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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대통령 산재 대응 바람직하지만…한 명의 천재가 풀 수 있는 문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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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李 대통령 산재 대응 바람직하지만…한 명의 천재가 풀 수 있는 문제 아니다"

[인터뷰] 산업안전감독관 출신 강태선 안전관리학 교수가 말하는 산재 정책

이재명 정부 들어 산업재해 근절이 주요 국정과제로 자리잡는 모양새다. 중대재해 문제를 주제로 한 국무회의 공개, 산재 사망 발생 기업 질타, 산재 사망 대통령 직보 지시 등 조치가 연이어 속도감 있게 이뤄지고 있다. 다만 국정기획과제가 아직 발표되지 않은 가운데, 산업재해 근절을 위한 중장기적, 법제도적 대책은 빈 자리로 남아있다.

산업안전 근로감독관 출신으로 현장성과 연구 전문성을 겸비한 학자로 평가받는 강태선 서울사이버대 안전관리학과 교수를 만나 이재명 정부의 산재 대응에 대한 평가와 향후 과제를 들어봤다. 그는 중대재해 근절 대책을 논의한 국무회의를 호평하면서도 경찰 산하 중대재해 수사팀 신설에는 쓴소리를 냈다.

강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의 그간 산재 관련 대응을 "단기적으로는 가장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며 환영했다. 다만 이를 안착하기 위한 산업안전 대책 마련을 위한 범정부 혐의체의 제도화, 이 대통령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억제 효과'를 제도화하기 위한 노동부 내 시스템 마련 등 중장기 대책이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책의 내용은 노동부의 정책 전문성, 국책기관의 연구 전문성, 근로감독관의 집행 전문성 강화로 채워야 한다고 그는 제언했다.

강 교수는 "산업재해는 한 명의 천재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해당사자와 전문가, 정부가 참여하는 산업안전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다종다양한 산업의 안전지침과 정책을 개발하고 집행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 전문성 강화를 위해서는 현재 산업안전보건공단 산하에 있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독립성과 위상 강화를 우선과제로 들었다. 집행 전문성을 위해서는 동기부여된 근로감독관 확충을 위한 별도 직렬 채용과 교육체계 마련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강 교수는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에게는 그 자신이 노동자 출신인 만큼 "노동부를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사회부처"로 만들기 위한 사명이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아래는 지난 7일 서울사이버대 안전관리학과 연구실에서 강 교수와 한 인터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 강태선 서울사이버대 안전관리학과 교수. ⓒ프레시안

"이재명 정부, 가장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되는 산재 단기대책 실행했다"

프레시안 :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고 산업재해 관련 대응이 이어지고 있다. 먼저 중대재해 근절을 주제로 국무회의를 열어 공개한 일이 눈에 띈다. 어떻게 평가하나?

강태선 : 정부 조치를 환영한다. 단기대책으로는 가장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예상치도 못한 일을 했다. 국무회의를 공개한 것도 의외지만, 산재 예방이 주제였던 것이 더 놀랍다. 왜 산재를 주제로 공개 국무회의를 했을지 속내를 생각해 봤다. 산재는 당파성이 없는 주제다. 탈정치적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탈정치를 '정치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정파가 중요시해야 한다'는 말로 보면 그게 맞다. 기본권의 근간이 생명권이니까. 주가나 부동산을 주제로 공개 국무회의를 하는 것보다 바람직한 일이다.

산재가 범부처 대응이 필요한 속성을 가진 사안이라는 것도 드러냈다. 건설(국토교통부), 항만(해양수산부), 소방(행정안전부), 대학(교육부) 등등 산재와 무관한 곳은 없다. 정책 수립에도 범부처 협의가 중요하다. 환경부가 화학물질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 조달청, 국세청도 할 일이 있다.

프레시안 : 산재를 일으킨 대기업에 대한 질타도 이번 정부 들어 잦아졌다. SPC, 포스코이앤씨 등이 떠오른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강태선 : 국무회의에서 나온 의견들이 대체로는 다 나왔던 것들인데, '산재 사망사고가 일어나면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이 새로웠다. 그러려면 시장이 반응해야 한다. 회의에서 대통령도 물어봤는데, 주가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제도가 영업정지다.

지금도 노동부가 영업정지 요청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영업정지권은 영업허가권이 있는 곳에 있다. 즉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다. 작동 잘 안 한다. 지자체가 영업정지를 해도 기업은 가처분신청을 내고 다툴 거다. 결국 영업정지는 정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자체, 법원까지 '쓰리 쿠션'을 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실제 영업정지가 되지 않더라도 대통령이 '영업정지를 검토하라'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시장은 반응할 수 있다. 대통령이 변호사인데 관련 법을 모르지는 않았을 거고, 산재 예방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본다.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은 시스템이 아니다중장기대책 함께 가야"

프레시안 : 산업재해를 주제로 한 국무회의를 앞으로도 계속 열기는 어렵지 않을까.

강태선 : 산업안전 관련 범부처 협의를 제도화해야 하는데, 법적 근거가 딱히 없다. 범부처 협의가 가능한 위원회를 두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노사, 시민사회 등 이해당사자도 들어오게 해야 한다. 지금 산업안전보건법에는 그런 조항이 없다. 산재보상법에 산재 보상과 예방을 논의하기 위해 이해당사자와 노동부가 들어오는 위원회를 두게 한 게 전부다. 범정부 협의체를 만들고 5년, 10년짜리 로드맵을 짜게 해야 한다.

프레시안 : 대통령의 강력한 말이 실제 산재 예방에 효과가 있을까?

강태선 : 단기대책으로는 필요하다. 산업안전연구 분야에 '억제효과'라는 개념이 있다. 정부가 산재 문제에 경종을 울리고 그로 인해 사업주가 실제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 산재 예방 효과가 생긴다.

형법에도 '일반 예방 효과'라는 비슷한 개념이 있다. 처벌로 경종을 울리면 범죄를 억제할 수 있다는 건데, 실제 효과가 없다는 논문도 많다. 다만 산업안전 분야에서는 '억제 효과'나 '일반 예방 효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개인은 욱해서 혹은 작정하고 범죄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기업은 부와 자원을 갖고 있고 지속적으로 경영을 해나가야 하는 조직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른 경영책임자인 '대표이사 등'도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처벌에 따른 손해를 더 민감하게 살피지 않겠나.

프레시안 : 국무회의 때처럼 다시 한 번 단기대책이라는 말을 썼다.

강태선 : 장기적으로 '억제 효과'를 누리려면, 지속적이고 대대적인 홍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오바마 정부 산업안전보건청장(OSHA)을 지낸 데이비드 마이클스가 지난 2009년에 한국에 왔다. '미국 산안청에 근로감독관 수가 몇 명 안 되지만, 우리는 늘 커보이려는 노력을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언론과 친하게 지내면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적극적으로 알리고 인터뷰에 응하는 건 물론이고, 사람이 죽지는 않았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악성 사고'가 일어나도 적극적으로 보도자료를 뿌린다는 말이었다. 사고가 나지 않았어도 빈발하지만 심각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유해, 위험 요인에 대한 기획감독을 해서 위반 사항을 대대적으로 알린다고도 했다.

영국 수사당국은 중대해해 사건 기소 결과를 공개하고, 판결이 나오면 보도자료를 뿌린다. '거 봐라. 얘네가 잘못하지 않았냐' 적극적으로 알린다. 유럽 국가가 대체로 그렇다. 우리는 검찰에 송치하고 나면 '바이바이'다. 뒤도 안 돌아본다.

프레시안 : 한국도 모범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강태선 : 노동부가 '억제 효과'를 누리기 위한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영업정지를 예로 들면, 요청할 때 적극적으로 보도자료 뿌리고, 지자체가 거부하면 비판해 대중의 질타를 이끌어 내야 한다. 이런 일이 사법처리보다 효과가 클 수도 있다. 기업은 공개 자체를 무서워한다. 포스코이앤씨도 국무회의에서 언급하니 바로 그날 사과하지 않나.

산업안전에 대해 이재명처럼 일하려는 대통령이 또 언제 나오겠나. 그러면 이걸 기회로 노동부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은 시스템이 아니다. 강력한 단기대책과 회초리도 필요지만, 반드시 중장기 대책이 같이 가야 한다.

2014년 이후 한국사회에도 안전을 중시하는 흐름이 강해지긴 했다. 그러면서 각 부처 소관으로 항만, 공무원, 연구실 등과 관련한 안전법이 생겼다. 다만 선진국은 이렇게 안 한다. 산업안전법과 노동 소관 부처를 중심으로 체계를 짠다. 우리도 원심력이 아닌 구심력이 강한 산업안전 관리 체계를 노동부와 산안법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산재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탑 다운(top-down)' 규율로 산재 줄이려 하면 답 안 나온다"

프레시안 : 이재명 정부의 그간 산업안전 대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평가가 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범부처 협의체와 장기계획 수립 의무 법제화, '억제 효과' 강화를 위한 노동부 내 시스템 마련, 노동부와 산안법 중심의 구심력 있는 산업안전 체계 구축 등을 강조했다. 산재 감축을 위해 또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강태선 : 산업재해는 한 명의 천재가 나와서 어느 날 갑자기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수학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한다. 오늘부터 열심히 공부한다고 다음 달부터 갑자기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포스코이앤씨를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안전점검을 한다고 하고 작업을 재개했는데 '제 버릇 개 못 주고' 또 사고가 났다.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게 산업안전 문제다. 조직이 바뀌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전문성 강화가 중요하다. 크게 보면, 노동부는 정책 전문성과 연구 전문성을 갖춰야 하고, 근로감독관은 집행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프레시안 : 하나씩 살펴보자. 정책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강태선 : 노동부가 갖춰야 할 정책 전문성의 핵심은 민주적인 산업안전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정책을 개발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사업장은 복잡한 현대사회의 '첨단'이다. 어떤 나라든 생산이 일어나는 지점이 가장 위험할 거다. 다종다양한 물질과 장비가 쓰이고 운영 방식도 다양하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게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약자다.

지금처럼 정부가 '탑 다운(top-down)' 방식의 규율로 산재를 줄이려고 하면 답이 안 나온다. 법도 마찬가지다. 산업안전 분야에서는 명확성, 포괄위임 금지 같은 법 원칙이 '고전적'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사회에 안 어울린다. 다양한 사업장의 산업안전 문제를 법으로 센티미터까지 재서 규율할 수 없고, 그게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어떤 방식으로 민주적 거버넌스를 구축할 수 있나?

강태선 : 영국에는 '바텀 업(bottom-up)' 방식으로 규율을 만드는 제도가 정착돼 있다. 법에서는 굉장히 원칙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규정한다. 그리고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 산업별 특성을 반영한 구체적인 지침을 둔다. 여기까지는 한국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산업 안에서도 현장성이 더 필요한 경우가 있다. 건설을 예로 들면, 타설, 목공, 철공 등등 업종이 정말 많다. 그러면 전문업종을 규율하는 하위 시행령·규칙은 전문가와 노사가 참여한 인더스트리 워킹 그룹(industrial working group)이 만든다. 노동부가 그걸 보고 산업안전 확보 목적을 달성할 만하다고 판단하면 승인한다. 유해, 위험요인(hazard)별로 이런 절차를 거치기도 한다. 이의제기 절차도 있다.

프레시안 : 일종의 자율 규제 방식으로 보인다.

강태선 : 자율 규제라는 말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율적 주체에는 기업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전문가도 들어간다. 만들어진 규범을 바탕으로 정부의 감독행정도 이뤄진다. 단체협약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하지만 법적 효력을 갖는다.

이렇게 규범을 만들면 권위도 생긴다. 한국처럼 그냥 국가법령정보센터에 안전보건 규칙이 올라와 있는 것과는 효과가 다르다. 감독관이 '스스로 만들었는데 왜 안 지켜?' 하면 사업주도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면 규범을 더 열심히 들여다보고 지키게 된다. 내용도 자세하고 길어진다. 사업주들이 볼 때도 그 편이 지키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 이 방식의 원조가 독일이다. 독일은 업종별 산재보험 조합이 비슷한 방식으로 자율적인 업종별 안전보건 규정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위험성 평가, 감독을 한다. 제조업뿐 아니라 미용실 화학물질 관리 규정까지 만들어져 있다. 한국의 미용실 화학물질 문제는 완전히 사각지대다.

프레시안 : 그렇게 하면 다양한 현장 상황을 반영한 구체적인 규범이 만들어질 것 같다.

강태선 : 실제 내용을 보면 정말 놀랍다. 영국 위시(WISH) 포럼 홈페이지에 가면,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폐기물산업 안전지침이 있다. 폐기물 수거, 고속도로 청소 30여 개 분야에 대한 안전 지침이 그림을 곁들인 PDF 파일로 공개돼 있다. 긴 건 50페이지가 넘어간다. 이렇게 지켜도 되고, 저렇게 지켜도 된다고 선택지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걸 노동부 공무원이 어떻게 다 만들겠나.

폐기물 사업자는 위시 포럼에 가입하고 공개된 지침을 지키면 된다. 안전 관리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떠먹여 주는 거다. 그중에는 권고도 있고 강행규정도 있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지침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될 수 있다.

일본도 노동안전위생법 목적 조항에 '노동재해의 방지를 위한 자율적 활동의 촉진 조치를 마련한다'는 내용이 있다. 한국은 1981년에 이 법을 따라 산안법을 만들어놓고 그 뒤로 잘 살펴보지 않아서 이 내용이 없다.

실제 일본 건설업노동재해방지단체협의회는 '난간 선행공법' 등을 비롯해 비계업에 맞는 노동안전보건지침을 제정하고 협회사들이 이를 준수한다. 사고가 났을 때 이 협회에 가입도 안 하고 지침도 안 지킨 비계업자는 근로감독관도 안 좋게 보지 않겠나.

이런 나라들에서는 산재사고 사례 공유도 활발하다. 유럽의회 홈페이지만 봐도 화학사고 1239건이 공개돼 있다. 일본 시멘트 기업들도 1935년에 노동안전을 위한 협의체를 만들었는데, 여전히 모임을 열어 안전보건 정보를 교류하고 있다.

* 영국 위시포럼 폐기물산업 안전지침 바로가기(https://www.wishforum.org.uk/wish-guidance/)

* 유럽의회 화학사고 공개 바로가기(https://emars.jrc.ec.europa.eu/en/emars/accident/search)

▲ 영국 위시포럼의 <폐기물 관리 산업을 위한 보건 및 안전지침> 중 일부. 위시포럼 홈페이지 갈무리.

"생산적이고 누구에게나 이득이 되는 산업안전 정책, 분명히 있다"

프레시안 : 한국에는 업종별 안전 규정이나 지침이 없나?

강태선 : '코샤 가이드(kosha guide)'라고 산업안전보건공단이 만든 지침이 흉내를 내긴 한다. 그런데 거버넌스를 통해 만들지 않는다. 공단 직원이 만들거나 외주를 준다. 내용적으로도 부족하고, 권위 있는 지침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업종이나 유해, 위험요인별 분류도 충분하지 않다.

참 기가 막힌 사고인데, 아리셀 참사 재판에서 회사 대표가 리튬 1차 전지의 위험성을 몰랐다고 주장한다. 몰랐을 리가 있나. 일본 배터리 산업협회에는 배터리 안전지침이 있다. 이런 게 있으면 그렇게 주장하기 더 어려울 거다. 우리도 산업안전공단이 '탑 다운'식으로 만든 배터리 안전지침이 있긴 한데, 지난해 10월에야 만들었다. 만시지탄이다.

프레시안 : 한국에도 사업주가 스스로 유해, 위험 요인을 파악하고 평가하게 하는 제도가 있긴 하다. 노동자 참여도 명시돼 있다.

강태선 : 단위 사업장 노사만으로는 부족하다. 업종별, 직종별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한다. 사업주 입장에서 보면, 내 사업장 산업안전을 강화하는 데는 비용이 든다. 안 그러는 편이 경쟁에서 유리해진다. 대기업이 아니면 위험성 평가를 할 역량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산업안전 규범이 현장에서 작동하게 하려면, 업종, 직종별 규범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또 지금의 위험성 평가는 서류 중심으로 이뤄진다. 평가 방식이나 규범을 만드는 과정에 비춰볼 때 형식적인 절차가 되기 쉽다.

프레시안 : 산업안전 거버넌스 확보와 관련해 국내에 참조할 만한 사례가 있나?

강태선 : 맹아적인 형태는 있다. 화학안전정책포럼이다.

화학물질등록평가법, 화학물질관리법, 화학제품안전법을 묶어서 화학3법이라고 부른다. 가습기 참사와 구미 불산가스 누출 사고 등을 계기로 만들어진 법인데 상당히 강력하다. 1991년경부터 한국이 법적으로 관리하는 유독물질이 계속 300여 개 정도였는데, 2015년에 화학3법이 생기면서 늘어나기 시작해 지금은 1000개가 넘었다.

사업주 입장에서 보면 유해화학물질 취급 시설 기준을 지켜야 되는데, 여기에 수십억 원의 비용이 들 수 있다. 안전을 위해 필요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문제는 독성은 있지만 멀리 퍼졌을 때 지역 주민에게 피해가 안 갈 가능성이 높은 물질들이 있는데, 이와 관련한 설비까지 갖추게 한다거나 하는 내용이 있었다. 기업 편에서 보지 않더라도 불합리한 면이 있었다.

2019년 일본이 반도체 소재 무역규제를 시작하니, 국가적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소재, 부품, 장비 생산시설을 증설해야 하는데 화학3법 때문에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거다. 시민사회와 기업이 평행선을 그었으면 문제가 안 풀렸을 거다. 그런데 환경부가 경제단체, 노동단체는 물론이고, 정말 현장 문제를 제대로 아는 전문가, 시민사회 사이에 다리를 놓아 화학안전정책포럼을 만들었다.

먼저 전문가들이 3, 4개월 동안 화학3법상 유독물질 지정 범위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그걸 바탕으로 각 이해당사자 집단과 당국이 각각 회의를 한 뒤 전체회의를 했다. 전체회의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고, 내용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사전에 어떤 문제를 논의할지도 열심히 정리했다.

그 결과 심지어 시민사회도 기존의 유독물질 지정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게 됐다. 대신 시민사회도 요구한 게 있었다. 미확인 물질도 규제를 하자고 했다. 이걸 산업계가 받았다. 시민사회도 산업계도 찬성하니, 후속 입법 절차도 착착 이뤄졌다. 심지어 윤석열 정부 환경부 장관이 이 포럼 좋다고 계속하자고 했다. 이런 게 탈정치화의 좋은 사례다.

프레시안 : 산업안전 분야 전반에 비슷한 일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다.

강태선 : 산업안전 분야에는 생산적이고, 정말 정파적이지 않게 누구에게나 이득이 되는 일이 있다. 공론장을 잘 만들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려면 현장의 지식과 정책이 만나야 한다. 모든 이해당사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민주의 원칙이 중요하고, 과학의 원칙도 중요하다. 화학안전정책포럼에서도 전문가들의 보고서가 논의의 바탕이 됐다.

"독립적·전문적 산재 연구기관 만들고, 전문성 갖춘 근로감독관 양성해야"

프레시안 : 과학의 원칙을 위한 연구 전문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산업안전공단이 산업안전 분야에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현실은 어떤가?

강태선 : 산업안전공단이 처음 출범할 때는 그런 기능이 상당히 강했다. 1987년 산업안전공단이 처음 출범할 때 총원이 200~300명 정도이었는데, 3분의 1 정도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일했다.

지금 산업안전공단은 2000여 명이 일하고 1년 예산도 1조 2000억 원이 넘는 조직이다. 그런데 연구원에서는 150여 명이 일한다. 그중에서도 현장과 연계해 축적된 지식을 갖고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는 인력은 50명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 100여 명은 순환보직이다. 늘어나는 연구수요에는 외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정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근거가 통계인데, 지금 로데이터(law data)는 많다. 그런데 이걸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산업안전공단 안에서 사업장을 지원하는 재정사업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그렇게 됐다. 물론 그 일도 중요한데 연구기능도 강화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지금 상황은 차를 운전하는데 네비게이션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산업안전 정책도 여기 찌르고 저기 찌르고 다니는 식으로 수립된다.

프레시안 : 산업안전 연구 기능을 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태선 : 민주적 결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기관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가장 좋은 구조는 산업안전연구원을 독립시키는 것이다. 정 안 되면 연구원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 지금 연구원장은 산업안전공단 이사 직책도 안 달고 있다. 권한이 크지 않다.

프레시안 : 산업안전연구원의 독립성과 전문성 강화를 강조했다. 남은 과제인 집행 전문성은 어떻게 강화할 수 있나?

강태선 : 근로감독관이 어느 정도 기술적 전문성을 갖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행정조직 개편이 필요하다.

과거에 나는 미국이나 영국을 모델로 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주장했는데, 사실 대한민국에서 외청이 워낙 열악하다. 실현가능성으로 보면, 산업안전 2차관제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산업안전 범부처 협의체에서 원심력이 아닌 구심력을 강화하기에도 그편이 나을 것 같다. 청장이 들어가는 거랑 차관이 들어가는 건 공무원들 반응이 다를 거다.

또 노동부 직렬 분리가 필요하다. 산업안전감독관 직렬을 따로 두거나, 근로감독관만이라도 별도 직렬로 뽑아야 한다. 일본 사례를 참조할 수도 있다. 일본은 근로감독관 직렬을 따로 두고, 다시 문과와 이과를 구분해 뽑는다.

한국도 80년대에 8~9년 정도 노동부 직렬을 따로 뽑았다. 나름 동기부여 된 사람들이 들어왔고, 그중에 실력 있다고 정평이 난 사람도 꽤 있다. 사람이 소싯적 생각이 잘 안 바뀐다. 20대 때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노동법과 역사를 공부한 사람을 근로감독관으로 뽑아야 한다.

프레시안 : 정부도 근로감독관을 늘린다는 정도의 계획은 갖고 있는 것 같다.

강태선 : 동기부여가 된 사람을 뽑기 위한 직렬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고, 동기부여를 하기 위한 교육 체제도 정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일반행적직으로 1000명씩 뽑아서 근로감독관을 시키면 인사에 대단히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근로감독관 일이 일선 민원 업무라 거칠다. 다 도망갈 수도 있다. 나도 마음 먹고 들어갔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안처럼 임기제 공무원을 뽑는 것도 일정 부분 타당하다고 본다. 근로감독관을 하다 기업으로 가는 사람이 나오는 게, 민간과 정부 간 안전보건 교류라는 차원에서 볼 때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노동부에서 근로감독관으로 일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그때 경험이 산업안전 행정조직을 연구하는 데 큰 자산이 됐다.

▲ 회의 중인 근로감독관. ⓒ연합뉴스

"김영훈 장관에게는 노동자를 위한 노동부 만들 사명 있다"

프레시안 : 정부가 경찰 안에 중대재해 수사팀을 만든다고 하니 비판했었다. 역시 전문성 문제인가.

강태선 : 그렇다. 김영훈 장관이 요새 늘 '산재 문제에서 노동자의 불완전한 행동은 원인이 아니고 결과'라고 말한다. 경찰은 대개 그걸 뒤집어서 본다. 형사법에 특화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 산재사고를 수사할 때도 직접 인과관계만 보기 쉽다.

또 산업안전보건 관리 체계라는 건 회사 조직을 상정하고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경찰은 기업을 수사한 경험이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나는 중대시민재해도 노동부가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지금까지 말한 일들을 구체화하려면, 대통령의 의지는 물론이고 고용노동부 수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김 장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강태선 : 산업안전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고용노동부가 구심력을 가져야 한다. 기획재정부에 복무하거나 눈치만 보고 있으면 안 된다. 이 문제가 정말 만만하지 않고,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직을 걸겠다'고까지 했으니, 일단 안전보건 문제에 대해 정말 깊이 고민해 주길 바란다.

노동자 출신이라 기대하는 점도 있다. 노동부의 자기규정이 경제부처에서 사회부처로 바뀌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고용노동부에서 '고용'자도 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전보건 문제를 중심으로 노동부를 정말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사회부처로 만들어야 하는 중요한 사명이 김 장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김 장관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갈 때 같은 마음으로 노동부에 오게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게 장관 바뀌었다고 되는 일은 아닐 것 같다. 강조한 대로 산업안전 문제에 국가 대응 시스템을 바꾸고, 연구기능과 일선 근로감독관의 실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긴 시간 감사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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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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