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7월 7일 칠석은 전북 역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을 상대로 운암대첩을 거둔 충장공 양대박 장군의 추모제가 남원시 화정동 저존재에서 해마다 이날 열린다.
한편으로는 웅치전투에서 순국한 정담 장군 등의 추모제가 같은 날 전북도청 공연장에서 열린다. 또한 장수군 장계면 논개 생가터에서는 의암 주논개 추모제가 봉행된다. 3건의 추모제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열리는 것이다.
추모제 주인공인 호국영령들의 영웅적 투쟁을 기리고 전북 역사를 올바르게 열어가려면, 전북자치도 주관으로 3건의 추모제를 통합해서 지내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왜군의 선발대 고니시 유키나가가 대소 전함 700여 척에 1만8700명의 군사를 동원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됐다. 그날 오후 5시 조선 수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부산진에 상륙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4일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15일에는 동래성을 점령했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1만1000명의 왜군을 앞세워 김해를 점령했다. 25일 상주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배하고 충주로 퇴각했다. 27일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대항했지만 패배하고, 28일 충주가 함락됐다.
선조는 30일 도성 한양을 떠나 평양으로 몽진을 갔다. 5월 3일 전쟁 개전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됐다. 6월 말 개전 두 달여 만에 전라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토가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저존재에서 운암대첩 주인공 양대박 장군 추모제
남원 출신인 양대박 장군은 운암대첩을 거둬 전라감영과 호남을 지켜냈다. 장군의 둘째 아들 양형우는 6월 24일 『종군일기』에서 “부친이 더 모집한 의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임실의 갈담역에 전진하여 머물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25일에는 “새벽에 밥을 먹고 율치(栗峙 밤실골)를 넘으려는데 운암의 장곡(長谷)에 왜적의 유격병 1만여 명이 깔려 있었다. 이에 부친이 의병군을 두 부대로 나누고, 형우로 하여금 한 부대를 거느리게 하고, 좌우에서 협공해 크게 격파했다. 부친이 손수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50급(級)이고, 의병들이 쳐 죽인 것이 1천여 명이었다.
양대박 장군은 26일 염암(塩巖)을 거쳐 전주 북정(北亭)까지 진군했다. 27일에는 전라도사 최철견이 소고기와 술로 의병들을 먹이며 운암에서의 승리를 칭찬했다. 7월 2일 의원의 진찰을 받은 결과 장군의 건강이 치료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기록에 의하면 장군은 4천여 명의 의병 및 병기와 군량 등을 모집하고 조달했다.
5일 밤중에 오룡마가 갑자기 슬피 울더니 휘청거리며 먹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양대박 장군은 “오룡마가 나보다 먼저 죽었으니 하늘이 나를 보살피지 않으심이로다. 비록 그러하더라도 죽어서 여귀(厲鬼,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의 귀신)가 돼 기필코 왜적 놈들을 죽일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7일 양대박 장군이 서거했다.
장군이 순국한 지 204년 후 1796년 8월 9일 「정조실록」에 따르면 “내(정조대왕)가 생각하기로는, 이 사람이 창의(倡義)한 것이 증 영의정 고경명보다도 앞섰고, 용단(勇斷)은 충무공 이순신보다도 나았으며, 살신(殺身)의 높은 충절은 두 사람과 똑같았다고 본다”라고 했다.
양대박 장군은 전공과 절의를 인정받아 정조 20년(1796) 8월에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 判中樞府事 兼兵曹判書)로 증직됐다. 정조대왕은 같은 해 10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전북도청 공연장에서 웅치전투 호국영령 추모제
왜군은 경상도를 차례로 점령한 후 6월 16일쯤 전라도 무주, 6월 23일 금산을 점령하고 전라 감영, 전주부성을 노리고 있었다. 감사 이광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을 웅치에 보내 적을 막도록 했다.
7월 7일부터 전투를 벌였으나 다음 날 중과부적으로 정담 장군과 장졸들이 전사했다. 이처럼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복남과 황박 등은 후퇴해 안덕원에서 적을 지켰다. 7월 9일 안덕원 너머에서 왜군과 대치했으나 왜군은 전주 부성을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정담 장군은 1583년 무과에 급제해 신립 장군 기병대의 돌격장으로서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고 1592년 4월 19일 김제군수에 임명됐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을 부관으로 하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에 맞서 전라도의 핵심 길목 지점인 웅치를 방어하고자 웅치고개에 3차 방어선을 편성했다. 강대한 적을 맞아 싸웠으며,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군의 정예 다수를 격멸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담 장군은 전투에서 고립되자 퇴각을 권하는 참모에게 “차라리 일적을 죽이고 죽을지언정 내 몸 하나 살기 위해 달아나 적을 장구케 할 수는 없다”며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화살이 떨어진 뒤 검을 뽑아 육탄전 끝에 성 위에서 전사했다.
장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한 것은 의대(衣帶)에 이름을 남긴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정담 장군의 위국헌신에 대해서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전투 중에서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 장군의 공이 가장 크고 행주싸움을 주도한 나의 공은 그 다음이다”라고 평가했다. 권율 장군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 선생의 기록이다.
장계면 논개 생가터에서 의암 주논개 추모제
주논개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해 왜장과 함께 순국한 충절의 영웅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왜적은 12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했고, 조선군은 김천일, 최경회 장군 등 5000여 명의 병력과 성내 주민 6만여 명이 합세해 9일간 처절하게 항전했다. 결국 성이 함락되고,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6만 명 이상이 전멸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적은 7월 7일 남강 의암에서 승전연을 열고 승전을 자축하고자 했다. 이 때 주논개는 기생으로 변신해 왜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주논개는 장수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최경회 장군의 둘째 부인으로 인연을 맺었다. 19세 때 부군을 따라 진주성에 들어가 순국한 것이다. 주논개는 위국헌신의 방편으로 자신을 기적(妓籍, 기생등록대장)에 올리고 의암에서 승전연에 참석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 물결에 뛰어들어 순국했다.
주논개의 거사는 사후 130년이 되는 1722년 경상우병마사 최진한이 올린 장계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같은 내용은 1831년 정덕선 등이 간행한 『충렬실록』에 수록돼 있다. 이 『충렬실록』이 주논개 거사에 관한 역사적인 첫 기록이다. 『호남절의록』과 『호남삼강록』, 『호남읍지』 등을 통해서도 주논개의 탄생과 최경회 장군과의 관계, 진주성으로 가게 된 연유 등이 나타난다.
변영로는 1922년 3월에 출간된 『신생활 2호』에서 '논개(論介)'라는 시를 발표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호남이 없었더라면 국가도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호남의 역할과 공이 크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호남은 나라의 보장(버팀목)이다.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도 없다(竊想湖南國家之保障,若無湖南,是無國家也)”라고 했다.
호남은 '민족의 곡창'으로서 '국가 위기 때마다 나라를 구한 땅'이다.
임진왜란의 극복에서부터 동학혁명을 통한 외세배척, 항일독립운동, 공화국 수립 이후 민주화운동 등에서 호남은 늘 선봉에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을 극복한 호국영령들의 위국헌신의 정신을 본받아 전북특별자치도를 살리는 데 역량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방편의 하나로 임진왜란 3대 추모제를 통합할 것을 제안한다. 합동추모제는 1년에 한 번씩 전북자치도 주관으로 저존재, 전북도청, 주논개 생가 터 등을 돌아가며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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