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에 개최될 것으로 보이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동맹의 현대화'를 앞세워 한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8월 9일자 <워싱턴포스트>가 입수해 보도한 트럼프 행정부의 내부 문건과 최근 주한미군 사령관의 기자회견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무역 불균형 해소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안보상의 목적에 부응하는 '전략적 도구'로도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 관세 협상을 무기화해 외교안보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 우선주의'를 관철하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무역 업무를 담당해온 전현직 관료들이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토로할 정도로 이례적이고 변칙적인 것이다.
한국도 정조준하고 있다. 문건에는 한국이 중국을 억제하기 위한 미군 배치에 공개적으로 지지해줄 것과 한국의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3.8%로 인상하고 주한미군 주둔 경비도 대폭 인상해줄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다만 3.8% 인상의 목표 시한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이 무역 협상을 무기화해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함으로써 한국의 근심도 커질 공산이 커졌다. 일단락되었다는 관세 협상을 문서화하는 수순이 남아 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이 상기한 안보상의 요구 목록도 내놓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왜 '공개적인 정치 성명'을 원할까?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이다. 문건에는 "대북 억제를 유지하면서도 대중국 억제를 개선하기 위해 한국이 주한미군 전력 태세의 전략적 유연성을 지지하는 정치 성명을 발표해줄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와 관련해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의 발언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8월 8일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동북아 지역은 과거와 매우 다르다. 북쪽에는 핵으로 무장한 적이 있고, 러시아가 점점 북한에 개입·관여하고 있고, 중국 역시 인도·태평양 지역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만에 어떤 상황이 발생해서 미군이 개입할 때 한국도 가야 한다고 단정 짓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동맹을 현대화하며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한미동맹의 '공동의 적'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및 러시아도 상정해서 동맹을 현대화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또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투입은 기정사실로 하면서 한국군이 어떻게 관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후속 논의가 필요하다는 취지를 품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최근 일본·호주·필리핀 등을 상대로 대만 문제를 놓고 미중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어떻게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재배치 논의도 탄력이 붙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안팎에선 주한미군을 감축해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전에는 난색을 표했던 주한미군 사령관도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내비친 것이다. 브런슨이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역량"이라며 "주한미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에서도 이러한 기류를 읽을 수 있다.
주목할 점은 미국이 "대중국 억제"나 "대만 유사시"를 직접 거론하면서 한국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지지한다는 '공개적인 정치 성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미국의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면 한중관계도 큰 시련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노리는 게 바로 이 대목이 아닐까 한다. 이재명 정부는 한미동맹을 우선시하면서도 한중관계 개선도 도모하고 있는데, 이를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협의의 기준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19년 전 성명으로
미국이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을 강하게 의제화 함으로써 한미간의 협의는 불가피해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협의 기준을 잘 잡는 게 매우 중요하다. 동북아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수용을 전제로 하면서 그 표현 수위를 조절하는 데에 방점을 찍으면 자충수가 되고 만다. 미국의 노림수는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 합의 후에 미중 충돌시 한국군의 역할 요구로 확대될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여 이재명 정부는 협의의 기준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19년 전 성명으로 삼아야 한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영역을 인도·태평양으로 확대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국내 일각에서도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는 조항을 들어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약의 정확한 내용은 "태평양 지역에 있는 각 당사국의 영토에 대한 무력공격(an armed attack in the Pacific area on either of the Parties in territories)"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미국의 요구는 상호방위조약 위반에 해당한다. 대만 해협은 물론이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모두 미국의 영토(영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2006년 1월 한미 정부가 발표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성명도 복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 성명에선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변화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와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입장이 병렬적으로 서술됐다.
그런데 대만 사태 등 동북아 유사시에 주한미군을 투입할 수 있는 미국의 입장은 당시 합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했는데, 주한미군이 미중 간의 무력 분쟁에 동원되면 한국이 원하지 않는 분쟁에 연루될 위험도 매우 커지기 때문이다.
물론 법과 규범과 합의를 무시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방위조약 및 19년 전 합의를 존중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또 구두상으로 타결된 관세 협상을 문서화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을 토론거리로 만들어 협의를 장기화할 필요는 있다.
아울러 '미국발 의제'에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증진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도 필요하다. '군비증강에 의한 적대적 현상유지'를 '군비통제를 통한 평화적 현상유지'로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이를 미국과 중국 등을 상대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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