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최근 한국 대학 청년세대의 극우화 현상을 단순한 이념적 변화가 아닌, 구조적 불안과 관계의 해체가 빚어낸 사회심리적 증후로 분석한다. 팬데믹과 신자유주의 경쟁체제가 청년의 공론장을 붕괴시키고, 혐오와 냉소의 언어가 공감을 대체한 현실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필자는 교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년세대의 분노를 정치적 판단이 아닌 '사회적 신호'로 해석하며, 공감의 복원과 대학의 재정의가 한국사회 회복의 핵심임을 주장한다.
1.
언제부터였을까. 팬데믹이 끝나고 교정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첫 학기, 나는 묘한 생경함을 느꼈다. 강의실에서 마스크를 벗은 학생들의 얼굴은 오랜만에 햇살을 받은 듯 밝아보였지만, 그 표정 속에는 어떤 단절감이 서려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질문을 하거나 토론을 이어가던 학생들은 사라지고, 대부분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들에게 '말하기'란 이제 강의실이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댓글'을 다는 행위로 대체된 듯했다.
12.3 내란사태 이후 학내에서도 이를 규탄하는 학생집회가 열렸다. 뜻깊은 자리였지만, 학생들의 참여는 저조했다. 더구나 그 집회를 주도한 이가 내 지도 학생, 그것도 중국학과 학생이었기에 나는 더욱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의 용기와 정의감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다른 학생들의 냉소적인 반응은 씁쓸했다.
그가 집회 소식을 학생 커뮤니티에 올렸을 때 "짱개학과라 역시...", "전염병 퍼뜨린 나라가 무슨 정의를 논하냐"는 식의 혐오 댓글이 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쓰라린 것은, 아무도 그를 변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분노보다 무관심이 더 무거운 침묵을 만들었다. 그때 그가 느꼈을 감정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소통이 무너진 캠퍼스의 공허함, 그리고 청년 세대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불안과 고립의 언어였을 것이다.
2.
한국 청년들의 극우화는 단순히 이념적 이동이나 정치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불안한 생존구조가 만들어낸 정서적 반응, 분노의 사회적 전이(轉移)다.
첫째, 팬데믹과 디지털 전환은 청년의 공론장을 해체했다. 비대면 수업과 SNS, 익명 커뮤니티는 공감의 언어 대신 공격의 언어를 확산시켰다. 현실의 대화는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졌고, 온라인의 배타적 논쟁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복잡한 사회문제는 단순한 '적대 구도'로 치환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중국·여성·이주민 등은 손쉬운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둘째, 신자유주의적 경쟁구조가 청년의 자존과 정체성을 파괴했다. IMF 이후 한국의 청년세대는 "노력하면 된다"는 신화를 내면화했지만, 현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의대와 인문대의 격차로 갈라져 있다. 실패는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었고, 사회비판의 언어 대신 자기혐오와 타자혐오가 자리 잡았다. 계급적 분노가 국수주의적 분노로 대체된 것이다.
셋째, 정치의 공백이 문제를 심화시켰다. 진보든 보수든 청년에게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는 부재했다. 청년정책은 취업률·지원금·창업보조금으로 환원되었고, 청년 스스로는 정치적 무력감을 체화했다. 이 공백을 유튜브 알고리즘과 커뮤니티 정치가 파고들었다. 이념이 아니라 감정의 확증을 제공하는 콘텐츠가 청년의 분노를 조직했다.
3.
오늘날 청년 극우화의 본질은 이념의 극단화가 아니라 언어의 빈곤화다. 공감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서 혐오는 즉각적인 쾌락과 소속감을 준다. 성과주의 사회 속에서 청년들은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평가받는다. 그 과정에서 '나보다 못한 타자'를 설정해 자신을 방어하는 심리가 강화된다.
'중국 혐오', '여성 혐오', '이주민 혐오'는 모두 같은 구조의 산물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원인을 타자의 결함으로 돌리는 자기위안의 논리. 그러나 그 위안은 언제나 불안 위에 세워진다. 그들이 미워하는 대상은, 실은 감당하지 못한 현실의 거울이다.
극우정치권은 이런 혐오의 언어를 사악하고도 영리하게 이용한다. 청년의 분노를 '국가 자존심'과 '안보 위기'의 언어로 포장하며, 복잡한 문제를 정체성의 전쟁으로 단순화한다. 그 결과 대학조차 '사상의 자유시장'이 아니라 '혐오의 자유시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4.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비판이 아니라 공감의 복원이다. 교수로서 나는 다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느낀다. 연구년은 한편으로 교수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이다. 조급한 정치적 설득보다 학생 개개인의 불안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첫째, 대학 안의 대화공간을 재구성해야 한다. 토론회나 포럼이 이념 대결의 장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소규모 공감세미나, 학생 자율토론회, 청년연구공동체 같은 실험적 장치가 필요하다.
둘째, 청년정책의 언어를 바꿔야 한다. 정책의 목표를 단순한 경쟁에서의 생존이 아니라 '삶의 의미'로 전환해야 한다. '청년 존엄지수(Youth Dignity Index)' 같은 개념을 도입해, 단순한 경제성과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정서적 안정·관계의 질을 평가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청년의 분노는 가난보다 고립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정책이 직시해야 한다.
셋째, 세대와 지역을 연결하는 공감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청년이 또래 집단에 갇히지 않고, 노년층·시민단체·지역 공동체와 교류할 때 편견의 벽은 허물어진다. 지방정부와 대학이 협력해 '생활정치 캠프', '세대공감 라운드테이블', '청년×노인 공동프로젝트' 등을 시도해야 한다.
넷째, 국제 청년교류의 생활화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 정치적 이벤트가 아닌, 예술·환경·기술·창업 같은 실용적 주제를 중심으로 한 한중 청년공동체 프로그램을 제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함께 일하고 웃는 경험은 혐오보다 강한 신뢰를 남긴다.
다섯째, 대학의 역할을 재정의해야 한다. 대학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기관이 아니라, 사회 감수성을 재구성하는 공공장소가 되어야 한다. 교수 역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사회적 중재자'로서, 학생들의 내면에 깃든 불안과 분노의 언어를 해석하고 연결해야 한다.
5.
나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왜 분노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정치적 성향을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 방식을,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회를 함께 만들어왔는지를 묻는 물음이다. 청년의 분노는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시대의 징후다. 그들이 분노의 언어로 말할 때, 사실은 '나를 좀 봐달라', '이 사회에 나의 자리가 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 청년 극우화의 책임은 청년에게만 있지 않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에게 성공의 공식만을 가르치고, 관계의 언어를 잊게 했다. 효율과 경쟁의 미명 아래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 결과, 청년의 마음은 비교와 평가의 잣대 속에서 점점 닫혀갔고,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연대보다 적대의 논리로 설명되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들의 분노를 '비판'이 아니라 '신호'로 읽어야 한다. 그 분노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요구하는 불완전한 언어다. 청년이 외치는 분노 속에는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숨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신호를 억누르거나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공감으로 번역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나는 믿는다.
공감은 지식보다 강하고, 연대는 논쟁보다 오래간다. 혐오의 언어가 순간적인 위안을 줄 수는 있지만, 공감의 언어만이 지속적인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다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불안을 나누고, 다른 세대와 다른 지역의 삶을 연결할 때, 그때서야 청년의 분노는 하나의 사회적 에너지로 전환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하려 한다.
혐오가 아닌 공감의 언어로, 적대가 아닌 연대의 언어로.
청년의 분노를 다그치기보다 그들의 불안을 함께 견디는 일, 그것이 잃어버린 공감의 세대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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