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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먹으며 영화보는 관객들을 정확히 조준하는 <웨폰>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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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먹으며 영화보는 관객들을 정확히 조준하는 <웨폰>의 공포

[이동윤의 무비언박싱] <웨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산층.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 중간에 놓인 계급. 자신의 노동력 만이 유일한 자산인 무산 계급과 대자본을 품고 살아가는 유산 계급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자산은 보유하고 있으나 그 자산 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고, 결국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계층. 중산층에 대한 대략적인 정의다. 정의만 놓고 보면 대자본을 품지 않은 자들은 누구나 진입할 수 있는 계층이다. 무산 계급이라 하더라도 노동력으로 얻은 임금을 차곡차곡 쌓아서 일정한 부를 소유하면 되니까. 쉽게 진입 가능한 만큼 누구나 쉽게 퇴출될 수 있다. 문제는 한 번이라도 진입한 자들은 스스로가 퇴출됐음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빠진다는 데 있다. 나의 현실은 중산층이 아닌데, 나의 이상은 중산층, 그 너머의 유산 계급으로 향하려는 욕망. 그 욕망이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중산층의 모순을 누군가는 자본이 주는 환각 작용으로, 또 누군가는 자본을 욕망하는 개인의 탐욕으로 해석한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영화 <웨폰>은 특정 대상의 주술적 지배를 통해서 중산층이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 그 취약성에 집중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속에서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다 여기는 믿음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란 쉽지 않다. <웨폰>이 스릴러 장르를 뛰어 넘어 공포 장르로 다가오는 이유다. 어렵게 재산을 모으고, 가족을 유지시켜 안정된 삶의 터전을 일궈낸 순간, 그 터전이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역설적으로 내재되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해체의 불안을 품에 안고 평온을 유지하는 계층이다. 무의식에 잠재된 불안을 외면해야만 일상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 모순. <웨폰>은 그 모순을 정확히 겨냥하며 흥미롭게 질문한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그 불안이 잠재되어 있지않나요?"

▲야심한 새벽 시간 집을 뛰쳐나와 어디론가 뛰어가는 아이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웨폰>의 서사는 같은 반이었던 17명의 아이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시작한다. 아이들의 부모는 모든 원인을 교사인 저스틴(줄리아 가너)에게 돌린다. 그녀가 납치했거나, 무슨 일을 꾸며서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은 아이, 알렉스(캐리 크리스토퍼)는 재난의 생존자로서 극심한 보호를 받고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싶은 교사는 스스로의 힘으로 범인을 찾아 나선다. <웨폰>은 아이들을 납치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아나가는 미스터리 탐정 서사를 원형에 둔다. 그리고 미스터리의 조각을 주인공의 서사로만 집중시키지 않고 다양한 인물들을 앞세워 분산시킨다. 미스터리의 조각을 맞추는 자는 주인공이 아닌 관객의 몫이다. 영화가 시작한 순간부터 진실이 폭로되는 순간까지, 관객은 다양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해체된 서사의 조각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끼워 맞추며 서사의 진정한 리더가 된다. 감독이 탐정의 역할을 주인공이 아닌 관객에 맡긴 것은 관객이 직접 사건의 현장을 목도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사라진 현장,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들의 분노, 많은 아이들이 사라졌음에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마을 분위기, 책임을 통감하고 사건 해결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들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일상은 소중히 생각하는 이중성. <웨폰>의 서사는 끊임없이 원인이 누구인지 쫓아가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목도하는 풍경은 지독하리만치 차갑게 자신의 일상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냉담함 뿐이다.

<웨폰>은 이 모순적 상황을 공포의 감정으로 이끈다. 우리가 외면하고자 했던 무의식의 한 단면을 현실에서 목도했을 때 공포는 극단적으로 폭발한다. <웨폰>이 노리는 공포의 효과는 아이들이 실종된 참사 속에서도 지극히 이기적이리 만큼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려는 자들을 겨냥한다. 수사의 책임이 있는 경찰 서장은 형사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말로만 안심시킬 뿐이고, 학교장으로서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학부모들에게 정보를 공유해야 할 책임이 있는 마커스(베네딕트 웡)는 지극히 무심한 태도로 주변의 불안을 달랜다. 사건을 수사해야 하는 경찰관 폴(엘든 이렌리치)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무마하려는 데에만 혈안이고, 범인이 누구인지 최초로 밝혀낸 마약중독자 제임스(오스틴 에이브람스)는 현상금을 받을 기대와 흥분으로 도취되어 있다. 극 중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걱정하는 자는 오직 담임 선생인 저스틴과 실종된 아이 중 한 명인 매튜의 아빠, 아처(조슈 브롤린) 뿐이다. 그래서일까? 사태의 심각성과 책임을 통감하는 자들은 악몽을 꾸고 사태를 외면하고 자신의 안녕만 추구하는 자들은 세뇌당한 채로 심판 받는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저스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저스틴과 아처의 악몽에는 그들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괴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광대 분장을 한 채로 사적 공간에 침투해 들어와 그들을 공포로 몰아 넣는다. 스티븐 킹의 <그것>에 등장하는 페니와이즈는 도시의 하수구에서 출몰하는 광대 살인마였다. 불순한 것들을 도시 이면으로 밀어버리는 체제의 모순성을 뒤틀며 억압된 것이 회귀하는 순간 대중은 극단의 공포를 느끼며 소름끼쳐 했다. 두 사람의 꿈 속에 등장하는 광대도 결국 페니와이즈와 같은 피를 수혈받은 괴물들이다. 웃지 않고 있음에도 웃고 있는 이중성이 체제를 위협하고, 일상을 뒤흔들 수 있다는 공포가 저스틴과 아처에게도 스며든 것이다. 두 사람이 꿈 속에서 광대를 마주한 것은 그들은 이미 일상이 무너져 버린 중산층이기 때문이다. 일상이 파괴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공포가 두 사람의 변해버린 일상을 지배한다. 반면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악몽은커녕, 공포의 대상조차 목도하지 못한다. 아니, 목도했음에도 그자가 범인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마커스의 집으로 범인이 들이닥쳤을 때, 마커스는 휴일에 찾아온 것을 큰 무례함으로 받아들이며 범인을 경계한다. 그자의 공격성, 야만성, 음흉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마커스의 감각이 일상의 평온함에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범인의 단서를 다급하게 전하는 저스틴의 통화를 받으면서도 마커스는 동성 파트너와 함께 여유롭게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마커스가 유지하려는 일상의 평온함은 언제든 쉽게 공격받을 수 있고 깨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위협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진 마커스에게 타인의 고통과 그에 대한 책임을 깨달을 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부모 간담회에서 담임 선생인 저스틴을 소개하는 교장 마커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웨폰>은 일상이 무너진 자들은 구원하고 일상의 감각에 의해 위협을 향한 감각이 무뎌진 자들을 심판한다. 마치 신이 잘못한 인간을 벌하듯 <웨폰>은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중첩시키며 누가 심판받을 자이고, 누가 구원받을 자인지 노골적으로 제시한다. 그 상투성을 할리우드 영화가 지닌 일반적 상투성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웨폰>의 상투성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이다. 그리고 이 목표는 스크린 너머에 있는 관객을 향한다. 아처의 꿈 속에서 집을 뛰쳐 나갔던 매튜가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올 때, 아처는 집 위에 떠 있는 커다란 기관총을 발견한다. 절대 집에서 소유하지 않을 것 같은, 군대에서나 사용할 법한 기관총이 거대한 암흑을 만들어 내는 순간, 관객은 자연스럽게 영화의 제목인 <웨폰>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에서 실제적인 무기는 형사들이 사용하는 것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방어를 목적으로 총기를 소유하는 것이 합법화된 미국에서 아이들이 실종된, 안전이 위협당하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총기를 꺼내들지 않는다. 단, 아처의 악몽을 통해서 총이 상징적 메타포로 하늘 위에 떠 있을 뿐이다. 아처는 어딘가를 향해 직선으로 내달리는 매튜의 영상을 보며 마치 사라진 아이들이 '미사일'처럼 한 사람을 겨냥한 채 달려간다 설명한다. 아처의 설명처럼 <웨폰>에서의 실질적 무기는 총기가 아닌 인간이다. 인간이 무기화 되어 인간을 공격하는 형태. 이는 '귀신 보다 더 무서운게 사람'이라는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을 뜻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는 일반적인 범죄자와는 달리 <웨폰>의 무기화된 인간들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 사랑하는 자들을 겨냥한다. 나의 부모가 나를 죽이려 들 때, 나의 사랑하는 파트너가 머리로 가차없이 나의 얼굴을 가격할 때, 예상하지 못했던 자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을거라는 공포야 말로 <웨폰>이 정확히 의도한 공포다.

▲부모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알렉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의 마지막 순간, 범인에 의해 세뇌당한 아이들은 자신을 포획한 범인을 향해 마치 미사일처럼 달려든다. 범인을 쫓아가는 아이들의 동선은 거리, 다른 집들의 앞뒤마당, 거실과 부엌을 가리지 않는다. 범인과 자신의 거리를 오직 일직선으로 계산하여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아이들의 맹목성은 자신들의 실종을 방관한 이웃들의 일상, 사적 공간을 철저히 파괴한다. 한달 넘게 아이들이 17명이나 사라졌음에도 형식적인 추모공간 하나 마련했을 뿐, 그 어떤 움직임(또는 운동)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마치 자신의 건제함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가차없이 그들의 일상을 공격한다. <웨폰>의 무기는 결국 자신의 일상을 지키려하는 자들을 향한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소유하는 자들, 굳이 무기를 소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들을 겨냥한다. 여기엔 스크린 너머 안락한 극장 의자에 앉아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도 포함된다. <웨폰>의 거부할 수 없는 극단적 공포가 관객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영화 속 현실과 자신의 현실을 구분짓는 태도로부터 기인한다. 영화는 영화일 뿐, 절대 현실이 아니라 생각하는 관객들에게 <웨폰>은 관객이 익숙하게 받아들일 법한 장르적 관습들을 미끼로 던져 놓고 자신처럼 일상에 젖어있던 자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목도하게 만든다. 조각난 서사의 줄기를 직접 꿰어 맞추며 자발적으로 탐정이 된 관객들은 <웨폰>이 몰고온 공포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웨폰>은 미국에서 3주간 흥행 1위를 차지한 작품이다. 38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제작하여 2억 60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뒀으니 <웨폰>이 미국 관객들의 무의식을 얼마나 정확히 저격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웨폰>을 만난 한국 관객의 반응이다. 개봉 첫주, <웨폰>의 개봉관 수와 상영 회차는 미국에서의 흥행성적과 비교해봤을 때 터무니없이 초라하다. 물론 개봉 이후 관객 반응을 좀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까지 겨냥했던 <웨폰>의 총부리는 한국에서만큼은 힘을 잃고 있음이 분명하다. 필자에겐 이 또한 하나의 증상처럼 보인다. 문화적 차이로만 이 현상을 해석하기엔 <웨폰>이 의도한 바는 지극히 명확하다. 일상의 안전함에 중독된 중산층의 붕괴, 그 모습을 관객들에게 직접 목도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영화 속 중산층과 한국의 중산층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구성되기 때문일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크게 비명을 지르던 자는 필자 하나 뿐이었다. 필자에게 <웨폰>은 악몽이었다. 마치 저스틴과 아서만 유일하게 악몽을 꾸었던 것처럼, 극장 안에서 <웨폰>에 정확히 저격당한 관객은 나 하나 뿐이었다. 그것은 필자의 일상도 저스틴, 아서처럼 무너져 있다는 반증일까? 또는, 지켜야 할 일상이 없는 소수자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 극장 문을 나서며 조금은 씁쓸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한다.

▲<웨폰> 메인포스터.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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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연출, 시나리오,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2007), <오이시맨>(2008)의 시나리오를 집필 했으며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춘천SF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 했다. 2019년부터 4년 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와 함께 ‘한국퀴어영화사’ 연작 시리즈를 책임 편집 했으며 『A Collection of Korean Queer Cinema』(2023)를 집필하여 영문으로 출간했다. 현재 영화 평론, 시나리오, 영화 연출 등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와 창작을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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