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상징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해묵은 중국식 '996' 과로 관행이 번지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종료 뒤 인공지능(AI) 기술 발달로 취업 시장에서 기술 노동자들의 입지가 좁아지며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등 일부 경영자들의 장시간 근무 주장이 통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고용주들이 현 노동시장을 악용하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생산성을 억누르는 장시간 근무를 고용주들이 실제 성과와 무관하게 투자 유치 홍보 메시지로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에선 오히려 최근 기업들이 과로를 억제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보도도 나왔다.
지난달 16일 미 온라인 매체 <샌프란시스코스탠다드>는 미 핀테크 기업 램프 분석에 따르면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지역 노동자들의 토요일 근무가 1년 전에 비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 회사 경제학자 애라 캐러지안은 법인 카드 결제 내역 분석 결과 노동자들의 토요일 식음료 지출이 토요일 정오부터 자정까지 눈에 띄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일이 뉴욕, 마이애미 등 다른 기술 중심지에선 벌어지지 않고 있다며 "'996' 현상은 샌프란시스코에서만 발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주 72시간 근무,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2시간 주 6일 근무를 뜻하는 '996' 용어는 2010년대 중국 기술기업들이 고속 성장을 위해 노동자들을 혹사시킨 데서 비롯됐다. 중국의 해묵은 과로 문화가 무제한 유급 휴가, 재택근무 선택지 제공, 각종 편의시설 등 복지로 이름 높던 실리콘밸리에 최근 번지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달 28일 <뉴욕타임스>(NYT)는 이러한 현상에 배경 중 하나로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호황을 누렸던 기술 기업들이 이후 수년 간 대량 감원을 이어 온 것을 들었다.
기업들이 코딩에 AI 도구를 활용하기 시작하며 고연봉 기술 기업 취업을 꿈꾸던 컴퓨터 과학 및 컴퓨터 공학 전공자들의 신규 취업길도 순탄치 않은 상황이다. 지난 2월 공개된 뉴욕 연방준비은행 자료를 보면 2023년 기준 22~27살 대졸자 중 해당 전공자의 실업률은 각 6.1%, 7.5%로 대부분 전공자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이는 미술사 전공자 실업률(3%)의 두 배가 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경영자들의 장시간 근무 요구가 업계에 수용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머스크는 2022년 소셜미디어(SNS) 트위터(현 X) 인수 뒤 직원들에 성공을 위해선 "극도로 열정적"이 돼야 한다며 "장시간 고강도 근무"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트위터 직원들은 반발하며 사직서를 던졌지만 최근엔 70시간 이상 근무를 요구하는 스타트업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AI 스타트업 릴라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등 채용 공고에 "주 70시간 근무"를 명시하고 있다. 세 끼 식사가 주 6일 회사에서 지원된다. 지난 7월 미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와이어드> 보도에 따르면 이 회사 성장책임자 윌 가오는 "삶을 바꾸는 기업을 만드는 데 헌신했던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자),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를 언급하며 장시간 근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샌프란시스코스탠다드>에 따르면 AI 위험 완화 스타트업 CTGT 최고경영자(CEO) 시릴 고를라는 이민자 가족의 대출이 거절되는 등 AI 모델이 차별적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한 "사명감"이 있는 주 70시간 이상 일할 직원들만 채용하고 본인도 늘 하루 14시간 일한다고 한다.
장시간 근무가 생산성과 창의성을 저하시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 멘로벤처스의 투자자 디디 다스는 <샌프란시스코스탠다드>에 이러한 관행이 나이가 많거나 자녀가 있는 구직자를 소외시키고 휴식을 통해 나오는 창의적 구상을 억누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과 정해진 장시간 근무 일정을 채우려 하는 건 다르다고 짚었다.
영국 스타트업 호스톨로지의 공동창업자이자 최고기술책임자(CTO)인 마크 소머필드도 지난 8월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 '미디엄'에 "장시간 근무는 효과가 없다"며 장시간 근무를 하면 사람은 "실수"를 하게 되고 정신적으로 지쳐 "나쁜 결정"을 하게 된다고 짚었다. 그는 "장시간 근무가 명예의 상징이 되면 직원들은 질보다 양에 치중하게 되고 이는 사업 전체를 고통에 빠뜨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번아웃(소진) 문화를 만드는 것은 장기적으로 비생산적"이라고 덧붙였다.
소머필드는 996 근무가 기술 노동자들이 취업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고용주들의 "권력 남용"이자 "AI 분야에서 빠르게 돈을 벌고 싶어 하는 기회주의자들이 조성한 문화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누군가 주 70시간 근무가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근거"를 보여야 한다고도 했다.
996 근무가 실제 성과보다 투자를 위한 홍보에 가깝다는 지적도 나왔다. 건강 분야 스타트업 포트 창업자 미란다 노바는 <샌프란시스코스탠다드>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신이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말에 일하고 이를 소셜미디어(SNS)에서 과시하도록 장려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초기 창업자에게 소셜미디어의 역할은 실제 고객에 제품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벤처캐피탈 투자자에게 자기 자신을 홍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벤처 투자자인 다스는 "젊은 창업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모두에게 주 7일 24시간 혹은 996 근무를 강요하는 것"이라며 "노예제적 사고방식으론 세대를 이어가는 기업을 만들 수 없다"고 일침을 놨다.
정작 중국에선 장시간 근무 관행에 균열이 일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 4월 <로이터> 통신은 중국 업체들이 직원들에게 정시 퇴근을 장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가전제조업체 마이디어가 올해 직원들에 오후 6시20분엔 퇴근할 것과 퇴근 후 회의 금지를 요구했다고 전했다. 이 회사의 소셜미디어엔 "퇴근 후에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메시지가 등장했다. 가전제품 업체 하이얼도 주 5일 근무를 도입했고 자정을 넘긴 근무가 잦았던 무인기(드론) 제조업체 DJI는 오후 9시까진 사무실을 비우는 정책을 채택했다고 한다.
최근 몇 년간 중국에선 '996'을 넘어 주 7일, 24시간 근무를 뜻하는 '007'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며 장시간 근무가 화두가 됐다. 젊은 층에선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감내하는 것이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환멸 등이 반영돼 과로를 배제하고 최소한의 생계만 꾸리는 체념적 생활 태도를 뜻하는 '탕핑(躺平·평평하게 누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로이터>는 중국 정부가 기업에 주 44시간 노동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관세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고 봤다. 중국 정책 입안자들이 경제의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소비를 늘리고자 하는데 소비 진작을 위해선 쉬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통신은 유럽연합(EU)이 지난해 12월 도입한 과도한 초과 근무를 포함해 강제노동을 통해 생산된 제품 판매 금지 규정도 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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