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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살 아들은 석상을 돌며 '푸틴의 죽음'을 소원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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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살 아들은 석상을 돌며 '푸틴의 죽음'을 소원으로 빌었다

[프레시안 books] 우크라이나 소설가의 전쟁일기 <여성과 전쟁>

"블라디미르 푸틴이 죽는 게 아들 소원이에요."

2022년 2월 22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이틀 전, 우크라이나 소설가 빅토리아 아멜리나는 열 살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 룩소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여행 가이드가 그곳의 거대한 풍뎅이 석상 주위를 일곱 바퀴 돌면서 소원을 빌어보라고 하자 이집트의 더운 날씨에 지쳐있던 아들은 갑자기 어느 누구보다 빨리 석상을 돌았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침공해 강제 병합한 이래로 전쟁 위협과 국지적인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우크라이나의 열 살 어린이 소원은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의 죽음이었다. 이 말은 들은 가이드와 주위 관광객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여성과 전쟁 : 우크라이나 소설가의 전쟁일기> (빅토리아 아멜리나 지음, 이수민 옮김, 파초 펴냄)에 실린 이야기다. 아들과 떠나온 정말 오랜만의 휴가는 이틀 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엉망이 됐다.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비행기편은 모두 취소가 됐고, 이집트 공항에 발이 묶였다. 어렵사리 구한 폴란드행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돌아온 아멜리나와 아들은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멜리나는 아들만 안전한 폴란드에 남기고 우크라이나로 돌아왔고, 소설 쓰기를 접고 전쟁범죄 조사원을 자원해 총성이 난무하는 현실로 뛰어들었다. "피해자와 영웅뿐 아니라 살인자도 이름을 갖게 하기 위해서", "민간인을 상대로 잔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살인자들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가 기록한 전쟁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작가가 기록한 전쟁일기에는 전황을 보도하는 뉴스에는 실리지 않는 민간인을 향한 공격과 폭력, 고문과 협박, 아동 납치와 집단학살의 참상이 담겨 있다. 하지만 작가는 고문과 학살을 일삼는 악인들의 서사를 중심에 놓지 않았다. 그가 위험천만한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것은 평범하지만 동시에 영웅적인 전쟁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저명한 인권변호사였지만 군에 자원입대해 드론 조종사가 된 예우헤니아 자크레우스카, 2014년 크림반도 침공 당시 러시아군에 납치되어 고문당했지만 2022년 예순의 나이로 또 의무부대에 입대한 이리나 도우한, 십년간 전쟁범죄를 조사했지만 그보다 시급한 지뢰 제거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카사노바, 문학관의 아카이브를 피난시키기 위해 난민 열차의 화물칸에서 야간 보초를 서는 테탸나 필립추크,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강제 이송과 러시아 가정으로의 입양을 장려하는 러시아 관영 언론의 프로파간다를 추적하는 변호사 카테리아 라셰우스카. 아멜리나는 악인들의 서사보다 빛나는 이들의 인간성을 보여주면서 결국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를 물어보고 있다.

"이 책에서 내가 우선적으로 탐구하려는 대상은 가해자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정의에 관해서 던지는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이다.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결국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가해자들이 법망을 피해가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바꿀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아멜리나는 2023년 6월 러시아의 폭탄 공격으로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동료 우크라이나 작가들의 도움으로 미완성된 원고를 정리해 책으로 출간될 수 있었다.

"빅토리아는 이 책의 목적이 '진실을 드러내고, 기억이 살아남도록 보장하며, 정의와 지속적인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진실성 있는 증언이 정의 구현을 앞당길 것이며, 세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저지르는 러시아의 범죄와 제노사이드의 악순환을 끊을 것이라고 믿었다. 러시아는 빅토리아를 우리에게서,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세계의 문화로부터 앗아갔지만, 그녀의 글이 지닌 힘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녀가 이미 글에서 썼듯이 '작가의 글이 읽힌다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이 말을 증명하듯 이 책은 2025년 오웰상과 2024년 볼테르상 특별상을 받았다.

▲<여성과 전쟁>, 빅토리아 아멜리나 지음, 이수민 옮김, 파초 펴냄. ⓒ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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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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