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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오염' 필리핀 시민들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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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오염' 필리핀 시민들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인터뷰] 다국적 기업의 포장재 쓰레기장된 필리핀, 활동가 마리안 레데스마 "지금 당장 행동을"

필리핀 탈플라스틱 활동가 마리안 레데스마(Marian Ledesma)는 지난 8~15일 일주일 동안 "더는 지체할 시간도, 물러설 곳도 없다"고 호소하며 스위스 제네바 곳곳을 돌아다녔다. 40년 넘게 플라스틱 쓰레기에 몸살을 앓아 온 필리핀과 그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필리핀 시민들을 생각하면, 플라스틱 생산을 줄여나가는 국제 협약을 하루라도 늦춰선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주요 플라스틱 생산국들은 호소를 외면했다. 지난 8~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선 UN 환경총회에 따라 180여 개국이 참여해 국제 플라스틱 협약의 세부 내용을 정하는 논의가 열렸다. 일부 나라의 방해와 해태로 '플라스틱 생산량을 감축하고 유해 플라스틱 생산은 금지'하는 안이 이번에도 통과되지 못했고, 회의는 지난 15일 끝났다.

마리안은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묶고 있다. 실효성있는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성사하기 위해 다음 회의까지 또 달려 볼 예정이다. 지난 12일 <프레시안>과 서면 인터뷰한 그는 "우린 가만히 앉아 기다릴 여유가 없다"며 "각국은 자국에서 할 수 있는 플라스틱 감축 정책에 지금 당장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네슬레, 유니레버, 코카콜라 '플라스틱 악당'

필리핀은 바다로 배출되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다. 2019년엔 전 세계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36.38%(76만 톤)를 차지하며 1위 국가로 보고됐다. 바다로 쓰레기가 유입되는 상위 10개 강 중 7개 강도 필리핀에 있다. 수도 마닐라를 지나는 파시그강은 전 세계 바다 플라스틱 오염의 6.43%를 차지한다.

쓰레기의 상당량이 포장재다. 2023년 세계은행은 식품 포장재에 자주 사용되는 폴리스타이렌 조각이 필리핀 전체 플라스틱 쓰레기의 21.21%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일회용 비닐봉지는 14.81%, 손잡이가 없는 얇은 비닐봉지는 14.75%를 차지했다. 세 가지 품목이 전체 쓰레기의 절반을 넘었다. 개수로 보면, 필리핀은 하루에 1억6300만개(2019년 기준) 플라스틱 봉지를 쓴다고 추정된다. 무게는 매년 230만 톤에 달한다.

Nescafe(커피·네슬레), Milo(음료·네슬레), Coca-cola(음료·코카콜라), Dove(비누·유니레버), Cream Silk(린스·유니레버), Joy(세제·P&G), Ariel(세제·P&G), Maggi(라면·네슬레) …

가장 흔히 발견되는 포장재의 제품명이다. 남반구의 탈플라스틱 활동가들이 '플라스틱 오염은 다국적 기업 탐욕의 결과'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들 다국적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남반구의 저소득층 시민들을 겨냥해 소량 포장된 제품을 대량 판매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저소득 국가 내에 적절한 폐기물 시설이 부족하고, 소비자들도 마땅한 처리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며, 플라스틱의 유해성도 알면서 대량 생산, 판매를 이어갔다고 지적한다.

▲마리안 레데스마(Marian Ledesma) 활동가. '사셰'를 들고 있다. ⓒ그린피스
▲작은 플라스틱 포장재 사셰(sachet) 자료사진. ⓒ위키미디어커먼즈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리필 시스템' 시범 사업

필리핀에선 이런 작은 플라스틱 포장재를 '사셰(sachet)'라고 부른다. 샴푸, 비누, 세탁 세제, 주스 등을 소분해 작은 플라스틱 포장재에 담아 판매하는 시스템을 이르기도 한다. 동네마다 있는 필리핀 특유의 소규모 잡화점 '사리사리(sari-sari) 상점'이 주요 거래처다.

원래는 '팅이(Tingi)'라 불리는 문화가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생활 구조에서, 대량 구매가 아닌 필요한 만큼만 소분해 구매하는 관습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다국적 기업의 마케팅이 필리핀에 뿌리를 내렸다. 저소득층이 제품을 쉽게 구매하도록 작은 플라스틱 봉투(사셰)에 담아 제품을 소량 판매하는 전략이었다. 집에 있던 재사용 용기에 물건을 담아가던 '팅이'가 플라스틱 쓰레기의 '사셰 경제'로 변질됐다는 게 필리핀 환경단체의 평가다.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시작하자." 마리안과 그가 속한 그린피스 필리핀은 '사셰'를 바꿔내기 위해 지난해 일부 지역에서 재사용 체제 구축 운동에도 나섰다. "케손시티(Quezon City), 산후안(San Juan) 등에서 지방 정부와 협력해,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저렴하고 간단한 재사용(리필) 구매 시스템을 마을에 안착"시키는 시도였다. 가령, 사리사리 상점에 대량의 샴푸액을 갖춰놓고 소비자들은 각자 용기를 가져와 소분한 양만큼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쓰레기 감축 효과는 성공적이었다. 시범 사업 후 6~8주 동안 4만 7000개 이상의 사셰를 줄였다. 참여한 상점들의 수익은 약 15% 증가했고 소비자들도 사셰를 썼을 때보다 평균 절반 가까이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했다. 국가 주도의 정책이 아니었기에, 소규모 소매업자와 소비자만 참여해 다국적 기업 참여를 의무화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의 강력한 주도 없인 이 시스템을 확대하거나 실효성있는 규제 법안을 입안하기도 어려웠다.

마리안이 중앙 정부의 강력하고 전면적인 플라스틱 감축 정책을 주장하는 이유다. 마리안은 "국가 정책의 틀과 집행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며 "일회용 플라스틱에 대한 금지가 필요하며, 플라스틱으로부터의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재사용 및 리필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플라스틱 포장재 사셰(sachet)가 필리핀 바다 속에 떠다니는 모습. ⓒ그린피스
▲필리핀 마닐라 일부 지역이 지난 7월 태풍 '위파'에 따른 폭우로 침수된 모습. ⓒ그린피스

온실가스 내뿜는 플라스틱 생산

마리안은 "플라스틱 오염은 공동체의 식량, 물, 심지어 생계의 원천인 우리 생태계를 위협한다"며 "어부들과 해안 공동체는 해양 플라스틱 오염으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고, 미세 플라스틱은 필리핀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공기, 물, 토양 등으로 옮겨져 우리의 건강과 식량 시스템을 위협한다"고 밝혔다.

세계은행은 필리핀의 플라스틱 쓰레기 중 28%만 재활용된다고 2021년 보고했다. 나머지 72%는 필리핀에 매립되거나, 투기되거나, 태워지거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마리안은 "플라스틱에 함유된 독성 화학 물질 역시 사람들에게 위협이 된다"며 "유해 물질 중 상당수가 암, 당뇨병과 같은 건강 상태와 관련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필리핀엔 매년 8~9개 태풍이 상륙한다. 폭우가 내릴 땐, 마을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가 노후화된 수로를 막으면서 대형 홍수를 유발한다. 이 때문에 필리핀은 지난해에도 태풍 '개미'와 '야기'로 심각한 침수 피해를 봤다. 지난 7월에도 마닐라(수도권) 일부 지역이 침수돼 600톤이 넘는 쓰레기가 도시로 함께 유입됐다.

마리안은 "플라스틱 생산은 기후위기에도 반한다"고 강조했다. 플라스틱의 생산과 소비 전 주기 동안 발생하는 온실가스 중, 플라스틱을 만드는 데 필요한 화석연료를 추출하고 이를 플라스틱으로 변환하는 생산 단계에서 90%가량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2019년엔 전 세계 1차 플라스틱 생산에서 약 2.24기가톤(GtCO₂e·이산화탄소 환산량)의 온실가스가 발생했다고 분석됐다.

▲불법 선적돼 민다나오(Mindanao)에 버려진 한국 쓰레기 더미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린피스

한국 '쓰레기 식민 제국'이 될 건가

마리안은 나아가 "필리핀이 처한 플라스틱 오염은 국내적인 이유뿐 아니라, 북반구 부유국(Global North)들이 우리 땅에 투기한 쓰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한국도 필리핀에 불법으로 쓰레기를 폐기해 온 가해 국가 중 하나다. 재활용이 가능한 폐플라스틱을 수출해야 함에도, 기저귀, 의료폐기물, 전자폐기물 등 재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를 대거 수출해 온 사실이 2019년 적발되며 '쓰레기 수출국'이란 오명을 샀다.

마리안은 "혼합 생활 쓰레기나 잘못 신고된 쓰레기가 필리핀에 도착하면, 매립지로 가거나, 혹은 그저 버리거나 태우는 불법 시설로 간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북반구는 '플라스틱 중독'의 비용을 남반구(Global South)에 전가한다"며 "이런 쓰레기 식민주의는 매우 부당하다"라고 지적했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위한 3차 회의(정부 간 협상위원회(INC)-5.3)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지난 15일 끝난 2차 회의에서도 플라스틱 생산 감축 의무화를 거부하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알려졌다.

마리안은 "플라스틱 오염 위기를 해결할 일생일대의 기회인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위한 캠페인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리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오염을 유발하는 기업에 책임을 묻고, 플라스틱 생산 감축이란 확고한 국제 사회 입장에 부합하는 법을 제정하며, 일회용 플라스틱을 단계적으로 퇴출하고, 재활용 및 리필 시스템을 확대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플라스틱 오염에 맞서 싸우고 필리핀 시민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이보다 못 한 모든 노력은 미래를 플라스틱에 내맡기는 것일 뿐입니다. 국가적 차원의 행동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고, 또 시작해야만 합니다. 한국 정부도 지금 당장 나서주세요."

▲그린피스 필리핀 활동가 등이 "지금 당장 플라스틱을 끝내라(END PLASTIC NOW)"라는 메시지가 담긴 대형 현수막을 펼쳤다.ⓒ그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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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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