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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시민건강논평] OECD 중 상대적 빈곤 9위·노인 빈곤 1위, 바꾸려면

10월 17일은 빈곤철폐의 날이다. 1992년 유엔이 이 날을 기념일(세계 빈곤퇴치의 날)로 지정한 이후, 한국에서는 2005년부터 '1017 빈곤철폐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하여 반빈곤 운동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빈곤철폐'의 날을 언제 맞이할 수 있을지 좀처럼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2023년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4.9%로 OECD 회원국(평균 11.5%) 중 9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특히 66세 이상 고령층에서는 39.8%로 가장 높다. 노인 빈곤만 문제가 아니다. '기초생활수급자 일반 현황'(2024년)에 따르면, 20·30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약 25만명으로 2015년(16만명) 대비 59% 증가했다. 이제는 청년층 빈곤 역시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부 보수 언론은 10년 이상 장기 수급가구가 증가한 것을 문제 삼으며, 이를 제도에 안주하는 탈수급 의지 부족으로 해석하는 낡은 편견을 드러냈다. 노인 빈곤율이 높은 것은 공적 이전소득이 적기 때문이고, 청년들이 가난해지는 것은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주거비와 교육비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빈곤을 양산하는 이런 구조적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수급자 수가 늘고 수급 기간이 장기화되는 것은 불가피한 귀결에 가깝다.

오히려 불평등이 심화되는 지금 상황에서는 최후의 사회안전망인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외연을 넓히고 내실을 다질 필요가 있다.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절대적 빈곤의 해악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을 계기로 제도를 개편(맞춤형 급여)하고 위기가구 발굴 시스템을 도입한 지 10년이 흘렀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 삶을 마감하는 '죽음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8월 대통령은 복지 신청주의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자동 지급제 전환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복지 지출을 억제하려는 정책 기조와 그에 따른 엄격한 수급 조건, 신청자에게 입증 책임을 떠넘기는 선별주의에 있다. 이런 핵심 문제를 건드리지 않은 채 'AI 기반 자동지급제'만 도입한다면 복지 사각지대 문제는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 부정·중복 수급을 막겠다며 '행복e음(사회복지통합관리망)'을 도입한 뒤 많은 이들이 수급 자격을 상실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중 상당수가 가난하지만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권을 잃은 경우였다. 얼마 전 내한한 필립 알스톤 전 유엔 빈곤·인권 특별보고관이 지적했듯이, 빅테크 기업이 주도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복지 시스템은 부정수급 방지, 비용절감을 우선 목표로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

정말로 빈곤사를 막기 원한다면 '돈(재정)'으로 이를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대선 공약이었던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가 국정과제에서 "의료급여 부양비(부양의무자 소득 중 일부를 수급자의 생활비로 간주하는 것) 폐지"와 "부양의무자 기준 간소화"로 후퇴한 것만 보더라도 정치적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AI라고 해서 협소한 제도적 관문 때문에 사각지대로 밀려난 이들을 구제할 묘책이 있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추진되는 복지 시스템의 'AI화'는 수급 자격 판정의 오류 가능성 문제를 넘어 빈곤층을 촘촘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디지털 구빈원'을 전면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한 추론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렇듯 정치적 문제를 기술적 문제로, 빈곤 문제를 복지 제도의 문제로 축소·환원하는 접근 방식에 담긴 정치적 의도(효과)를 국가 통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빈곤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지만, 시대마다 그 원인과 양상은 달라져 왔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빈곤은 불평등 체제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물론 빈곤은 다차원적 개념으로 불평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있지만, 경제적 소득만 놓고 봤을 때 빈곤은 결코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획기적인 자원의 재배분을 통해 모든 사람을 빈곤선 위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빈곤은 국가 통치 프로젝트에 따라 양산되는 것이라고 하는 '비판적 빈곤연구'의 주장에 주목한다. 바로 불평등 체제를 유지하는 데 빈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빈곤(화)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자본의 착취를 정당화하며 체제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동시에 국가는 진보(발전)의 서사를 부정하는 빈곤을 어떻게든 은폐하고 탈정치화할 필요가 있기에 빈곤을 도덕화, 범죄화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빈곤철폐가 아닌 빈곤완화를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빈곤을 '관리'한다.

빈곤이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지 못하는 현실은 이러한 빈곤 통치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민중 운동이 활발했을 때 빈곤이 한국 사회 일반의 문제로 호명되던 시기도 있었지만, 빠른 경제 성장 속에서 빈곤 문제 역시 빠르게 잊혀 갔다. 절대적 빈곤층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빈곤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말이다.

반빈곤 운동과 담론이 시민 다수의 마음에 파고 들기 위해서는 빈곤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하는 사회적 인식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학자 조문영의 제안처럼, 각자 어떤 형태로든 빈곤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인식과 감각을 형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거리 미관과 교통 체증 등을 이유로 노점상 철거를 지지한다면, 집값 상승을 위해 전세사기 피해자를 양산하는 투기 중심 부동산 정책을 묵인한다면 빈곤을 양산하는 체제의 공모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확산시키는 일이 그 일환이다.

빈곤을 계급, 젠더, 인종, 장애, 국적, 지역 등이 교차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빈곤에 대한 협소한 인식의 틀을 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물질적 차이를 무시하는 식으로 빈곤을 상대화하는 것에 경계해야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권력관계의 역동 속에서 나 역시 언제든 구조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지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수도권 집값 상승으로 비수도권 지역 주민이 상대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을 지역 간 권력관계 문제로 설명하는 것이 그 쉬운 예일 것이다.

로슨과 엘우드는 <관계적 빈곤 정치>(2018)에서 "상상할 수 있는 정치(thinkable politics)"와 "상상할 수 없는 정치(unthinkable politics)"를 구분한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전자는 복지급여 인상이나 자활사업 개선 등 기존 주류 담론이 허용하는 제도권 내 정치적 활동을 의미한다. 반면 후자는 빈곤을 낳는 '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정치적 기획과 실천, 바로 헤게모니적 상식 밖에 존재하는 급진적 정치를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두 정치 다 필요하지만, 빈곤철폐가 비빈곤 시민들이 경험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관계적 상상의 토대에서 새롭게 빚어내는 변혁적 정치가 보다 유용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실천에 중점을 두든, 이번주 토요일 "불평등 세상, 공공성으로 뒤집자!"는 슬로건으로 열리는 빈곤철폐의 날 행진에 우리 모두 참여하고 연대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시민건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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