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목소리를 반영하는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를 구성할 수는 없는가? 금통위에 노동계 추천 인사가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그런 주장을 담은 법안이 여러 차례 국회에 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법안이 제대로 논의된 적은 없었다. 제안된 법안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계류법안함 한켠에 머물러 있다가 국회 임기가 끝나면 자동으로 폐기되기 일쑤였다.
이번 22대 국회에도 같은 내용의 법안(한국은행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제출되었다. 올해 7월 민주당 전용기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지난 8일, 기획재정위원회는 이 법안을 전체회의에 상정했다.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이 법안을 본격적으로 다루겠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이 법안은 법안심사를 담당하는 소위원회로 넘어갔다. 심사를 마친 다음 다시 상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법안의 운명이 결정될 예정이다. 이번에는 다를지 지켜볼 대목이다.
상임위원회에 상정되는 법안에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서가 첨부된다. 이 보고서는 법안심사의 주요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심사 과정에서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는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법안 심사위원들이 관행적으로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법안의 방향이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에 의해 죄우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번에 제출된 법안에 대해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이 법안의 검토를 담당한 수석 전문위원은 금통위에 노동계 추천 인사가 들어가면 통화정책 의사결정 과정의 전문성이나 중립성이 손상당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금통위 운영의 민주성과 대표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얘기한다. 전체적인 인상으로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서가 노동계 추천 금통위원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으로 읽힌다. 이번에도 입법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상케 한다.
무너진 금통위 중립성, 노동계 추천 인사로 재구축해야
그런데 노동계 추천 인사가 금통위원으로 들어가면 전문성이나 중립성이 손상된다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의 평가는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 먼저 전문성을 보자. 노동계 추천 인사란 노동계 이해를 대변해줄 수 있는 금융전문가를 의미한다. 금융에 대해 잘 모르는 노동자를 금통위원으로 들여보내자는 얘기가 아니다. 바꿔 말해서 금융전문가를 노동계 추천을 받아서 금통위에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금융전문가가 노동계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해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중립성을 보자. 사실 노동계가 추천하는 인사를 금통위에 보내자는 주장의 배경에는 그동안 금통위의 의사결정이 중립적이지 않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금통위는 총 7명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금융부문의 대표나 기업 대표는 들어가 있지만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의 대표는 들어가 있지 않다. 따라서 금통위 구성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배제하기 쉬운 쪽으로 이미 기울어 있다. 처음부터 금통위 의사결정이 중립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중립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노동계가 추천하는 인사를 금통위에 들여보내자는 주장이 나왔다.
금통위는 한국은행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이다. 여기에서 통화와 금융 정책의 방향, 그리고 화폐량과 정책금리 수준 등이 결정된다. 금통위의 의사결정은 계층별로 서로 다른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정책 금리의 변경이 특정 계층에게는 유리하지만 다른 계층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금통위의 의사결정은 계층별 영향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한국은행법 제3조에 실려 있는 중립성 규정의 내용이다. 중립성이 중앙은행 의사결정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금융통화 의사결정 기구를 독임제가 아니라 위원회 조직으로 한 것도 이 중립성 규정과 관련이 있다. 유명한 중앙은행 연구자인 앨런 블라인더가 얘기하듯이 의사결정을 최고의 전문가 한 명이 하는 것보다는 여러 명이 합의해서 하는 것이 실수 가능성을 줄인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중립성을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위원회의 취지는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위원들로 조직을 구성하여 이를 통해 이해의 대립을 조율해나가면서 합의를 이끌어내자는 데에 있다.
개인 한 명은 중립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아무리 현명한 인물일지라도 출신 배경이나 경험, 그리고 현재 처한 상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는 스스로 중립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치 중립적인 사회과학이 성립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가치 중립적인 개인도 존재하기 어렵다.
대공황기에 활동했던 미국 경제학자 어빙 피셔의 사례는 이를 잘 드러내준다. 어빙 피셔는 당대를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화폐금융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다. 그는 처가에서 기업을 물려받은 대주주이기도 했다. 그는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직전인 대공황 전야에서 앞으로 미국 주가가 고원에 머물 것이라는 틀린 예측을 했다. 화폐금융 최고의 전문가인 그마저 주가 상승에 이해를 가진 대주주라는 위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셈이다. 이는 전문가라고 해서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위원회 조직은 구성원 개개인으로서는 완전히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출신 배경과 처한 상황이 다른 개인들이 모이면 개인들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중립성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 이의 조건은 위원들의 다양성이다. 다양한 의견과 이해가 표출되고 조율되는 과정에서 중립성을 높일 수 있다. 위원들이 공통의 경험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중립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금통위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위원들의 다양성보다 공통성이 훨씬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한 기자간담회에서 금통위가 특정 이해집단을 대변하는 분보다 금융시장이나 거시경제 전체에 중립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이창용 총재는 개개인이 중립적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전제 속에서는 구성한 금통위는 중립성을 확보할 수 없다. 거기에서 올바른 판단이 내려지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배경이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면 어빙 피셔와 같은 판단으로 이끌리기 쉽다. 오히려 노동계가 추천하는 인사가 금통위에 들어가면 다양성,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고 판단 오류의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 물론 다양성이 증가하면 의사결정은 좀더 시끌벅적하고 지리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과정이 민주성 원칙의 장점이기도 하다.

중앙은행 독립성은 사회 불평등만을 키울 뿐
중립성을 확보하지 못한 중앙은행은 자산계층 친화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여러나라 중앙은행들이 이른바 금융화 국면에서 자산 계층 친화적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중앙은행의 여러 정책들에서는 고용이나 실물경제보다 자산가격 유지에 초점을 두는 강한 흐름이 나타났다.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1990년대부터 힘을 받은 중앙은행 독립성 논리이다. 중앙은행의 의사결정은 정부나 정치인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며 최고 전문가의 독립적인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이 논리의 핵심이다.
한국은행법은 한국은행의 자주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일본은행법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 이 자주성은 사실상 독립성과 동의어이다. 독립성의 대상이 무엇인지, 곧 누구한테서 독립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강조점이 갈린다. 중앙은행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정치나 정부의 영향력을 회피의 대상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초라는 면에서 보자면 중앙은행이 금융시장 권력이나 연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훨씬 중요할 수 있다.
중앙은행 독립성 주장에는 정치적인 과정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인들이란 이해관계에 매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기술관료(technocrats)에게 중앙은행 의사결정을 전적으로 맡기자고 한다. 여기에는 중앙은행 운영에 스며드는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측면이나 계층별 이해관계의 중요성 따위는 생각하지 말자는 함의가 배어 있다.
그러나 정치적 과정과 정부에서 독립한 중앙은행은 금융시장 권력 쪽으로 다가가기 십상이다. 금융시장을 구성하는 주요한 주체는 자산가, 금융자본가, 재벌, 외국자본 등이다. 여러 나라들에서 시장친화적으로 기운 독립적인 중앙은행들은 금융 이익을 지키는데 봉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중앙은행들은 상품 가격이 오르는 데에는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주택 가격이 오르는 데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금융시장 권력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앙은행 독립성 논리는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 금융 이익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기능을 해왔다.
당연하게도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는 사회 불평등의 심화로 나타난다. 실제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불평등을 키운다는 다양한 경험 연구들이 있다. 2021년에 세계은행이 발표한 보고서는 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세계은행 연구자들은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사회 불평등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들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가?”(보고서 제목)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렇다고 답변했다. 연구자들은 1980년부터 2013년까지 121개국에서 모은 데이터를 분석하여 그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 보고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사회 불평등과 연결되는 세 가지 메커니즘을 설명하다. 첫째, 재정정책을 간접적으로 제약하여 정부가 재분배에 나설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곧, 중앙은행의 정부 지원 기능을 차단함으로써 정부의 복지 지출 능력을 제한하여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한다. 둘째, 정부로 하여금 금융시장 규제를 완화하도록 유인하며, 이는 자산 가치의 급등을 가져온다. 이러한 자산은 주로 부유한 계층이 소유하고 있다. 셋째, 중앙은행 독립성은 대체로 물가안정 목표제를 동반하는데, 이에 따라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억제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펴면 실업 증가의 위험이 높아지고 이는 노동자의 협상력 약화와 임금 하락으로 이어진다.
노동계 추천 금통위원 확보 위해 노조, 시민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중립성은 중앙은행 의사결정의 중요한 가치이다. 노동자 추천 인사가 금통위에 들어가면 의사결정의 중립성을 손상하기는커녕 더 높이게 될 것이다. 중앙은행 독립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독립성의 대상은 정부라기보다는 금융시장 권력이나 미국 연준이어야 한다. 금융시장의 이해나 미국 연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중앙은행 독립성 개념이어야 한다. 정부에서 독립한 중앙은행은, 세계은행 연구가 보여주듯, 사회 불평등을 키우는 쪽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중앙은행은 금융 엘리트와 자산가 계층만을 보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노동자와 사회 전체의 이익을 보장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이를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의사결정 기구에 노동자 대표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중앙은행이 사회 불평등의 확대가 아니라 완화에, 자산가격의 상승이 아니라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사실 금통위의 개혁은 사회 불평등의 완화나 자산 가격 안정을 이루는 데에서 그 어떤 과제보다 시급할 수 있다. 노조나 시민사회가 여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도움받은 자료>
임수강, <부자은행 가난한 사회>, 더늠, 2025.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한국은행법 개정법률안 전문위원 검토보고서>, 2025.9.8.
Michaël Aklin, Andreas Kern, Mario Negre, "Does Central Bank Independence
Increase Inequality", World Bank, Policy Research Working Paper(9522), 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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