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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화라니…노동시장이 유연하다 못해 흐물흐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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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화라니…노동시장이 유연하다 못해 흐물흐물해요"

[안진이의 일자리 심층대담]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

우리 사회에 질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데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는 논의는 빈약한 편이다. 기업과 경제연구소와 경제신문은 항상 기업 지원과 규제 완화라는 답을 제시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그런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경제뉴스N시선'의 안진이 the삶 대표가 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3~4개월 동안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다. 다음은 9월 24일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와 대면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1. 통계상으로는 고용률이 높고 실업률은 낮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시민이 체감하는 일자리 상황은 정반대라서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힘들다고들 합니다. 최근 일자리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일할 만한 일자리'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임금 수준이 최저임금의 150% 정도 되는 일자리를 할 만한 일자리로 볼 수 있을 텐데, 그런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청년층이 가장 심각하고, 고령층은 고용률이 높다고 하지만 일주일에 1시간만 취업해도 취업자니까 사실은 불완전한 일자리에 있는 겁니다. 불완전하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시간만큼 일해서 충분한 수입을 올릴 수 없다는 뜻이죠. 또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낮은 편입니다. 여성의 참가율이 결혼하고 임신하고 육아하는 기간에 굉장히 낮아지고 그 후에 금방 회복이 안 되는 U자형 구조, 후진국형 구조예요. 선진국형이 되려면 북유럽 국가들처럼 남녀가 거의 똑같아져야 합니다.

더 넓게 보면 우리나라가 경제 규모에 비해 제조업과 건설업 비중이 큰 편이거든요. 이 두 산업이 중·고 임금 일자리를 많이 제공해요. 공공부문을 제외하면 이쪽이 상대적으로 좋은 일자리인데, 이 두 산업의 비중이 계속 축소되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사회서비스 같은 다른 부문에서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사회서비스 일자리가 항상 최저임금에 묶여 있으니까 모든 연령층에 할 만한 일자리를 제공할 여력이 계속 떨어져요. 이제 우리 고용 문제의 총체적인 그림입니다.

2.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가 어떤지,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노동시장에서 임금 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이 37% 정도입니다. 임금 수준은 정규직의 절반이 안 되는 일자리고요. 여기에 더해서 '가짜 3.3'이라 불리는, 자영업자로 위장된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가 많게 잡으면 800만 명까지도 잡혀요. 이분들은 비임금 근로자로 분류되지요.

그러니까 임금 근로자 내 37%의 비정규직과 불안정한 비임금 근로자를 합쳐보면, 취업자의 절반 이상이 불안정한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임금도 낮고 고용안정성도 낮아요. 이런 구조를 '이중구조'로 표현하기도 하고 '노동시장의 양극화'로도 표현하는데, 정확한 용어로는 '분단(분절) 노동시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자본의 의도적인 전략이 숨겨져 있지요. 직접고용하는 기간제나 계약직을 넘어 하청과 외주화를 대폭 늘렸어요. 외주화의 다른 형태가 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만들어 버리는 건데, 이 가짜 3.3 노동자들은 사실 임금 노동자와 비슷하게 종속적인 위치에 있어요. 경제적으로도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있고, 지휘·명령을 받는다는 측면에서도 종속되어 있죠. 인적 종속성과 조직적 종속성이 다 있는데도 임금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업소득세를 납부하게 됩니다.

이렇게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비임금 근로자들은 정확하게 통계가 안 잡힐 정도로 숨겨져 있어요. 노동력을 활용하려면 노동자를 고용해야 한다는 책임성마저도 회피하는 전략을 쓴 겁니다. 그래서 노동시장이 질적으로도 심각하고 양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이 되었죠.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 ⓒ안진이

3. 어떻게 보면 노동시장이 2중 구조가 아니라 3중, 4중… 굉장히 복잡한 구조인 것 같습니다. 이 비임금 노동자들이 가장 취약한 위치일 텐데, 최근에는 법제도를 통한 해결책도 제시되고 있는 것 같아요.

예. 처음에는 직접고용 비정규직이 문제로 떠올랐는데, 여기서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문제로 갔다가 사용자 책임까지도 외면하는 방식의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비중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거죠. 4차 산업혁명이니 플랫폼 경제니 하면서 외양은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사실은 임금 노동자를 고용해야 한다는 책임성마저도 배제하는 방식입니다.

노란봉투법은 이분들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한 건 아니고, 노동조합을 만들어도 원청과 교섭이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간접고용인 하청 노동자들 입장에서 보면 하청 사용자는 아무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원청 사용자는 만날 수도 없으니, 임금을 한 푼이라도 올리려면 원청 본사 로비를 점거한다든가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건 다 불법으로 치부하죠. 노란봉투법이 제정되어 이제 교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실제로 교섭이 이뤄질지는 아직 장담 못 하는 상태입니다. 사실은 국제 기준으로 보면 산업 민주주의의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한 입법인데, 기업과 사용자 단체들은 그것조차도 용납 못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과도한 불만이죠.

또 비임금 노동자로 분류된 사업소득자지만 사실은 종속적인 임금 노동자와 동일한 속성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입니다. 산재·고용보험을 조금씩 적용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고, 보험료를 고스란히 자기가 부담해야 하니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의 사각지대에 있게 됩니다. 이분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 기본법(일터 권리보장 기본법) 같은 법을 제정해서 조금씩 조금씩 보호를 확장하겠다고 하는데, 사실 정면 돌파는 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분들을 노조법상, 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하는 게 핵심입니다.

4. 청년층 고용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첫 취업까지 걸리는 기간도 길어졌고 취업했다가 비경제활동 인구로 빠지는 경우도 많은데, 청년층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요인이 무엇일까요?

쉬었음 인구로 빠진 청년이 50만을 넘었다고 '눈높이가 높다'느니 '비어 있는 일자리가 있는데 왜 안 가느냐'느니 하는데, 사실은 구직 활동을 해도 할 만한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여건이 안 좋은 일자리를 전전하고 시간 보내는 게 훨씬 낭비라고 생각하는 거죠.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전망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고요. 할 만한 일자리에 종사해야 그런 미래를 설계할 수 있잖아요. 현재 생존이 가능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또 미래 설계도 가능한 수준의 일자리가 적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에요. 시장과 기업에 맡겨 놓는 방식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죠.

IMF 사태 이후에 커다란 청년 고용 대책이 7번 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매번 훈련, 인턴… 여기서 벗어나질 못해요. 일자리로 들어가는 문 자체를 넓혀줘야 되는데 그건 안 되니 훈련과 인턴을 전전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죠. 또 하나는 기업에 지원금을 주면서 청년 고용을 유도하는 방식인데,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거기서 한 발짝 나간 제도가 청년수당이나 내일채움공제처럼 당사자인 청년에게 직접 수당을 지급하는 겁니다.

제가 전부터 강조했던 정책은 90년대 유럽에서 채택했던 로제타 플랜이라는 청년 고용대책입니다. 훈련이나 인턴, 기업 지원은 똑같이 있지만 의무고용제가 있어요. 기업에 지원금만 주는 게 아니라 청년 고용 할당량을 못 채우면 지원금의 3배 정도 되는 벌과금을 징수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의 강력한 의무고용제를 100인 이상 기업에 다 적용하고, 기업 규모에 따라 청년을 3% 또는 5%까지 고용하도록 차등을 뒀어요.

만약 한국에서 이렇게 기업에 벌과금을 부과하기 힘들다면, 청년 고용공시제를 잘 만들어서 기업의 사회책임성 지표 중 하나로 공표하게 하자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유인책만 써서는 안 되고 견인책이 있어야 해요. 지금까지 하던 패턴으로는 청년 고용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기가 힘들다고 봅니다.

5. 지금 청년층만 힘든 것이 아니고, 중장년과 고령층도 일자리 문제로 정말 힘들어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4050 중장년이 임금 수준도 가장 높은 연령대인데 건설업이나 제조업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고 있어요. 그래서 중장년도 위험 신호가 가끔 나타나죠. 불경기가 오래 가면 주된 일자리에 종사하는 중장년층 고용에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고령층은 고용률이 높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령층 고용률이 굉장히 높은 편인데, 사실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일자리가 너무 많아요. 80% 정도가 불안정 일자리에 종사합니다. 그래서 노후 소득빈곤 문제가 심각해요.

지금의 고령층은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고 숙련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지만, 지금 새로 고령층이 되는 분들은 굉장히 숙련도가 높고 학력과 경험도 많아요. 그분들이 갈 만한 일자리가 안 만들어지기 때문에, 역량에 비해 낮은 일자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보니 연금이 충분하지 않으면 소득 빈곤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 우리가 경제 규모나 인구 규모에 비해 좋은 일자리가 많이 없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령층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정년 연장입니다. 2013년에 58세에서 60세로 정년을 연장했어요. 그랬더니 주된 일자리, 즉 자기가 가장 오래 근무했고 생계에 가장 도움이 됐던 일자리에 종사하는 기간이 늘어났어요. 대기업과 공공부문만이 아니고 중소기업에도 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중소기업은 인력난 때문에 자발적으로 정년을 늘리기도 하죠. 법정 정년연장이야말로 주된 일자리에 종사하는 기간을 늘리는 핵심적인 장치입니다.

그렇다고 일률적으로 임금을 깎아버리면서 정년 연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2033년까지 65세로 늦춰지잖아요. 지금도 63세로 되어 있는데 법적 정년은 60세입니다. 이 불일치는 노후 소득 빈곤을 제도로 공식화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2033년까지 정년도 65세로 연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처럼 기업에게 선택권을 줘서 임금을 깎아서 재고용하도록 하는 방식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노후 소득 빈곤 문제를 해결 못 해요.

▲9월 30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2025 관광 일자리 페스타'에서 구직자들이 채용공고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6. 일자리와 관련된 역대 정권의 정책 중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기억에 남는 거라기보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일자리 200만 개'처럼 수치가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르고요.

이명박 정부는 더 나아가서 300만 개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인턴 자리를 잔뜩 만들어서 인턴 공화국이었죠. 인턴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와서 인턴 일부를 정규직으로 채용하게 했어요. 그랬더니 유력자들이 로비를 시작해서 자기 자녀를 인턴으로 보내고 정규직 전환 TO에 집어넣은 거죠. 그래서 지금은 채용 예정형 인턴이 등장했잖아요. 어차피 정규직으로 뽑아야 할 인원을 수습 기간만 늘리는 경우도 많아요. 인턴을 많이 뽑고 정규직 전환은 일부밖에 안 되는데 과연 이걸 좋은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는 '반듯한 시간제'라는 용어를 썼어요. 고용률 70%라는 목표를 잡고 여성을 겨냥한 정책을 내놓은 거죠. 반듯한 시간제란 일하는 시간은 절반인데 정규직으로 뽑는 상용형 시간제 일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규직하고 똑같은 시간 일하면서 임금은 절반밖에 못 받는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나라잖아요. 그런 데서 시간만 절반으로 줄인 일자리가 통하겠느냐는 이야기를 제가 했죠. 공공부문에서 시간선택제 공무원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무원 임금이 높지 않은데 그 절반을 받으니 생계 해결이 안 되죠. 그러니까 시간선택제 공무원의 근로시간을 자꾸 늘려줘서 아마 주당 35시간까지 늘렸을 거예요. 실패한 정책이 된 거죠.

7. 유럽에서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이 시간제로 많이 일하는데, 그럼 그건 임금이 낮지 않아서 가능한 건가요?

그럴 수 있죠. 일정한 임금 수준이 되느냐가 문제인데, 한국에서 시간제라는 건 생계 보조형 노동밖에 안 됩니다. 시간제로 일해도 어느 정도 생활은 가능한 수준의 임금이 되는 나라에서는 시간제로 일하면서 만족하는 사람이 많죠. 네덜란드가 사실 시간제 천국인데, 시간제가 60% 가까이 되고 여성이 대부분이에요. 사실은 성차별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거죠. 왜 그런가 했더니 네덜란드가 낙농 국가로 남성이 가장인 모형에 가까웠고 오래 전부터 여성 노동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네덜란드의 사회보장제도는 완벽하다고 칭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은 네덜란드 사람들도 불만이 있어요. 그 사람들도 비자발적으로 시간제 일을 하는 경우가 절반이에요. 그러니까 온전한 일자리를 못 찾아서 시간제를 선택하는 거죠. 그렇게 보호 체계가 잘 갖춰진 나라도 비자발적 시간제 비중이 50%인데 우리나라에서 통계 내면 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을 선택했다는 비율이 50%를 넘어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이거는 질문을 잘못한 거다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죠.

8. 대통령이 재벌을 만나서 일자리 늘려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을 매번 봤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혜택을 주면서 일자리 창출을 부탁했고요.

정권 초기에 매번 그런 일이 벌어졌죠. 문재인 정부도 그랬고 노무현 정부도 그랬고 지금 이재명 정부가 또 그러고 있는데, 그렇게 기업들의 선의에 기대서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건 아닙니다.

정부가 재벌 기업들에 강도 높게 요구했던 적도 있는데, (재벌들은) 겉으로만 일자리 늘리는 척하고 실제로는 똑같았어요. 기업이 더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끌어내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 선의에 호소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죠.

일자리는 기업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만드는 거라는 발상이 필요해요. 트럼프 집권 이후 약간 주춤하고는 있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속가능경영을 의미하는 ESG가 세계적인 흐름이잖아요. 그런 사회 책임성 지표와 일자리 문제를 연동시켜 매년 공표하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단순히 청년 신규채용만 따지는 게 아니고, 간접고용 비정규직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전환하는 것도 가점을 주는 식으로 고용의 질과 양에 대한 평가를 같이 하자는 거죠. 여성, 청년, 고령자, 질 나쁜 일자리의 전환을 두루두루 평가하는 겁니다. 만약 정년 연장을 해서 고령자를 채용했는데 청년 신규채용을 줄였다? 그럼 마이너스가 되어야 합니다.

고용공시제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 '소속외 근로자'로만 표현되어 있어서 너무 단순하긴 해요. 문재인 정부 때 임금 직무 공시제까지 만들었는데 제대로 활용하지는 않고 있어요. 여기에 착안해서 일자리의 양과 질 개선의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면 되는데, 지금 안 하고 있어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해요.

9. 지금 있는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바꾸는 것도 중요한 일인데요. 이재명 정부 공약에도 공공부문에서 정부가 모범 사용자 역할을 하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공공부문에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일자리 창출도 필요하고, 유지도 해야 하고, 전환도 필요하죠. 일자리를 억지로 만들려고 이상한 숫자만 내세우는 것보다 질 좋은 일자리로의 전환이 더 중요할 수도 있어요. 질 좋은 일자리로의 전환에서 초점은 최저임금의 150% 정도를 지급하면서 고용 안정성이 어느 정도는 확보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일자리를 만들기에 제일 좋은 분야가 사회 공공 서비스입니다. 사회서비스 영역은 수요가 계속 늘어나는데 최저임금 일자리만 생겨나고 있잖아요. 민간위탁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서비스의 일자리를 안정적인 공공부문 일자리로 바꾸는 정책이 필요해요. 이 분야는 계속 수요가 늘어나니까요.

공공부문 사회서비스를 처음 구축할 때 돈을 적게 들이려고 민간 위탁 방식을 주로 선택했어요. 새로 늘어나는 수요도 다 민간위탁으로 넘기고요. 병원이나 돌봄 영역의 90% 이상이 민간위탁이니, 지금 이쪽을 공공 서비스로 전환하려고 해도 업자들의 저항이 심하고 지역 유착관계도 있어서 쉽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신규 수요라도 공공부문이 감당하면서 적극적으로 서비스 질도 높이고 질 좋은 일자리도 늘리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공공요양원에 가보면 시설이 좋고 환자들을 돈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운영도 훨씬 낫습니다. 지금 민간위탁 요양원은 대부분 돌아가시기 전에 생존만 시켜주는 수준이잖아요. 이런 식으로 공공 서비스의 질을 높이려면 공공부문이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공적 돌봄 시설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의료 영역도 심각하니 공공병원을 늘려야 해요. 그러자면 돈이 들죠. 정부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면 바로 재정적자 같은 반론이 나오는데, 재정으로 감당 가능한지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만 일자리 측면에서는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10. 이재명 대통령이 고용의 유연성 또는 노동시장 유연성을 자주 언급하는데, 이 '유연성'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도 각기 다른 것 같고 앞으로 의견 충돌도 예상됩니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고용 측면의 규제 완화를 강조할 때 노동시장에서의 유연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유연성이라고 하면 좋은 말 같잖아요. 신자유주의의 모티브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단어가 IMF 이후에 한국에도 들어와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던 겁니다.

미국과 영국의 노동시장이 유연하고, 그래서 경직적인 유럽 대륙 국가들보다 노동시장 지표가 좋고 실업률이 낮다고 했거든요. 실제로 유럽의 실업률은 높죠. 적극적인 보호 장치가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실업자임을 적극적으로 선언해서 높은 겁니다. 우리는 가려져 있어요. 내가 실업자라고 선언해 봤자 효과가 별로 없으니까 실업자라는 걸 숨기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실업률이 낮게 나와요. 미국의 실업률이 낮다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옥에 갇힌 사람들만 합쳐도 수치가 달라진다는 소리도 나왔죠. 결코 경직된 노동시장이 성적표가 나쁜 게 아니고 유연한 노동시장의 성적표가 좋은 게 아닙니다.

또 하나, 유연안정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잖아요. 유연성과 안정성을 결합한다. 네덜란드와 덴마크가 유연안정성 모델이라고 하는데, 두 나라가 같지 않아요. 네덜란드는 노동시장 안에서 유연성과 안정성을 결합하는 모델입니다. 시간제가 많지만, 보호장치를 같이 가동시키는 거죠. 덴마크 모델은 달라요. 안정성은 복지제도에서 구축되는 거고 노동시장은 유연하다고 하지만 집단적 정리해고는 굉장히 강력하게 제재합니다. 개별적 해고는 자유롭지만 유럽의 풍토에서 자의적으로 사람을 막 자르지는 않지요.

덴마크 모델에서 '안정성'에 해당하는 복지제도를 보면, 실업급여가 2년 동안 지급되고 그 이후에도 사회부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유연성을 가미한 게 뭔지 아세요? 1년 이상 실업 상태인 사람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구직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붙인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메커니즘은 안정성이 하나도 없잖아요. 복지제도의 기반이 약한데 이런 나라에서 노동시장 유연성까지 높이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대통령과 정치권이) 무슨 맥락으로 유연안정성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지, 고민은 있는지 의문입니다.

정말로 한국형 유연안정성을 구축하고 싶다면 질 좋은 일자리를 대규모로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추진해야겠죠. 옮겨갈 곳이 있어야 하잖아요. 유럽은 수평 이동할 곳이 많은 편이지만 우리는 수평 이동할 곳이 없잖아요. 해고는 살인이라고 표현되는 나라인데. 만약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수평 이동할 곳이 많을 정도로 일자리가 평준화되어 있고 도처에 있다면 (노동시장이) 유연해져도 견딜 수 있겠죠.

우리 노동시장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도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비정규직이 많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고 또 새롭게 비임금 종속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는 나라에서 도대체 뭐가 경직돼 있다는 건지. 조직화된 노동자가 일부 대기업과 공공부문에 집중된 것은 맞습니다. 그걸 해결하고 싶으면 기업별 노조 체계를 깨고 포괄적 협약이 산업 전반에 적용되도록 바꿔야죠. 조직화된 노동자를 공격할 게 아니라 교섭의 적용 범위를 넓혀서 미조직 노동자도 보호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처럼 노동시장이 경직되어 있다고만 이야기하는 건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 노동마저 약화시키고 싶은 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우리 노동시장은 결코 경직적이지 않다, 흐물흐물할 정도로 너무 유연해서 문제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9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양대노총 위원장과의 오찬 간담회를 하며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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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이

안진이 the삶 대표는 '더 나은 일과 삶'을 위해 플랫폼 기업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노동 현장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김헌동의 부동산 대폭로>, <톡 까놓고 이야기하는 노동>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the삶 공식 뉴스레터(33레터) 구독 링크 https://the3together.ghost.io/#/portal/sign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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