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의 취지는 글로보(Glovo)가 근로계약의 존재를 반증할 만큼 충분한 사실을 제시했는지 대법원이 판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관계를 검토한 결과, 대법원은 글로보가 반대 사실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았고, 따라서 회사와 해당 배달 라이더 사이에 근로관계가 존재함을 인정했다.
(O recurso pretendia que o STJ decidisse se a Glovo apresentava factos suficientes para refutar a existência de contrato de trabalho. Depois de analisar os factos, o STJ entendeu que a Glovo não logrou provar o contrário e, por isso, reconheceu a existência de uma relação de trabalho entre a empresa e o estafeta em questão)"
지난 5월 28일, 포르투갈 대법원이 "글로보(Glovo)와 배달 라이더 사이에 고용관계가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발표한 보도자료다. 대법관 만장일치, 즉 모든 대법관이 고용관계 성립을 인정한 최종 판결이며, 출발은 포르투갈 검찰이 글로보를 제소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검찰은 왜 포르투갈 배달업계 1, 2위를 다투는 플랫폼기업을 제소한 것일까.
유럽연합 입법지침과 '고용관계 추정 제도'
해답은 2023년 5월 1일자로 시행된 개정 포르투갈 노동법에 있다. '플랫폼노동의 고용관계 추정 규정(노동법 제12-A조)'이 도입된 것이다. 이보다 3개월 앞서 유럽연합(EU)은 '플랫폼노동 입법지침'을 의결했는데, 회원국 모두 플랫폼노동에 대한 고용관계 추정제도를 각국 노동법에 도입하도록 지침 내용에 담았다. 포르투갈은 EU 지침에 따라 법을 개정한 것이다.
여기서 좀 생소하게 느껴지는 '고용관계 추정 제도'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간단하게 개요를 정리하자면 ⒜기존 고용관계(노동자성) 개념을 확장하기 위해 ⒝일정 기준을 정해서 이 기준을 충족하면 고용관계 존재를 추정하고, ⒞만일 이 추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반증에 성공할 경우에만 고용관계가 부정되도록 한 제도이다. (아래 그림)

'입증책임 전환' : 플랫폼기업이 반증하라
이 제도를 쉽게 설명하려면 한국과 비교하는 게 빠르다. 한국의 경우 '근로자' 개념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근로기준법 제2조 1호)으로 정의되어 있어서, 문구만 보면 노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포함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원에서 수십 가지 지표와 기준을 만들어 이를 대부분 충족해야만 고용관계 또는 근로자(노동자)로 인정된다. 게다가 그 수십 가지 기준 충족 여부를 입증할 책임은 모조리 근로자(노동자)의 몫이다. 노동자가 직접 수십 가지 증거를 모아 제시해야만 한다.
'고용관계 추정 제도'는 이 뒤틀린 방식을 완전히 거꾸로 세운다. 기준 충족 여부를 노동자가 입증할 필요가 없다. 사용자측인 플랫폼기업이 이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반증)해야 한다. 사용자측 반증이 없으면 고용관계는 그대로 확정, 반증에 실패해도 고용관계가 확정된다. 사용자가 반증에 성공한 경우에만 노동자성이 부정된다.
고용관계 추정 위한 6개의 기준 설정
그럼 고용관계 추정 제도가 실제 적용된 포르투갈 사례를 보자. 우선 2023년에 개정된 노동법에서 플랫폼노동 고용관계 추정을 위한 기준은 6가지로 명시되었다. (아래 표) 이 6가지 기준 중 2가지 이상만 만족하면 고용관계를 추정하도록 하였다.

새로 도입된 법률과 제도에 따라 포르투갈 검찰청은 배달 플랫폼 글로보를 상대로 "배달 라이더가 직원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글로보는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해 고용관계 추정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다.
1심 법원과 리스본 항소법원은 고용관계를 시사하는 법적 지표들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글로보 플랫폼이 고용관계 추정을 뒤집기에 충분한 반박 증거를 제시했다고 판단했다. 검찰청은 곧바로 이의를 제기하며 대법원에 상고를 하게 된 것이다.
6개 중 2개 이상 충족하면 고용관계 추정
대법원 심리에서 핵심 쟁점은 글로보가 고용관계 추정을 성공적으로 반증했는지 여부였다. 반증에 성공하면 배달 라이더는 고용관계가 부정되며 프리랜서로 확정된다. 하지만 대법원은 플랫폼기업과 라이더 사이 고용관계가 존재한다고 판결했으며, 다음과 같은 요인을 강조했다.
▲ 조직 : 대법원은 배달 라이더들이 글로보의 '알고리즘 조직에 강하게 통합'되어 있다고 지적. 글로보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플랫폼과 앱은 고객과 라이더를 연결하는 조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업무 도구'로 볼 수 있다는 것.
▲ 업무지휘 : 대법원은 글로보가 배달 라이더 행동과 업무 수행에 관한 구체적인 규칙을 정하고 지휘권을 행사한다고 판단. 이는 사전에 정의된 약관과 절차 등에서 확인됨. (예 : 고객이 부재중일 경우 10분간 의무적으로 기다린 후 앱을 통해 보고해야 하는 절차 등)
▲ 통제 : 대법원은 글로보가 '전자적 수단 또는 알고리즘 관리를 통해 실시간으로 업무 수행을 통제하고 감독한다'고 강조했음. 이러한 판단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음.
- 배달원의 위치를 추적하는 GPS 사용, 이는 '업무 수행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됨.
- 배달 시간과 경로의 모니터링.
- 업무 품질을 확인하기 위한 고객 평점 시스템("sistema de reputação").
- 계정을 일시 또는 영구 정지할 수 있는 권한, 이를 대법원은 징계권의 일종으로 분류함.
대법원은 포르투갈 노동법이 정한 6개의 기준 중 5개를 충족시켰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럼 충족시키지 못한 기준 1개는 뭘까? 4번째 기준인 '업무수행시간에 대한 선택 등 자율성' 부분이었다. 이 기준에 대해서만큼은 글로보의 반박이 설득력 있다고 인정한 것. 하지만 6가지 중 2가지만 충족하면 되기에 고용관계 존재를 확정한 것이다.
어? 그럼 6번째 기준인 업무 장비·도구 소유도 인정했다는 말인데, 포르투갈에선 오토바이와 휴대폰을 배달 플랫폼이 임대해주는 걸까? 아니다. 대법원은 라이더가 사용하는 '절대적으로 필수적' 업무 도구가 글로보의 '플랫폼과 애플리케이션'이라고 적시했다. 앱을 만들고 운영하는 절대적 권한이 글로보에 있으니 업무 장비·도구를 플랫폼이 소유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재명의 '노동자 추정제' 디테일이 없다
'노동자 추정제' 도입은 지난 대선 이재명 대통령 공약으로 출발해서 얼마 전에 확정된 새 정부 123대 국정과제에도 포함되었다. 노동자성과 고용관계를 은폐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꼼수가 최첨단을 달리며 '비임금 노동자'가 무려 862만 명에 달하는 시대에, 노동자 추정제를 도입하겠다는 방향은 잘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사이드경제>는 나름 관심을 갖고 새 정부가 이 제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추적해 왔다. 노동위원회 산하에 '근로자성판단위원회' 설치, 입증책임 사용자에게 전환 등의 아이디어가 국정기획위 단계에서 나온 것으로 알지만, 추정 제도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노동자성(고용관계) 확장을 위한 기준 설정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다.
만일 새로운 기준 도입 없이 노동자 추정제만 실시한다면, 결국 노동자성 판단의 기준은 대법원 판례가 될 수밖에 없다. 판례대로만 판단한다면 지금의 제도와 달라질 것이 없다. 이런 조건에서는 입증책임 전환도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사용자들은 노동자성을 지울 목적으로 도급계약서·프리랜서계약서·서약서 등 수많은 입증자료를 미리 쌓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포르투갈의 '배민 라이더'
스페인·포르투갈의 배달 플랫폼 선두를 달리는 글로보는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eliveryHero)의 자회사이다. 한국 배달업계 부동의 1위 '배달의민족'이 딜리버리히어로 자회사임을 감안하면, 글로보는 스페인·포르투갈의 배달의민족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의 경우 2021년에 이미 '라이더법'을 제정해 배달 라이더와 플랫폼 사이 고용관계를 추정하는 제도가 일찌감치 도입되었다. 배달 플랫폼기업들이 초반에 상당히 저항했지만 이제는 정착단계에 들어섰다. 올해 7월 1일자로 글로보는 스페인에서 라이더와의 프리랜서 계약을 완전히 종결하고 모두 근로계약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던 차에 포르투갈 대법원 판결이 나왔으니, 스페인·포르투갈의 배민 라이더는 모두 '노동자'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어떠한가? "업무 수행시간을 라이더가 자율적으로 결정한다"는 주장 하나만으로 노동자성이 부정된다. 포르투갈 대법원은 그 자율성을 인정하고도 나머지 5개 기준을 충족했으니 고용관계를 확정했는데 말이다.
업무 수행방식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포르투갈 대법원이 인정한 내용들 하나하나 살펴보면 한국 라이더 현실과 빼박 닮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배민은 최근 자체 개발한 앱이 아니라 딜리버리히어로 본사가 만든 '로드런너' 앱을 사용하기 위한 테스트 단계를 거치는 중이다. 한국이나 스페인·포르투갈이나 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리트머스 시험지는 라이더 노동자성 추정
이재명 정부가 노동자 추정제를 추진한다면 조만간 디테일이 드러날 것이다. 노동자성 확장을 위한 기준 설정이 제대로 되는가, 입증책임 전환이 온전하게 이뤄지는가 등을 세부적으로 따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추정제를 도입한 타국에서 가장 먼저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배달 라이더의 노동자성을 포괄할 수 있느냐가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EU가 입법지침으로 확정한 '고용관계 추정'은 노동자 추정제보다 진일보한 개념이다. 노동자성만 추정할 경우 사용자인 플랫폼기업은 자신의 사용자책임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연합은 노동자성만이 아니라 플랫폼기업의 사용자성까지를 동시에 추정한다. 즉 플랫폼기업과 라이더 등 종사자 사이의 '고용관계'를 확정해주는 것이다.
"앱 사용료 지불 등은 종속적 고용관계를 은폐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계약 조건이며, 고용관계 추정 제도는 바로 이런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된 것"
배달 라이더가 앱 사용료를 지불하는 등 자율성을 갖고 있다는 글로보 플랫폼의 주장에 대한 포르투갈 대법원의 판단이다. 고용관계 추정보다 강도가 낮은 노동자 추정제를 추진하면서 배달 라이더조차 품지 못한다면 진정한 변화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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