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남한의 민주주의가 한 때 위기에 빠졌지만, 남북이 지금과 같이 다른 모습을 하게 된 데에는 포용적인 제도가 구축됐었냐는 여부에 차이가 있었다면서, 정치 차이가 이같은 모습을 만들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24일 호텔현대 바이 라한 목포에서 김대중평화센터가 주관하고 전라남도, 목포시, 신안군이 주최하는 제3회 김대중 평화회의가 열렸다. 이날 '평화경제: 세계와 한반도를 위한 전략'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학교 교수는 "한국은 어떻게 상대적으로 낮은 불평등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혁신적이고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사회가 되었을까? 바로 포용적 경제제도를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포용적 경제제도는 매우 중요하다. 아시모글루(Acemoglu) 교수와 저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포용적 경제제도를 그 반대 개념인 착취적 경제제도와 대조했다"며 "제가 한반도를 매우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한반도에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면서 남한은 포용적, 북한은 착취적 경제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했다.
로빈슨 교수는 "북한의 경제제도는 포괄적 인센티브와 기회를 창출하지 않고 집권당, 지배 세력과 연관된 사람들에게만 인센티브와 기회를 제공하며,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인센티브와 기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며 포용적 경제 제도는 "혁신과 번영을 창출"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제도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예컨대 한국은 왜 북한보다 더 포용적인 경제 제도를 갖게 되었을까? 그 이유 또한 명백하다. 이는 정치적 과정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로빈슨 교수는 "착취적 제도라고 부르는 체제 아래서도 성장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성장은 일시적인 경향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도 그런 상황이었다"며 "한국에서의 진정한 혁신의 급격한 확대는 민주주의로의 전환과 진정한 포용적 제도가 확립된 이후에야 이뤄졌다. 실제 민주주의가 공고히 자리잡은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1990년대 후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시기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는데 국민들이 이를 갚기 위해 각자의 금을 내놨다. 이는 한국인이 사회와 자신을 얼마나 깊이 동일시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며 "한국인이 당시 민주화 과정에서 구축되고 있던 포용적 사회에 진정으로 동참하고자 했으며, 그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정말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로빈슨 교수는 "북한이 착취적 경제제도를 가진 이유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치적 포용의 결과 포용적 경제제도로 전환했고, 결국 번영한 OECD 국가가 되었다"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독재를 무너뜨리고, 정치 체제를 개방하며, 국민의 참여와 대표성을 보장하기 위해 싸우는 데 일생을 바쳤다. 경제적 변화를 주도하는 이러한 정치적 힘, 치적 포용을 이뤄냄으로써 경제적 포용과 경제 성장을 심화시킨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관련 "많은 사람들이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 제 정치학자 동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후퇴'의 한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며 "전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가 도전을 받고 있는 것 같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로빈슨 교수는 미 정치학자인 고(故)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민주주의는 일종의 파도처럼 밀려온다"고 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현재는 "민주주의의 역(逆)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로빈슨 교수는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날 때, 민주주의는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한다. 실제로도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 좋은 일도 한다"라며 "하지만 기대치가 문제다. 기대가 너무 높아서 민주주의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러면 사람들은 대안을 살펴보고 평가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역방향 물결이 전세계에서 민주주의에 도전하고 있는데, 좋은 소식이라면 우리가 이전에도 이런 상황을 겪었고 결국 극복해냈으며, 그 뒤에 제4의 민주주의 물결이 찾아왔다는 점"이라며 "한국에서도 잘 아시겠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안주할 이유가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다.
로빈슨 교수는 "제가 알기로는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현재 상황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계엄을 시도하게 된 배경에 대한 일종의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이러한 불안감은 사람들이 도전과 문제점을 평가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게 하는 데에 많은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내다봤다.
그는 "한국에서 정치적 포용을 만들어낸 요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그건 국민들이었다.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사회를 위해 투쟁하려는 국민의 결의가 한국의 정치적 포용을 이끌어 냈다"며 한국의 시민들이 민주주의 역물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며 동맹국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한미 동맹을 우선하는 한국의 정책이 혹독한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왔다.
학술회의 두 번째 날인 25일 '트럼프 제2기: 세계정책과 한반도정책'을 주제로 발표를 맡은 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는 '비자유주의적 불량 국가인 미국과 어떻게 공존해 나갈 것인가 : 트럼프 2.0의 '미국 우선주의' 대 한국의 '동맹 우선주의''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트럼프 2.0은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법과 규칙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트럼프 2.0의 모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의 모습이다. 당시 미국은 보호 관세와 국수주의적, 인종배타적 이민 통제를 통해 부상하는 산업·제국주의 강국이었다"라며 "트럼프 2.0은 결코 관대하고 자유주의적인 패권국이 아니다. 비자유주의적, 수정주의적이며 불량배와 같은 착취적 초강대국 혹은 약탈적 제국으로, 국제 규범을 깨고 세계를 불안정하게 하며 글로벌 경제를 둔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트럼프 2.0이 비자유주의적, 수정주의적 권력으로 부상하면서 전략적 한미동맹의 제도적, 이념적 기반은 훼손됐다. '미국식 국가자본주의'의 부상은 한국이 중국이 아닌 미국 편에 설 이념적 근거를 약화시켰다"며 "전략적 한미동맹의 근간이었던 군사 분야에서도 주로 실질적 변화로 인해 혼란이 커지고 있다. 북한이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되면서 미국이 정말 서울을 위해 시애틀을 희생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한국의 한미동맹 우선 전략은 트럼프 2.0 체제 하에 가장 혹독한 시험대에 올랐다. 이재명 정부의 '미래지향적, 상호적, 포괄적인 전략적 동맹'이라는 새 슬로건은 모순이며, 트럼프 2.0이 혐오할 만한 것"이라며 "트럼프의 '협상의 기술' 접근법이 그의 가부장적이며 변덕스러운 지배력 행사와 결합되면서 제도적 안정성, 미래지향적 확실성, 일관된 전략을 위한 여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의 '상호적' 관세조치에서 드러나듯, 동맹국과의 '상호성'에 대한 트럼프의 개념은 상호적이고 평등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라며 "트럼프주의의 근본은 글로벌 패권 프로젝트가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는 인식에 있다. 이러한 신념은 기존의 동맹 정책 등을 통해 미국이 기존 방식대로 세계를 운영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두 번째 트럼프 정부 하에서 동맹의 조건이 크게 바뀌었다면서 "그 조건은 트럼프 2.0이 '공정하다'고 인정할 만큼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이어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세계적 혼란, 트럼프 2.0, 그리고 한반도 평화 전망'을 주제로 발표한 존 아이켄베리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는 트럼프 정부 하의 한미 동맹에는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단순히 무역 문제 뿐만 아니라 안보 사안에서도 양국 간 갈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여전히 다른 질서의 논리보다 협력을 촉진하고 글로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큰 역량을 가졌다고 본다"며 "앞으로 몇 년간 동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각국은 미국의 힘에 따른 불확실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대비하고 보호하려 할 것이나, 동시에 지난 80년간 협력을 촉진해 온 베스트팔렌 체제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방식을 재창조하고 재건할 방안을 모색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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