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7월 7일(양력 8월 29일) 남원시 화정동 저존재(著存齋)에서 임진왜란 운암대첩 주인공 충장공 양대박 장군의 영정 봉안식이 열렸다.
영정은 정조 20년(1796) 병조판서로 추증된 점을 고려해 담홍색 관복 차림이다. 순국한지 433년 만에 영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양대박 장군은 짙은 눈썹에 문무를 겸비한 선비의 모습이다. 인물화의 대가 김병건 화백이 남원 양씨 충장공파 20여 명의 인물사진을 바탕으로 영정을 그렸다.
영정 봉안식을 주도한 남원 양씨 충장공파 양해석 회장 등 양씨 종중 회원들은 대체로 짙은 눈썹에 잘 생겼다. 영정 봉안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양대박 장군의 충절을 기리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국가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자고 입을 모았다.
양대박 장군은 중종 38년(1543) 남원 주생면 이언방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진(士眞)이고, 호는 송악(松岳) · 청계도인(靑溪道人)이다.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지만, 마을 사람들과 교류할 때에는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를 좋아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자 직접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모집했다. “이 왜적들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격문을 짓고 의병을 모집했다.
담양에서 고경명 장군과 합류한 뒤, 그를 맹주로 추대해서 대장의 역할을 맡도록 했다. 양대박 장군은 6월 8일 부대를 출발시켜 전주로 이동하면서 의병을 계속 모집했는데, 그 수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둘째 아들 양형우의 『종군일기』 6월 24일 조를 보면 “부친이 더 모집한 의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임실의 갈담역에 전진하여 머물고 있었다.” 25일에는 “새벽에 밥을 먹고 율치(栗峙 밤실골)를 넘으려는데 운암의 장곡(長谷)에 왜적의 유격병 1만여 명이 깔려 있었다. 이에 부친이 의병군을 두 부대로 나누고, 형우로 하여금 한 부대를 거느리게 하고, 좌우에서 협공해 크게 격파했다. 부친이 손수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50급(級)이고, 의병들이 쳐 죽인 것이 천여 명이었다. 왜적을 짓이겨 무찔러 물리치니 흐르는 냇물도 붉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적의 포로가 된 남녀 수백 명을 구했다. 마침내 운암을 정벌하고 작은 고개 위에 있는 큰 정자 옆의 나무에 다음과 같은 글을 하얗게 새겼다. 「임진년 6월 25일 의병장 양대박 이곳에서 왜군을 무찌르다.」”라고 기록했다.
양대박 장군은 26일 염암(塩巖)을 거쳐 전주 북정(北亭)까지 진군했다. 27일에는 전라도사 최철견이 소고기와 술로 의병들을 먹이며 운암에서의 승리를 칭찬했다.
28일 해질 무렵 양대박 장군이 갑자기 이상한 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자 고경명 장군에게 진군을 다그칠 수 없다는 연유를 서면으로 보고했다. 7월 2일 둘째 아들 형우가 의원의 진찰을 받게 했다. 의원은 “근심과 노고가 마음을 상하게 하고 바람과 이슬이 몸을 침범하여 쌓인 것이 극에 달해서 도졌으니 필시 치료하기 어렵습니다.”라며 양대박 장군의 건강을 걱정했다.
이날 기록에 의하면 장군은 4천여 명의 의병 및 병기와 군량 등을 모집하고 조달했다. 5일 밤중에 오룡마가 갑자기 슬피 울더니 휘청거리며 먹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양대박 장군은 “오룡마가 나보다 먼저 죽었으니 하늘이 나를 보살피지 않으심이로다. 비록 그러하더라도 죽어서 여귀(厲鬼)가 돼 기필코 왜적 놈들을 죽일 것이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7일 양대박 장군이 서거했다. 이날 해 아래에 2개의 긴 무지개가 비스듬히 뻗쳐 장군의 명복을 비는 듯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호남 수성의 영웅인 양대박 장군의 행적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장군이 순국한 지 204년 후 1796년 8월 9일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대왕은 고경명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 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즉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사람이 창의(倡義)한 것이 증 영의정 고경명보다도 앞섰고, 용단(勇斷)은 충무공 이순신보다도 나았으며, 살신(殺身)의 높은 충절은 두 사람과 똑같았다고 본다. 한 차례 유집(遺集)을 열람해보니, 그의 빼어남이 드러나 마치 그가 말에 올라 적을 토벌하고 말에서 내려와 격문(檄文)을 초(草)하는 것을 보는 듯하였다.”라고 했다.
양대박 장군은 전공과 절의를 인정받아 정조 20년(1796) 8월에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 判中樞府事 兼兵曹判書)로 증직됐다. 정조대왕은 같은 해 10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양대박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저존재(著存齋)의 이름은 『소학』 명륜 편 “저존(著存)을 불망호심(不忘乎心)이거니 미안득불경호(未安得不敬乎)리오.”에서 따온 것이다. 즉 “(신이) 나타나고 존재하는 것을 마음에 잊지 않으니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양대박 장군의 충절에 맞는 이름 같아서 늘 새겨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서승 전 전주문화원장은 왜군은 전라1로, 경상2로, 해로 등 4로에 각각 4만 명을 배치했다고 말한다. 전라1로에 배치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병력은 1차 진주성 전투 후 운암으로 진격한 것으로 본다. 운암에서 대패한 왜군은 7월 7일부터 8일까지 웅치전투를 벌인데 이어 9일에는 이치전투를 벌이며 전주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양대박 장군의 운암대첩, 웅치전투에서 정담 장군 등의 순절로 전주를 공격하지 못했다. 호남에서 병력과 군량 등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기에 평양성과 한양을 수복할 수 있었다. 결국 임진왜란을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서애 유성룡은 이에 대해 국가군저 개고호남, 약무호남 시무국가라고 했다.
음력 7월 7일 저존재에서 양대박 장군의 영정 봉안식이 열릴 때 전북도청 공연장에서는 웅치전투에 참전한 정담·황박 장군 등의 후손이 참여하는 추도 행사가 열렸다. 또한 장수군 장계면 논개 생가터에서는 제432주기 의암 주논개 추모제 제례가 봉행됐다. 주논개는 1593년 7월 7일 왜군의 승전연에 기생으로 가장, 침투해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했다.
전북자치도는 음력 7월 7일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하는 데 헌신한 영령들의 숭고한 뜻을 대대적으로 기리는 연합추모제를 여는 방안을 모색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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