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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의 결과가 대학살로…홀로코스트를 다시 정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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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의 결과가 대학살로…홀로코스트를 다시 정의하자

[오찬호의 틈새]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이 던진 질문

한글날, 세종호수공원 일대에는 대한민국 공군 특수비행팀인 블랙이글스의 에어쇼를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거리며 나타난 비행 물체 여덟 대가 화려한 곡예를 30여 분간 선보이는 동안 모두가 탄성을 뱉기 바빴다. 블랙이글스가 전투기 명이 아니라 에어쇼를 선보이는 전담부대의 별칭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최대속도 마하 1.5를 자랑한다는 T-50B 기종은 당연히 전투기라 생각했는데, 곡예비행 전용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노란 바탕의 밑면에 새의 날개를 연상케 하는 검은색 무늬를 그려놓아서 아래에서 보면 정말 독수리가 연상된다.

시야에서 사라진 비행기가 더 낮고, 더 빠르게 그리고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순식간에 지나갈 때는 말 그대로 놀라 자빠졌다. 살면서 들었던 가장 큰 소리였다. 천둥소리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2초 정도, 심장이 떨어질 뻔한 무서움에 몸을 반사적으로 움츠렸다. 아, 저런 게 지나가기만 하는 것으로도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그러다가 '쇼'란 걸 금세 깨닫고 안도하는 내 모습이 어색해 웃는다. 웃음의 크기만큼이나 유쾌한 가족 나들이였다.

이 장면, 가자지구 사람들에겐 얼마나 낯설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우리는 일부러 찾아가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찾아와 폭격하는 전투기를 피하기 바빴을 거다. 2초도 아찔한데, 이들은 2년 내내 그렇게 살았다. 죽지 않고 살았다는 기쁨은 찰나였을 거다. 옆에는 대답 없는 가족과 이웃이 있었을 거니 말이다. 그 수가 6만 명이 넘어가니, 이제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으로 아동을 포함한 민간인 00명이 사망했다"라는 뉴스를 많이 접했다. 저 00명은 때론 세 자리가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지만, 그래도 전쟁의 속살은 조금씩 인도주의적 면모를 갖춰가고 있지 않은가. 최소한 2차 세계대전 이후는 그렇다. 온 천지에 죽음만 남았다는 드레스덴 폭격이나 이틀 만에 10만 명이 사망한 도쿄 대공습은 전쟁 당시에는 적의 항복을 하루라도 빨리 받기 위한 전략처럼 소개되었지만, 제네바협약이 민간인 보호의 영역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지금도 민간인 학살이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전쟁 중 민간인 사망에는 최소한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게 역사의 가르침이고 국제적으로 합의된 상식이다. 이스라엘은 그조차도 안 했다. 학교를, 병원을, 민간주택을 (실수가 아니라) 정밀 폭격한 다음 앵무새처럼 "하마스 지휘부 아무개가 숨어있어서"라는 성명만 발표했다. 난민촌을 향해, 배급을 받으려는 사람들을 향해, 기자들을 향해 (경고방송도 없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하마스 대원이 무리 중에 있다"는 걸 이유랍시고 말했다. 제주 4.3의 비극이 이런 이유로 시작되지 않았던가. 노근리 학살의 원인이 저런 논리 아니었던가. 하지만 세계의 질타에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만 반응했다. "어쩌라고."

나는 홀로코스트를 고유명사로 설명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고민해 본다. 누군 따질 거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기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 천 명 이상이 사망한 게 먼저 아니었냐면서 말이다. 그 공격 전에 수십 년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했는지를 길게 설명하긴 싫다. 이스라엘은, 원주민을 청소하듯이 쓸어버렸던 유럽인들처럼 영토를 멋대로 확장했다. 무장병력을 동원해 정착촌을 확대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킨 것도 모자라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감옥과 다를 바 없이 통제했다. 심지어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에 모여든 무슬림들을 유린했다. 때가 되면 잔디를 깎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이 아니다. 저런 이유들은 하마스의 존재까지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어찌 저항하지 않을 수 있냐 정도의 질문 정도만을 수긍할 수 있다. 무슨 저항이든 괜찮다는 걸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이스라엘도 이유 불문하고 민간인을 군사무기로 죽였다면, 그 자체로 정당화될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람 굶어 죽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가자지구로 향하는 구호품들을 철저히 차단했을 정도인데, 이를 이해할 맥락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심지어, 하마스의 습격 당시 한니발 지침이 내려졌다는 제보도 쏟아졌다. 한니발 지침은 인질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적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는다는 이스라엘의 교전 수칙인데 2016년에 폐지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유야무야 적용되고 있었다. 2023년 10월 7일에도 하마스의 기습공격 얼마 후 한니발을 언급하며 "어떤 차량도 가자지구로 들어갈 수 없다"라는 무전이 곳곳으로 퍼졌다. 그래서 차량을 폭격했다. 누가 타고 있었겠는가. 하마스가 인질로 잡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다. 주택에 자국민이 인질로 억류되었다고 하자, 주택을 폭격했다.

홀로코스트 때문일까? 끔찍한 집단경험이 다시는 피해자가 되지 않겠다는 지나친 결의로 이어져서라는데, 말도 안 된다. 지금껏 대학살의 피해자들이 그런 논리를 펼치며 삼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적이 없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들의 학살에 충격받아 아시아 이민자들을 죽인다면 이를 누가 수긍하는가. 한국 사람이 이주노동자를 괴롭히면서 일제강점기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우긴다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러는 건, 홀로코스트를 온전히 독점해서다. 나 역시 지금껏 보통명사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고유명사로만 설명했다. 다른 홀로코스트를 무시한 건 아니지만, 단어의 무게를 오롯이 유대인들과 일치시키는 게 '역사에 대한 예의'라 여겼다. 그래야만, 인종을 청소하려고 했던 히틀러의 악랄함이 더 분명해지는 걸 기대한 것도 있다.

나치는 유대인을 '절멸' 수용소에서 무자비하게 죽였다. 유대인 사망자만큼 소련군 포로, 폴란드인, 장애인, 동성애자, 정치범, 집시 등도 죽였지만 나는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인 홀로코스트"라면서 무의식적으로 범위를 좁히곤 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 감히 홀로코스트를 이해할 수 있겠냐면서, 죽은 자들을 추모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고통, 슬픔, 분노는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건 이상하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과 손잡고 다른 피해자에게 다가가는 것과,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 잘못 아니라는 걸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건 많이 다르다. 이스라엘이 지금 그렇다. 절멸의 악몽을, 절멸을 하면서 극복하는 모양새다. 앞으로 홀로코스트는 넓게 설명되어야 할 거다. 학살은 그 자체로도 비극이지만, 그 악몽이 오랫동안 개인의 이성을 짓눌러 죽음이 다른 죽음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반드시 짚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취재해 온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마리암 다가(33세)가 2024년 6월 14일 가자 지구 남부 칸 유니스에서 초상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 8월 25일 칸 유니스의 나세르 병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4명의 기자를 포함한 8명 중 한 명이다. ⓒAP=연합뉴스

대학살의 결과가 다시 대학살이라니

홀로코스트 독점의 폐해는 이미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 바 있다. 부모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악용을 비판해온 미국의 유대인 학자 노르만 핀켈슈타인은 저서 <홀로코스트 산업 :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2004, 한겨레출판)에서, 부패한 이익집단들 때문에 생존자 보상금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홀로코스트에 대해 당사자 외에는 어떤 질문도 던질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홀로코스트는 성역이었고 때론 신화였다. 수용소에 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거짓 피해자 행세를 하며 보상금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경험을 날조해 유명세를 얻는 이들도 많았다. 1995년에는 <조각들 : 유년기의 기억, 1939-1948>(Fragments: Memories of a Childhood, 1939-1948)이라는 수용소 생존수기가 출간되었지만, 지어낸 이야기였다. 1997년에는 수용소를 탈출한 가족이 숲에서 늑대와 어울렸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했다. 허구로 밝혀지는데 10여 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영화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1996년에는 수용소 안의 소년이 담장 안으로 사과를 던진 소녀와 나중에 재회해 사랑에 빠진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가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미국에 알려졌다. 주인공 허만 로젠블라트는 이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홀로코스트를 증언하는 강연만 수백 회를 하며 떼 돈을 벌었다. 이 이야기는 2008년 <울타리 위의 천사: 살아남은 사랑의 진실 이야기>(Angel at the Fence: The True Story of a Love That Survived)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었다가, 그제야 터진 진실공방으로 취소되었다. (홀로코스트 신화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칼럼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의 121~126회를 참조할 것)

이런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폭력적 행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지만 나는 굳이 홀로코스트와 연결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개인 범죄행위와 홀로코스트 자체가 달라서이기도 하지만, 한국에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예를 들어,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유공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라는 이들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거짓 사례를 은근히 강조하는 식이었다. 이런 오용을 걱정해 언급하지 않는 쪽을 택했는데 계속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유대인의 죽음을 부정해서가 아니다. 홀로코스트를 그때의 비극과 지금의 비극을 하나의 물줄기로 다루는 게 역사에 솔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경에 이른 걸 이스라엘 탓만 하는 것도 비겁하다. 우리가 얼마나 팔레스타인을 알고 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팔레스타인을 잘 모르니, 그들이 매일 죽어도 대수롭지 않은 지를 반성해야 한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담 하나를 두고 존재하는 수용소와 꽃밭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누구는 가스실에서 죽고, 누구는 정원을 가꾼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담장 너머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외면하면서 말이다. 그쪽 사정이라면서 말이다. 그 무관심이, 홀로코스트의 결과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지독하게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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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납작한 말들>(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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