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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패색 짙던 1944년, 한국 여학생 일기까지 검열하며 사상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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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패색 짙던 1944년, 한국 여학생 일기까지 검열하며 사상 통제"

익산시 이만천 씨 어머니 '서국정의 일기'로 본 일제 식민교육

15일로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일제강점기 학생들은 식민교육을 통해 많은 차별과 고통과 억압을 받았다.

일제는 한국 여고생의 일기까지 검열하며 감시하고 사상을 통제하려 했고 일제에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태평양전쟁이 패망으로 치닫던 1944년에는 학생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와 사상 개조가 더욱 심했다.

일본 제국을 살았던 한국 여고생이 검열을 받으면서 쓴 기록이 '서국정의 일기'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의 한국 학생들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일본 경찰이 잡아가는 상황이었다. 일기는 일본 경찰이 '불온한 언행을 했다'는 혐의로 학생을 검거할 때 제일 먼저 채취한 증거물 중의 하나였다.

이런 학생들의 개인일기는 대부분 한글로 울분을 토하는 심정을 적어놓고 있다.

하지만 '서국정의 일기'는 정반대이다. 일본어 정자로 쓰여져 있고 철저하게 일제에 부합하는 내용들이 기재돼 있다. 일기검열을 통해 여학생까지 통제하려 했던 만큼 검열을 전제로 쓰여진 일기인 셈이다.

▲아들 이만천 씨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 영인본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일기 가운데에 일본 선생이 학생들의 사상 통제를 위해 써 놓은 글이 보인다. ⓒ프레시안

학계에서는 이런 점에서 '서국정의 일기'가 당시의 일제 만행을 보여주는 현실판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1944년 6월의 하루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6월 18일 일요일 맑음

5시 기상. 오늘은 하루의 수업을 마치고 종례시간의 '반성회(反省會)'도 마친 다음 또 남아서 '상회(常會)를 열었다. 그런데 모두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기차 통학생이 기차 안에서 난폭한 행동을 하거나 큰소리를 치기 때문에 주의를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차 안에서 난폭한 행동을 한 적도 없고 큰소리를 지른 적도 없는데 저렇게 소문이 났을까라고 생각하니 정말 억울해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국정은 1944년 당시 익산군 이리읍(현재 익산시)에 살고 있었다. 이때 나이는 17세로 정읍공립고등여학교 2학년이었다.

이날 일기 속에는 이리에서 정읍까지 기차 통학하는 여학생들이 정읍읍내 동급생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여고생의 일기를 검열한 일본 선생은 바로 옆에 빨간 글씨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눈물 흘릴 필요도 없다. 억울하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을 참고 온 힘을 다해 참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서국정의 일기' 가운데에 일본 선생이 학생들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빨간 글씨로 쓴 기록이 선명하다. ⓒ프레시안

언뜻 보면 한국인 여학생을 위로하는 일본 선생의 격려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 서국정의 아들인 이만천 씨(63·익산시 남중동)는 "이날 일기는 2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며 "첫째는 일기검열을 통해 학생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상회와 반성회라는 모임이 학생 상호 간의 감시 고발체제였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일기를 보면 종례시간에 반성회가 있었고 이후 상회가 열렸다"며 "일본 자료를 확인한 결과 반성회는 지난번 상회 때 나온 전달사항과 협의한 안건 등이 잘 이행됐는지, 이에 대해 상을 줄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자리였다. 상회 반성회는 상호 감시 비판의 자리였다"고 강조했다.

결국 '반성회'는 동료들의 말과 행동을 단죄하는 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상회'는 전쟁수행을 위한 상명하달과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일제는 상회와 반성회를 통해 학생을 통제하고 감시했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된다.

당시 상회는 학교에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 대부분 지역에 있었다.

전쟁수행을 위한 국민총동원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1940년대에 조직되었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반상회가 조직된 적이 있다.

이만천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2019년 이후 일기를 소중히 간직해 왔다.

일본어 정자로 반듯하게 쓴 '서국정의 일기'는 정읍공립고등여학교 2학년이던 1944년 4월 1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본어로 쓴 141쪽 분량의 기록이다.

전북 정읍 이평면에서 부농의 딸로 태어나 익산시 인화동에 살았던 서국정은 매일 기차를 타고 정읍에 있는 학교로 통학했다.

일기는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저녁 늦게 귀가하는 고단한 여고생의 하루하루이지만 연착이 많았던 기차를 기다리며 틈틈이 과제를 하고 주말이면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을 도왔던 일상을 담고 있다.

일기를 자세히 보면 1944년 6월 하순에 빨간글씨의 검열이 집중되어 있다. 왜 이때 학생들에 대한 감사와 통제가 몰려 있을까?

이만천 씨는 "이 시기는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군이 크게 패배하고 있던 때이며 미국의소리(VOA)방송이 연일 거듭되는 일본의 패전소식을 전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머지않아 일본은 패망한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던 때"라며 "이 같은 시기에 학생일기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강화되었다고 보여진다"고 말했다.

일기 가운데에 빨간 검열 도장이 찍힌 곳도 있고 통학의 고달픔을 위로하는 빨간 글씨도 눈에 띈다.

6월 22일 일기에는 '기차 통학의 괴로움 잘 안다. 거기서 굴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어 달라'는 일본 선생의 말도 써 있다.

▲아들 이만천 씨가 '서국정의 일기'와 관련한 자료를 설명하기 위해 정리하는 모습 ⓒ프레시안

이만천 씨는 "1944년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의 색이 짙었던 때"라며 "그래서 더욱더 한국인 여학생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황국신민으로 세뇌교육을 집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는 여학생들에게 일본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정체성까지 강요하는 세뇌에 나섰다.

1944년 7월25일 일기에는 '견디어야 일본 여성이다. 황군(皇軍) 아저씨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다고 조금이라도 불평을 한다면 황군 아저씨들께 미안한 일이 된다'고 적혀 있다.

검열받는 일기 속에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만천 씨는 "어머니는 조선여성이면서도 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스스로를 일본 여성이라고 적으셨다"며 "당시 일기는 통제의 수단으로 학생들이 제출하고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정부 시책에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적으신 것 같다"고 말했다.

1944년 조선총독부가 한국 여학생들에게 원하는 것은 시키는 대로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었다. 억압 속에서 일제는 여학생의 정체성까지 강요하고 일본 여성이 되라고 세뇌 교육을 한 것이다.

변은진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HK교수는 "'서국정의일기'를 보면 일본 선생이 읽고 '참 잘했어요'라며 도장을 찍고 빨간 팬으로 '좋은 자세이다. 집에 가서도 실천하라'는 식의 말이 적혀 있다"며 "이는 본인의 일기가 아니라 당시 학교 검열을 받기 위한 일기였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변 교수는 "일제시대 한국인 여고생의 일기는 현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며 "1944년은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가는 과정이고 일본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상황에서 학생들까지 노동에 동원하는 당시의 일제 교육정책이 어떠했는지 '서국정의 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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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홍

전북취재본부 박기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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