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새 정부에서 지명된 장관 후보자 18명 중 14명에 대한 임명이 완료됐다. 논란이 컸던 두 명의 후보자와 내란을 옹호했던 국민통합비서관도 결국 사퇴했지만, 이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인식 수준과 철학, 인사 검증 체계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임명된 인사혁신처장 역시도 일반 사람들의 눈높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니 정부의 의도와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정부는 후보자의 '능력'을 봐달라고 하지만, 장관의 능력은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 능력은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이번 인사청문회를 거치며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유행어인가 싶을 정도로 자주 언급되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이다.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서면질의 답변서에 '사회적 합의'를 무려 45번 언급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이번에 구설수에 올랐던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역시 비동의 강간죄, 생활동반자법, 포괄적 성교육 등에 연이어 '사회적 합의'를 들먹이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했다.
'사회적 합의' 하면 오랜 시간 함께 호명되어 온 차별금지법이 떠오른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소벤처기업부, 법무부,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모두 하나같이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은 2007년 처음 발의된 이후로 20년 가까이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외면당해 왔다.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비율이 63.5%이고(반대는 25.8%), 심지어 기독교인 중에서도 55.1%가 찬성(반대는 36.1%)한다는 등의 반복되는 여론조사는 정치권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아니, 이런 여론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취지에 공감한다는 말이라도 남기는 것일까.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사회적 소통은 사회 구조의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과 소통은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는 현재 어떤 권력관계 안에서 사회구조와 상호작용하고 있을까?
먼저 사회적 합의는 한국에서 주로 누가 언급하는가. 많은 경우, 대통령과 고위공무원, 정치인들이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길 요구받을 때 사용한다. 사회적 합의를 계속 언급하는 것이 그들 스스로 이를 중요시 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모두 알다시피 대체로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사회적 합의는 '그 사안을 추진하지 않겠다'를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을 밝힌 후 사회적 합의를 '쿠션어' 처럼 덧붙이면서 비판을 누그러뜨리거나, 안 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역할도 한다. 혹은 그저 답변을 그럴듯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언급할 때도 있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답변에 별 내용이 없으며, '사회적 합의'라는 말이 빠져도 문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사회적 합의’는 책임 회피를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파급 효과가 크지만, 시민들에게는 생소한 제도나 정책들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조차도 그 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당연히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비춰주는 것은 아닐까.
실제 사회적 합의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추진하는 수많은 정책 중 합의에 기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부자 감세를 하면서 재정을 이유로 복지를 축소할 때,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쳤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오히려 합의를 이룬 사안을 뒤집는 경우는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합의를 이뤄놓고도 정권이 바뀌어서 폐기된 것들도 있고, 심지어 '공론조사' 결과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와 다르게 나왔다고 이를 없던 일처럼 만든 적도 있었다. 2018년 제주도에서 영리병원 개설 허가와 관련해, 도지사가 공론조사 결과를 뒤집고 영리병원을 허가한 사례, 작년에는 국민연금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더 내고 더 받는' 개혁 방향을 내놓았지만, 국회에서 이를 무시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사회적 합의는 정책결정자들이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정치적 언어가 되어 버렸다. 그것도 대부분 시민의 권리와 공공성을 지연시키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런 상황들은 단지 각각의 사안들을 가로막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합의는 민주적 가치의 핵심 요소인데, 오히려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사회적 합의'의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면서,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한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 담론은 사회변혁의 강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누가 무엇을 사회적 합의의 대상으로 호명하고, 무엇을 제외하는지, 또 합의가 어떻게 뒤집히는지를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정책결정자들이 ‘사회적 합의’를 사회개혁의 지연과 무력화의 도구로 사용할 때, 우리는 맞서야 한다. 누가 그 사회적 합의를 가로막는지를 말해야 한다. 합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시민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있다고 받아쳐야 한다. 이미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가 형성되어 있다면, 정부가 실행을 미루는 건 책임 회피라고 강력하게 지적해야 한다. 아직 합의가 부족하다면, 그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당장 구체적 행동을 촉구하고,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요구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다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언어로 되찾아올 때, 그것은 정부의 시간 끌기가 아니라, 시민이 주도하는 변화의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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