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사파티스타, 멕시코 민초들의 '살아있는 전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사파티스타, 멕시코 민초들의 '살아있는 전설'

[손호철의 벽화 기행] 7. '혁명의 후예' 사파티스타를 찾아서

"신자유주의는 인류에 대한 전쟁, 제4차 세계대전이다."(마르코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탕탕탕" 1994년 1월 1일 새벽. 어젯밤 송년파티의 여파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멕시코 최남단 치아파스주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라는 소도시의 정적을 총소리가 깨웠다. 놀란 주민들이 문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검은 스키마스크를 뒤집어 쓴 반군들이었다.

"우리는 (유럽의 식민지 지배) 500년 간의 투쟁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만하면 됐다(Ya Basta)'고 말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모이자, 낡은 군모에 스키마스크를 쓴 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사람이 발코니에 올라가 연설을 시작했다. 이후 '살아있는 전설'이 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 마르코스 부사령관이다.

▲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 엿 먹으라고 손가락을 세운 마르코스 사진 ⓒ손호철

멕시코 옛 왕국인 마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데는 멕시코시티에서 툭스틸라 구티에레스까지 900km를 날아간 뒤 고불고불한 산길을 한 시간이나 달려야 도착하는 오지다. 새벽에 출발한 긴 여정 끝에 시 중심가에 위치한 하얀 시청 건물을 바라보자, 31년 전 이곳 새벽하늘을 울린 총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NAFTA 출범에 저항해 1994년 1월 1일 사파티스타가 장악했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데 시청 건물 ⓒ손호철

1994년 1월 1일은 소련·동구 몰락 이후 미국이 야심적으로 추구하던 (그리고 현재 트럼프와 극우 포퓰리스트, 브렉시트 등으로 해체되고 있는) '세계화'의 일환으로 미국, 멕시코, 캐나다 북미 3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가 발동한 날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에 앉아 이 같은 새로운 경제권 탄생을 자축하고 있을 때, 3500km 떨어진 멕시코 한 오지의 원주민들이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이들이 멕시코혁명 당시 사파타가 이끌던 농민혁명군 '사파티스타'를 자청하고 나선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는 인류에 대한 전쟁인 (1, 2차 세계대전과 냉전에 이은) '제4차 세계대전'에 다름 아닙니다." 국립 멕시코대학(UNAM) 철학교수였지만 자본주의의 탐욕과 개발에 의해 오랜 삶의 터전을 잃고 있는 이 지역 마야 원주민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이들에 합류한 마르코스는 유창한 영어로 기자들과 관광객들에게 절망적 상황과 요구사항을 설명했다. 이 투쟁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EZLN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투쟁 모델'로, 마르코스는 '제2의 체 게바라'로 세계적 스타가 됐다.

멕시코 정부는 사실상 이들이 사는 지역을 일종의 '해방구' 내지 자치지역으로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스는 2001년 마스크를 쓴 채 원주민들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멕시코시티 연방의회까지 행진했고, 2005년 대선 때도 '또 다른 캠페인'이란 이름으로 멕시코시티까지 행군했다.

"오벤틱 마을을 방문할 수 있을까요?" 한 카페에 들러 물었다. 오래 전 한 기자가 사파티스타 해방구인 오벤틱 마을을 방문해 마을사람들이 그린 벽화를 찍어 올린 글을 읽었다. 이 글에 따르면, 외국인들이 주로 방문하는 한 카페가 이를 주선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 사파티스타들은 오벤틱 마을 등 자신들이 통제하는 해방구를 '독립된 국가'로 간주하기 때문에 반드시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고 한다.

▲ 데인 스트롬이 찍은 사파티스타 해방구 오벤틱 마을의 벽화. '존엄을 위한 여성사무실' 벽화다. ⓒ데인 스트롬
▲ 데인 스트롬이 찍은 오벤틱 마을 벽화. 이곳 주산물인 옥수수로 마스크를 그린 것이 기발하다. ⓒ데인 스트롬

영어도 잘 못하는 종업원이 어딘가에 전화를 하더니 안 된다고 한다. 그 기자가 마을을 방문한 시기가 코로나19 펜데믹 이전이니 그동안 상황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낭패였다. 이 지역은 과테말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마약갱들의 활동 등으로 위험지역이니 여행을 하지 말라는 외무부의 경고에도 어렵게 왔는데, 날벼락이었다. 결국 오벤틱 마을은 가지 못하고, 멕시코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마야 원주민마을 등을 돌아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새벽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 동네를 산책했다. 한 블럭 떨어진 곳에 새벽부터 긴 줄이 서 있었다. 모두 어두운 피부색의 원주민들이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새벽 인력시장 풍경인가 의아해 가까이 가봤다. 그런데 그들이 줄 서 있는 곳은 은행이었다. 왜 새벽부터 은행 앞에서 줄을 서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아보니, 눈물이 나오는 슬픈 이야기였다. 이들은 정부가 원주민 빈곤층에게 주는 얼마 되지 않는 보조금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이었다. 하루에는 주는 인원수가 제한되어 있어 새벽부터 줄을 서 있다고 하니, 처참한 현실이다.

▲ 보조금을 타기 위해 새벽부터 은행 앞에 긴 줄을 선 마야 원주민들 ⓒ손호철

이어진 전통마을 투어도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잘 보여줬다. 가난한 전통마을은 방문객에 마을 입장료까지 징수했다. 한 성당 밖 난간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만취해 졸고 있는 한 원주민이 눈에 띄었다. 미국의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에 갇혀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것이 생각났다. 그의 모습은 성경과 총을 앞세운 백인 침략자들에게 땅과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빼앗기고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원주민들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아 슬펐다. 눈물을 말리기 위해 반대편 하늘을 보자, 거대한 포스터가 보였다. '치아파스 주민들을 지키고 섬기는 신속대응팀'이라는 정부군 선전이었다. 그들이 정말 치아파스 주민들을 지키고 섬기고 있는 것인가?

▲ 대낮부터 만취해 성당 앞에서 졸고 있는 원주민의 모습 ⓒ손호철
▲ 원주민 집에 걸린 전통 옷과 주식인 옥수수 ⓒ손호철

외무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치안은 아주 좋았다. 주목할 것은 미국의 심각한 마약 문제, 이를 둘러싼 멕시코 마약갱들 간의 전쟁, 이에 따른 멕시코 민초들의 빈번한 살상 사태가 NAFTA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마약은 콜롬비아가 주된 공급원이었지만, NAFTA에 의해 멕시코와 미국 간의 물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멕시코는 '미국의 마약공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것은 마약 당국 등이 NAFTA를 시행할 경우 이 같은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경고했지만, 이를 발표하면 NAFTA 인준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클린턴 대통령이 발표를 못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어디 가도 벽화가 많았다. 특히 외부 점령 세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연대의식에서 '트럼프, 지옥이나 가라!', '이스라엘, 엿 먹어라!' 등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대한 벽화가 많았다. EZLN과 팔레스타인을 그린 벽화가 인상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외침이다'라는 사파티스타의 벽화였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 자체를 외면당한 마야 원주민들의 절규다.

▲ 자신들과 팔레스타인의 연대를 표시한 벽화(위)와 '트럼프 엿 먹어라' 벽화 ⓒ손호철
▲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외침이다’라는 사파티스타 벽화 ⓒ손호철

셋째 날, 같이 간 조효래 창원대 교수는 유명한 마야 유적인 팔랑케 관광을 떠났지만, 나와 임영일 미래를 준비하는 노동사회교육원 이사장은 12시간 버스를 탈 자신이 없어 마을의 유명한 박물관인 '나 볼롬(Na Bolom, 마야말로 '제규어의 집'이란 뜻)'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 곳은 거트루드 더비 블룸(Gertrude Duby Blom, 1901~1993)이 남편인 덴마크 인류학자 프란시스 볼룸과 함께 1943년부터 집을 지어 살면서 마야 원주민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보존하려고 노력한 현장이다. 그곳에서 발견한 그의 삶과 업적은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감격적인 것이었다.

▲ 전통 마야 원주민 공동체에 관한 중요한 박물관인 나 볼룸 ⓒ손호철
▲ 나 볼룸에서 원주민과 열대우림 보호를 위해 평생을 바친 거트루드 더비 블룸의 생애를 그린 벽화 ⓒ손호철

스위스 태생의 그는 일찍이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유럽을 돌아다녔는데, 23살에 영국에 머물 때 노동당에 가입했다. 이탈리아에 가서는 외국인으로 반파시즘 투쟁에 참여했다가 투옥됐고 스위스로 추방됐다. 화가 난 아버지는 그를 호적에서 파버렸다. 그는 결혼해 남편의 성(더비)을 얻었지만 곧 이혼했고 독일로 이주했다. 독일에서도 사회주의자노동당에 가입했고 나치에 기소되어 스위스로 추방됐다.

1940년 그녀는 멕시코로 이주했다. 멕시코에서 블룸을 만나 치아파스로 내려와 집을 짓고 같이 살았다. 그녀는 1960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30년 간 원주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이들의 삶의 터전인 열대우림을 보존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1991년 유엔은 그를 '미대륙 최초의 여성 환경주의자'라고 인정했다.

박물관에는 그가 찍었던 원주민 사진들, 수집한 원주민 물품들, 사용한 사진기, 타자기 등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이 박물관의 정점은 아름다운 정원의 벽을 장식한 벽화였다. 오른쪽에는 남편과 함께 이곳을 가꾼 거트루드의 모습을, 왼쪽에는 원주민들과 생활하는 노년의 모습을 그려 놓아, 이를 보는 순간 이 오지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삶에 가슴에 뭉클해져졌다.

▲ 원주민 청년(위)과 벌목을 고발하는 블룸의 사진 ⓒ손호철

최근 멕시코는 2018년 이후 계속 '중도좌파' 정권(안드레 오브라도르와 클라우디아 파르도 정권)이 집권하고 있다. 이들이 집권한 뒤 불평등지수인 지니계수가 2018년 0.426에서 2024년 0.391로 낮아지는 등 멕시코의 불평등은 많이 개선되고 있다(참고로, 소득기준 지니계수는 미국은 0.47이고 한국 0.329, 독일은 0.326이다). 하지만 아직도 멕시코가 심각한 '불평등 사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원주민들의 삶은 비참하기만 하다.

치아파스를 떠나려는 데 갑자기 아얄로에서 본 사파타의 구호 2개가 생각났다. '땅과 자유', '민중을 위한 정의가 없는 한, 정부에게 평화란 없다.' 이들은 지나간 역사 속의 옛 구호가 아니라 원주민 등 수많은 멕시코 민중들의 현재의 절규다. 아니 세계 민중들 현재의 절규다.

"언제 마스크를 벗을 것입니까?" 한 기자가 마르코스에게 물었다.

그가 답했다.

"멕시코가 가면을 벗을 때요."

▲멕시코 최남단 치아파스주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중심가에서 장사 준비를 하는 마야 원주민들 ⓒ손호철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