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여성에게 허락된 하늘 구경이란 기껏해야 무도회장 천장화의 천사들이나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 글로스터셔 주 서린세스터의 어느 포도주 장사 딸은 맨눈으로 태양을 응시했다. 미쳤나 싶겠지만,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해에 검은 점이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 브라운(1830-1899)은 귀족 규수에 가정교사까지 딸린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아버지 토마스 브라운이 낮에는 술 팔고 밤에는 별 보는 기인이었던 덕에, 딸은 스스로 책을 뒤적이며 과학을 배웠다. 당시 영국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한 교양이란 피아노 서너 곡, 수채화 솜씨, 그리고 적당히 시를 읊조릴 줄 아는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와 함께 날씨를 기록하고 태양 흑점을 관찰했다. 영국 신사들이 보기엔 참으로 '부적절한' 취미였다.
왕립학회가 못 들어가게 막으면, 새로 만들면 되지
19세기 영국 천문학계의 속사정은 이랬다. 왕립 천문학회(Royal Astronomical Society)는 남성전용 클럽이었다. 여성은 논문을 발표할 수도, 회원이 될 수도 없었다. 물론 여성들이 관측 자체를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 관측결과가 남편이나 오빠 이름으로 발표되곤 했다. 실로 '유령노동자'의 천문학 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1858년부터 꼼꼼하게 태양 흑점을 관측했다. 40년 가까이. 매일매일. 구름 낀 날이면 속을 태웠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귀중한 관측자료를 발표할 곳이 없다는 것. 왕립 천문학회는 여자라고 문전박대했고, 그렇다고 살롱에서 "오늘 흑점이 참 아름답더라"고 수다 떨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880년대가 되자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이 양반들이 문을 안 열어주면, 새 문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녀의 추진력과 열정은 1890년 영국 천문학 협회(British Astronomical Association) 창립으로 이어졌다. 왕립 천문학회가 전문가와 귀족들의 놀이터였다면, 이 새 단체는 아마추어든 전문가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창립회원이 되었고, 즉시 태양관측 부문책임자로 임명되었다. 60세의 나이에 말이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이런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그녀의 관측실력이 논쟁의 여지 없이 탁월했다는 증거다. 능력 앞에서 편견이 고개를 숙인 드문 순간이었다.
기상학회는 좀 개념이 있었다
다행히 왕립 기상학회(Royal Meteorological Society)는 천문학회보다는 진보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이 학회의 정회원이 되었다. 당시 여성이 과학학회 정회원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유리천장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린 것과 맞먹는 사건이었다. 물론 학회 안에서도 "여자가 왜 여기 있나" 하는 시선이 있었을 테지만, 그녀의 수십 년간 쌓인 기상관측 자료는 그 어떤 반론도 잠재웠을 것이다.
개기일식을 보러 간 여자
1896년, 엘리자베스는 66세의 나이로 노르웨이까지 가서 개기일식을 관측했다. 당시 노르웨이 여행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상상해보라. 기차, 배, 마차를 갈아타고, 호텔도 제대로 없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오직 몇 분간의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이게 바로 진정한 '마니아'의 면모다.
그녀가 일식 관측을 간 것은 단순한 구경이 아니었다. 일식 때만 볼 수 있는 태양의 코로나와 홍염을 관측하고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많은 남성 천문학자들도 이런 원정 관측에 나섰지만, 60대 여성이 이런 고생을 자처한다는 것은 여전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 역사에 뭘 남겼나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40년 가까이 쌓아온 태양 흑점 관측 자료는 태양 활동주기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녀의 기록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태양 활동을 연구하는 데 참고 되고 있다.
둘째, 영국 천문학 협회 창립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 단체는 오늘날까지도 활동하며 전문가와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여성과 비전문가들에게 천문학의 문을 연 것, 이것이 그녀의 가장 큰 유산이다.
셋째, 여성도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는 여성이 대학에 가는 것조차 논쟁거리였던 때다. 옥스퍼드 대학교가 여성에게 학위를 주기 시작한 게 1920년, 캠브리지 대학교는 아예 1948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시대에 학위도 없이, 제도적 지원도 없이, 순전히 자신의 열정과 실력만으로 과학계에 이름을 남겼다.
잊힌 이름, 되살려야 할 이유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1899년 3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사망 기사는 주요 천문학 잡지들에 실렸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녀의 이름은 점점 잊혀졌다. 아이작 뉴턴(1643-1727)이나 에드먼드 핼리(1656-1742) 같은 거물들 뒤에서, 귀족 출신도 아니고 대학 교수도 아닌 여성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과학사에서 그녀 같은 인물들이야말로 중요하다. 화려한 발견보다는, 꾸준한 관측. 제도권의 인정보다는, 순수한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문이 없으면 만들어버리는 실천력.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단지 '여성 천문학자'가 아니다. 그녀는 불공정한 제도에 맞서 자신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이자, 과학이 특권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민중과학자였다. 포도주 장사 딸이 해에 난 점을 세며 역사를 바꿨다. 풀뿌리 민중의 힘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참고: 영국 왕립 천문학회는 19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성회원을 받아들였다. 엘리자베스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 뒤의 일이다.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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