한국이 불행한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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