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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프트, 18세기 영국을 뒤흔든 '불온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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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프트, 18세기 영국을 뒤흔든 '불온한' 여인

[김성수의 영국이야기] 200년 앞서간 "페미니즘의 어머니"

17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듣는 독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으로 18세기 영국 신사들의 혈압을 200까지 올린 그 여성이다. 오늘날로 치면 유튜브에서 "남자들이 화내는 영상 모음집"에 단골로 등장했을 인물이랄까. 아니, 애초에 유튜브가 있었다면 그녀 채널은 첫날부터 신고폭탄을 맞았을 것이다.

불우한 어린시절이 만든 반골 기질

울스턴크래프트의 반골 기질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가정폭력까지 일삼는 전형적인 18세기 가부장이었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말리다가 본인도 얻어맞기 일쑤였으니, 어린 메리로서는 "아, 이 가부장제라는 게 정말 개판이구나"를 몸소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말로 하면 "폭력적 남성 권위주의"의 피해자였던 셈이다.

17살에 집을 나온 그녀는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 가정교사, 학교 교사, 번역가까지. 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없던 시절이니,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오히려 그녀에게 "여성의 경제적 독립"의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남편 찾아서 의존하며 살라고? 그럼 남편이 술주정뱅이면 어쩌라고?"라는 현실적 고민이었다.

가부장제에 던진 첫 번째 돌멩이

1792년,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를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영국사회는 여성을 "집안의 천사"라며 치켜세우면서도 정작 교육이나 정치 참여는 "여성의 뇌는 남성보다 작으니까"라는 식으로 차단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여성이 나타나 "여성도 이성을 가진 존재다!"라고 외쳤으니, 영국의 보수 신사들로서는 "이게 무슨 소리야!"라며 찻잔을 떨어뜨릴 만했다.

더 가관인 건 당시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이중적 태도였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루소는 '에밀'에서 여성 교육에 대해 "남자를 즐겁게 해주고 아이를 잘 키우는 법만 가르치면 된다"고 했다. 이에 울스턴크래프트는 "계몽주의가 뭐 별건가? 남성에게만 적용되는 계몽주의네"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21세기 기준으로 봐도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녀는 당대 교육제도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여성에게는 자수와 피아노만 가르치고, 남성에게는 라틴어와 수학을 가르친다고? 이게 말이 되나?"라며 교육의 성차별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심지어 "여성이 바보 같아 보이는 건 바보로 기르기 때문"이라는 충격적 진단까지 내놓았다. 요즘 말로 하면 "교육 불평등 고발 유튜버"였던 셈이다.

런던 지식인 사회의 이단아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시 런던의 급진적 지식인 모임에서 활동했다. 출판업자 조셉 존슨의 서점에서 열리는 모임에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화가 헨리 퓨젤리, 정치사상가 윌리엄 고드윈 같은 인물들이 모였다. 그런데 여기서도 울스턴크래프트는 유독 튀는 존재였다. 다른 남성들이 "자유와 평등"을 논할 때, 그녀만 "그럼 여성은 언제 자유로워지나요?"라고 물었으니까.

특히 화가 헨리 퓨젤리와의 관계는 당시 사회를 경악시켰다. 기혼자인 퓨젤리에게 일방적으로 빠진 그녀는 심지어 그의 아내에게 "우리 셋이 함께 살아요"라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21세기에도 파격적일 이런 제안을 18세기에 했으니, 그녀가 얼마나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생활까지 '불온했던' 18세기 신여성

울스턴크래프트의 파격은 글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영국사회가 요구하던 '순종적이고 조신한 여성'과는 정반대로 살았으니까. 1792년 프랑스로 떠나 프랑스 혁명을 직접 목격했고, 거기서 만난 미국인 사업가와 동거해 딸까지 낳았다. 미혼모가 되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기혼 남성이었던 윌리엄 고드윈과도 동거했다. 21세기 기준으로도 자유롭다 할 텐데, 18세기 영국에서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영국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녀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이라며 손가락질했다. 보수 언론들은 "저런 여자가 쓴 책을 읽으면 여성들이 다 타락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내 사생활이 내 주장의 진실성을 흔드나? 남성들도 바람피우고 사생아 낳는 건 예술이라 치켜세우면서, 여성이 그러면 도덕적 타락이라고?" 하는 식으로 되받아쳤으니까.

실제로 당시 남성 작가나 철학자들의 사생활을 보면 울스턴크래프트보다 훨씬 복잡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 "천재적 예술가의 자유분방한 삶"으로 포장됐고, 여성의 경우 "도덕적 타락"으로 낙인찍혔다. 이런 이중잣대를 그녀는 몸소 경험하며 성차별의 뿌리 깊음을 깨달았다.

200년 앞서간 최전선 투사

울스턴크래프트는 단순히 여성의 권리만 주장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당시 사회구조 전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왜 여성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나? 왜 이혼할 권리가 없나? 왜 자녀 양육권은 아버지에게만 있나? 왜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없나?"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영국사회의 근본을 흔들었다.

특히 그녀는 "여성이 현명하지 못한 건 교육을 받지 못해서"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뇌가 작아서 논리적 사고를 못한다고? 그럼 교육을 제대로 시켜보고 말하라"는 식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주장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여성의 열등함"을 당연한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니까.

그녀는 또한 결혼 제도의 문제점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랑 없는 결혼은 합법적 매춘이다"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당시 결혼 제도를 공격했다. 경제적 이유로 강요되는 결혼, 여성을 재산처럼 취급하는 관습, 남편의 일방적 권위 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연애결혼"의 개념도 그녀가 미리 제시한 셈이다.

프랑스 혁명 현장에서 본 이상과 현실

1792년 프랑스로 건너간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스 혁명의 격동을 직접 목격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혁명가들을 보며 처음에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곧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가들이 말하는 "평등"에도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절 그녀는 파리에서 직접 단두대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혁명의 폭력성을 생생히 체험했다. 이런 경험은 그녀의 사상을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혁명도 좋지만, 진짜 변화는 교육과 의식 개선에서 나온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너무 앞서간 시대의 예언자

아이러니하게도 울스턴크래프트는 생전에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1797년 둘째 딸 메리(훗날의 메리 셸리)를 낳다가 산후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겨우 38살이었다. 그녀가 출산 중 사망한 후 남편 윌리엄 고드윈이 선의로 그녀의 전기를 출간했는데, 여기서 그녀의 자유로운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오히려 평판이 더 나빠졌다. "역시 그런 주장을 하는 여자답네"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19세기 내내 그녀의 이름은 "불온한 여성"의 대명사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책은 금서나 다름없었다. "젊은 여성들이 읽으면 안 될 위험한 책"으로 분류됐다. 심지어 초기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조차 그녀와 연결되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녀를 기억했다. 19세기 후반 참정권 운동가들은 그녀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고, 20세기 여성해방 운동가들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1960년대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면서 그녀는 비로소 "페미니즘의 어머니"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딸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써서 어머니 못지않은 파격을 보여줬으니, 유전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했다. 메리 셸리 역시 17살에 기혼 남성 퍼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달아나고, 세계 최초의 과학 소설을 쓰는 등 어머니의 반골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퍼시 셸리는 당시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이었고, 메리의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을 만나러 왔다가 16세의 메리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퍼시는 21세였고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한 명 있었고 또 한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오늘날 영국 사회에 남긴 발자국

현재 영국을 보면 울스턴크래프트의 꿈이 상당 부분 실현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여성 총리가 나오고(비록 리즈 트러스는 49일 만에 망했지만), 여성들이 대학에서 남성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직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한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도 당연한 일이 됐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적어도 "여성의 뇌가 작다"는 소리는 더 이상 공개석상에서 하지 못한다.

2020년 런던에는 드디어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무려 200년이 넘게 걸렸다. 동상 제막식에서 한 시민은 "이제야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 동상이 생겼다"며 기뻐했다. 그동안 런던 거리 곳곳에는 온갖 남성 위인들의 동상만 즐비했으니까.

영국 교육 과정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18~19세기 영국사를 배울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됐다. 물론 아직도 "급진적 페미니스트"라는 딱지는 따라다니지만, 적어도 "불온한 여성"에서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 평가가 바뀌었다.

영원한 반골, 영원한 질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18세기 영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었던 그녀는 결국 가장 필요한 여성이었다. 그녀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여성도 사람이다" 라는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비록 그 길이 200년이나 걸렸지만 말이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정한 평등이란 무엇인가?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제 올 것인가?"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질문들이다.

▲메리 울르턴크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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