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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해방자'를 예술로 고발한 거장의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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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해방자'를 예술로 고발한 거장의 작품 세계

[손호철의 벽화 기행] 4. '고독한 천재' 오로스코

"대중은 설탕과 꿀과 사탕을 좋아한다. 당뇨병 예술을, 설탕을 많이 칠수록 상업적으로 성공한다. (…) 항상 시대의 흐름과 주류에 맞서야 한다. (…) 오류나 과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강한 목소리로 사고하는 과감성,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선포할 수 있는 과감성이다. 누군가 절대적 진리를 갖게 되기를 기다린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벙어리임에 분명하다. 만일 창조적 충동이 멈춘다면, 세상은 그 전진을 멈출 것이다." (호세 클라만데 오로스코. 1883~1949)

"과달라하라, 도착했습니다." 멕시코시티를 떠난 비행기는 서북쪽으로 600km 떨어져 있는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에 도착했다. 인구 300만 명의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산업의 중심지, 특히 정보통신산업의 중심지로 '멕시코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곳이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벽화들이 멕시코시티에 몰려 있지만, 고독한 천재이자 '외로운 늑대'였던 호세 오로스코는 자신의 고향 동네인 이 도시에 많은 벽화를 남겼다. 그의 벽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과달라하라를 방문해야 한다.

▲오로스코의 자화상 ⓒ손호철

멕시코 벽화 3인방 중 시케이로스는 '반(半)세대'(10살) 아래이고, 같은 세대는 리베라와 오로스코다. 둘은 너무 대조적이고 대립적이다. 1930년대 멕시코에 머물며 둘과 교류했던 전설적인 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 Eisenstein, 1898~1948) 등이 지적했듯이, 리베라가 피카소처럼 외향적이고 스포트라이트를 즐겼던 '디오니소스'였다면, 오로스코는 일밖에 모르는 '프로메테우스'였다. 리베라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6살부터 홍등가를 출입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허풍쟁이였다. 오로스코는 멕시코혁명 과정에서 왼손을 잃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자서전에서 그게 아니라 그전에 화약 장난을 하다가 다친 것이라고 바로잡았을 정도로 고지식했다.

리베라의 그림이 평면적, 정태적이고 서사와 나레이션 중심이라면, 오로스코는 상징적, 역동적이며 그림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에이젠슈타인의 표현에 따르면, "형태와 스타일을 통한 비명"). 리베라가 고전주의에 가깝다면, 오로스코는 표현주의에 가깝다. 리베라는 서구식민주의를 비판하며 과거 사회를 미화해 '인디오주의'라는 비판을 들었다. 오로스코는 서구식민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인신공양보다는 가톨릭 신부들이 오히려 관대했다"고 비꼬았다. 나이 들어 바뀌긴 했지만, 초기 오로스코의 경우,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젊은 맑스'의 관점처럼, 서구식민주의를 낡은 전통사회를 깨기 위한 '역사 발전의 도구'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혁명 당시 파리 유학 중이었던 리베라가 귀국 후 멕시코혁명을 찬양했다면, 학살과 희생을 몸소 체험한 오로스코는 혁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포드의 초청으로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리베라가 조립라인에 의한 노동 분업과 대량 생산 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포드주의에 매료됐다면, 오로스코는 이를 "인간을 두뇌, 가슴,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으로 만드는 노예제도"라고 비판했다.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던 리베라와 달리, 오로스코는 공산주의도 '거짓 해방자'라고 비판한 '반(反)이념적 좌파'였다. "예술가는 어떠한 정치적 신념도 가져서는 안 된다. 정치적 신념을 떠드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리베라가 '역사는 진보한다'는 낙관론자였다면, 오로스코는 '역사란 반복될 뿐'이라는 비관론자였다. 리베라가 여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화려한 여성 편력을 즐겼다면, 오로스코는 여자는 '창녀이거나 희생자'라고 생각하며 멀리했다. 둘은, 사람들이 "한 사람이 사라지면 다른 한 명도 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보완적이고 서로를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비판적이었다. 오로스코는 리베라를 대중에 영합하는 '당뇨병 예술가'이자 "발기불능의 불쌍한 뚱보"라고 조롱했다. 리베라는 오로스코를 "반혁명을 그린 유일한 대가"라고 비판했다.

▲ 예술궁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오로스코의 작품 '카타르시스' ⓒ손호철

리베라와 오로스코의 대비는 예술궁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베라의 대표작 '인간, 우주의 통제자'에서 회랑을 가로질러 반대쪽에 가면 오로스코의 대작 '카타르시스'가 자리 잡고 있다. '카타르시스'라는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데, 벽화는 더 충격적이다. 과감한 생략과 강한 색조에 내용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파괴와 폭력의 '디스토피아'다.

오른쪽에는 현대적 무기들이 쌓여있고 왼쪽에는 내전 상태를 그리고 있다. 가운데 위치한 주인공은 상의를 벗은 채 쓰러져 있는 창녀다. 그 옆에는 목이 베어진 늙은 창녀의 머리가 자리 잡고 있는데, 머리카락은 은화로 되어 있다. 현대의 황금만능주의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리베라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인간, 우주의 통제자')을 피력했다면, 오로스코는 처절한 비관론을 울부짖고 있다.

오로스코의 특징 중 상당부분은 그가 겪은 사고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20살에 화약으로 불꽃놀이용 불꽃을 만들다가 폭발사고가 나, 한쪽 손을 잃었다. 그런 만큼. 그는 누구보다도 더 노력해야 했고, 대중과 어울리기보다는 작업실에서 작품에 매달렸다. 그는 멕시코혁명 동안 헌법주의자 카란사 계열 신문에서 삽화가로 일했는데, 독재 세력을 제거한 뒤 혁명 세력이었던 카란사, 판초 빌라, 사파타가 분열하여 서로 살육하는 것(2회 '멕시코혁명의 영웅 사파타의 흔적' 참조)을 보면서 혁명과 이념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회의를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만큼 세 명의 대가 중 서양 현대미술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고, 미국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0년 오로스코가 그린 '프로메테우스'라는 벽화를 보기 위해, 202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포모나대학(Pomona College)을 찾아 갔다.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죄로 코카서스산에 묶여 매일 간을 쪼이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 오로스코가 미국 체류 중 로스앤젤레스 근교 포모나대학 학생식당에 그린 벽화 '프로메테우스' ⓒ손호철

식당 벽에 그려져 있는데, 감상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 식사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해서, 어렵게 예약을 하고 갔다. 가보니 교수들이나 귀빈들을 위한 고급 식당도 아니고 학생식당이었다. 학생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한쪽 벽에 벌거벗은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을 훔치고 있고 자그마한 인간들이 불을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벽화는 강한 색조와 프로메테우스의 강렬한 포즈로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이 벽화는 멕시코 화가가 미국에 그린 최초의 벽화로, 오로스코가 두 달간 대학 기숙사에 살며 식당 벽에 완성한 대작이다. 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 걸작을 감상하고 있자, 작품을 의뢰한 대학 당국의 선견지명으로, 점심마다 이 명작을 즐기며 식사를 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학생들이 부러웠다.

그는 뉴욕의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Science)과 뉴햄프셔의 더츠머스대학(Darthmouth College)에도 벽화를 그렸다. 더츠머스에 그린 '아메리카문명 서사시'는 원주민으로부터 유럽의 식민 이주민, 전쟁과 산업화 등 아메리카의 역사를 그린 300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작품이다. 리베라의 록펠러센터 그림이 수난을 당했듯이, 이 그림 역시 학부모들이 '공산당선언'이며 우리 자식들이 왜 멕시코인의 그림을 매일 봐야 하느냐고 항의했다. 대학 측은 같은 논리라면 루브르박물관 그림의 반은 제거해야 한다며 옹호해 파괴를 막았다. 그 덕에 살아남은 이 그림은 2013년 미국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역설적으로, 멕시코시티에 있는 그의 초기 작품들은 보수적 학생들이 일부 파괴했고, 일부는 생각이 변한 오로스코 자신이 파괴해 버렸다).

과달라하라의 오로스코를 감상하려면, 최소한 세 군데를 가야 한다. 주정부청사와 카바나박물관, 그리고 과달라하라대학 미술관이다. 주정부청사 1층에서 2층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정면의 벽에 그려진 그림이 나를 압도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2년간 그린 그의 대표작 '이달고'다. 이 벽화는 멕시코 독립과 혁명의 단초를 만들어 '멕시코의 국부'로 존경받는 이달고 신부가 혁명에 불을 붙이는 것을 중심 테마로 삼고 있지만, 아래쪽에는 멕시코혁명을 살육과 학살로 그리고 있다. 왼쪽에는 십자가를 내세운 종교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지만, 오른쪽은 더욱 충격적이다. 팔에는 나치 완장을 차고 있지만 등에는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낫과 망치를 그린 괴물들이 대중을 선동하는 그림을 통해, 좌우이념을 모두 고발하고 있다.

▲ 오로스코가 과달라하라 주정부 청사에 그린 '이달고' 전경 ⓒ손호철
▲ '이달고' 오른쪽 하단부에 좌우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이데올로기의 사육제' ⓒ손호철

두 가지 점이 놀랍다.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 그것도 정부 관청에 전시할 작품에 벌거벗은 창녀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멕시코 국부 이달고 그림에 나치즘과 공산주의 이념을 고발하고, 대법원 벽화에 정의가 술에 취하고 눈이 멀어 있는 사이 민중이 고통을 받는 그림을 그린 그의 발상과 용기가 존경스럽다(대법원 벽화는 방문했지만, 대법원 출입에 예약이 필요해 보지 못 했다). 동시에 이를 허용한 멕시코 정부의 관용에 박수가 나왔다(대법원 벽화는 판사들이 철거하라고 반발했지만 철거하지 않는 대신 법을 옹호하는 다른 벽화를 반대쪽에 그려 넣었다.)

▲ 멕시코시티 대법원 벽에 그린 '정의'. 정의의 신 법이 재판석에 앉아 취해 있다. ⓒ손호철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색창연한 건축물인 카바나박물관은 건물 하나 통째로 오로스코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최고는 돔 천장에 그려진 '불의 인간'이라는 작품이다('불의 인간'은 오로스코의 별명이기도 하다). 불은 인간이 가진 창조와 파괴의 중요한 수단으로, 오로스코는 벽화를 통해 이 양면성을 부각시켰다. 돔은 높이가 27m에, 직경이 11m나 되기 때문에, 여기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설명을 보니, 천장까지 복잡한 나무 사다리를 지은 뒤 오로스코는 거기에 올라가 작업했다고 한다.

▲ 카바나박물관 천장에 그린 '불의 인간' ⓒ손호철
▲카바나박물관 ⓒ손호철

주로 평면의 벽에 작업을 한 디에고와 달리 오로스코는 여기뿐만 아니라 과달라하라대학 미술관 등 여러 곳에서 돔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잠시 올려다보는데도 목이 아파 힘든데, 천장, 그것도 평면이 아니고 둥그런 천장에, 그것도 한 손이 없는 장애로 그림을 그리는, 그 어려운 작업을 해낸 그의 노력과 재주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돔 천장만이 아니라 이어지는 곡선형 천장들로부터 벽과 기둥, 창문 등 복잡한 건축을 고려해 건물에 맞게 그린 거대한 크기의 대작들을 보고 있으면, 전율이 일어난다. 박물관에는 이같이 그린 그림들이 57개나 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이를 즐길 수 있다. 벽화들은 원주민의 삶으로부터 스타워즈를 닮은 코르테스, 끝이 날카로운 창으로 그려진 십자가를 들고 원주민들을 무릎 꿇린 신부 등 멕시코와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 카바나박물관 천장과 벽에 이어지는 벽화들 ⓒ손호철

그의 마지막 대작을 보기 위해 과달라하라대학 미술관(MUSA)으로 향했다. 미술관 강당으로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돔 천장을 채운 '창조자와 반역자 인간'은 교사로 보이는 사람이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 학생들을 인도하고 있고 과학자들은 여러 면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동자는 건장한 몸으로 기계를 통제하고 있는 반면, 절규하는 얼굴의 '반역자'의 손은 길게 늘어나 허공 속에서 교사의 손과 이어져 있다.

▲ 과달라하라대학 미술관 ⓒ손호철

강당 정면에 그려진 '인민과 거짓 해방자'는 충격적이다. 인민은 버썩 마른 벌거벗은 몸에 충혈된 눈으로 구호를 외치며 먹이를 찾아 좀비처럼 달려들고 있고, 이들을 선동한 '거짓 해방자'들은 피 묻은 책과 칼을 들고 왼쪽 구석에 몸을 피하고 있다. 모든 이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오로스코의 입장을 잘 읽을 수 있는 그림이다. 너무 냉소주의적이긴 하지만, 한번은 자신의 이념을 돌아보고 성찰해 보라는 경고로 가치가 있다. 지금과 같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에 의해 '가짜뉴스'가 지배하는 '광기의 포퓰리즘' 시대에는 특히 그 의미가 각별하다.

▲ 오로스코가 과달라하라대학 미술관 벽에 그린 '인민과 거짓 해방자' ⓒ손호철
▲ 과달라하라대학 미술관 천장의 '창조자와 반역자 인간' ⓒ손호철

과달라하라를 떠나 멕시코시티로 돌아오는 비행 내내, 한 질문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태극기부대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지만, 극렬 자유주의세력인 '개딸', 나아가 나를 비롯한 우리의 '진보세력'들은 오로스코가 고발한 '거짓 해방자'들은 아닌가?

▲ 오로스코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인지 과달라하라 거리의 벽화들도 범상치 않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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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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