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이제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는 온통 악취 나는 진흙 바다가 펼쳐져 들길로 다니기도 도시로 가기도 어려울 터이다), 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사탄탱고>(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 지음, 조원규 옮김, 알마)
국내에도 적잖은 독자층을 형성한 헝가리 문학의 거장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는 종종 '종말론의 작가'로 운위되는데, 20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때도 "종말론적인 공포 속에서 예술의 힘을 재확인하는 강렬하고 선견지명 있는 작품 세계(for his compelling and visionary oeuvre that, in the midst of apocalyptic terror, reaffirms the power of art)"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오르크 루카치(헝가리어 이름은 루카치 죄르지, Lukács György)가 살아 있다면, 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에게 한 평가를 크라스나호르카이에게로 옮겼을지도 모르겠다. 성을 먼저 쓰는 헝가리에서는 작가를 크라스나호르카이 라슬로로 부르지만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같은 헝가리인 케르테스 임레를 임레 케르테스라고 표기하듯, 또 루카치처럼 헝가리 밖에서는 흔히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로 부른다.
카프카와 멜빌을 잇는 세계문학의 파괴적 혁신가
크라스나호르카이는 1954년 루마니아 국경 근처인 헝가리 남동쪽의 작은 마을 줄러에서 출생했다. 유대계 혈통. 대학에서 법학과 헝가리 문학을 전공했으며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1985년 데뷔작인 <사탄탱고>가 크게 성공하며 헝가리뿐 아니라 세계문학의 최전선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헝가리 공산당 정권과는 문학의 성격상 긴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첫 방문 이후 서독(독일)에 자주 머물렀으며, 냉전 종식 이후에도 방랑을 이어갔다. 아시아에서도 긴 시간을 보내며 사유의 지평을 넓혔다. 몽골, 중국, 일본, 스페인,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면서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그에게 문학은 체제와 권력, 민족주의 등 집단정체성을 거부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저항의 장이었다. 영화감독 벨라 타르와 공동 작업으로 유명하며 상영시간이 무려 439분에 달하는 영화 <사탄탱고>는 영화사에 중요한 작품으로 남았다. 2015년에 헝가리인 최초로 맨부커상 국제 부문을 수상했다.
크라스나호르카이는 프란츠 카프카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에 이르는 중부 유럽 문학의 위대한 서사 작가의 맥을 잇는다. 종말론의 대가로서 부조리와 기괴한 과잉이 특징적인 그의 작품에서 인간이 희망의 주체가 아닌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인간을 파괴와 허무의 기제로 그리기에 "세상에 경이로운 것들이 많으나, 인간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없다(πολλὰ τὰ δεινὰ κοὐδὲν ἀνθρώπου δεινότερον πέλει)."라고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에서 한 말은 불가피하게 뒤집어진다. 그에게 인간은 세계의 경이보다는 괴물에 가깝다.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종말론은 쉬운 절망이나 그럴듯한 허무를 지향하지 않는다. 인물의 내면과 주체의 근원을 파고드는 서양 소설의 집요한 전통을 거슬러 인간 중심주의 서사를 넘어서려고 한다. 작가는 그렇게 혼돈을 표명하는 듯하지만 그 속에서 독자에게 낯선 리듬을 전하면서 새로운 문학적 경험을 제공한다. 묵시라는 것도 결국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혈통과 세계를 떠도는 삶이 시사하듯 크라스나호르카이 작품을 헝가리 문학이란 틀로 가두기는 힘들다. '마자르 정신'이나 헝가리의 대평원 푸스타의 향수와 같은 민족적 정체성을 그의 문학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의 문학의 뿌리는 카프카, 고골, 베케트, 멜빌 등으로 이어지는 세계문학의 계보 안에 놓인다. 허먼 멜빌과 친연성을 두드러지게 주목하는 평자가 있는데, 수전 손택이 대표적이다. 작가 자신이 "카프카가 아니었다면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표명하였듯, 독자는 더 직접적으로는 크라스나호르카이 작품에서 카프카를 느끼게 될 가능성이 크다.
카프카가 동유럽의 울타리를 넘어선 세계문학의 젖줄이 되었듯 그는 세계문학의 자산이 되었고, 제임스 조이스처럼 문학적 세계주의자로 자신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다. 세계주의자로서 그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종말론 세계관으로 가득하지만, 본래 종말론적 묵시가 종말과 함께 구원을 말한다는 측면에서 구원과 희망까지는 아니어도 종말 외의 다른 징후 또한 포함한다. 언어와 형식, 예술적 실험을 통한 작업은 아직 세계의 진실이 포착되지 않았다는 선지자적 각성과 그 진실을 전하겠다는 사명감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세계에 종말의 기운이 만연해 나날이 불안이 높아가는 시대에 크라스나호르카이의 문학은 그 어둠 속에서, 여전히 비밀에 가려진 구원의 문을 찾으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문학은 그러한 시도만으로도 위태롭지만 아름다움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등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주요 작품이 도서출판 알마에 의해 번역돼 있다. <사탄탱고>가 가장 유명하지만 <저항의 멜랑콜리>는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 수전 손택에게 극찬을 받으며 유명세를 탔다. 그녀는 크라스나호르카이의 두 번째 책 <저항의 멜랑콜리>(Az ellenállás melankóliája)(1989년)를 읽은 후에 그를 현대 문학의 '종말의 대가'로 추앙하게 된다.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소설 시작과 함께 독자는 아찔한 비상사태에 진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불길한 징조가 넘쳐난다. 카르파티아 계곡에 자리 잡은 작은 헝가리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섬뜩한 공포 판타지 속에서 드라마는 계속 모종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이 흐름에서 유령 같은 서커스단이 도착하며 결정적인 전환을 만든다. 주요 볼거리는 거대한 고래의 사체이다. 이 신비하고 위협적인 구경거리는 극단적인 힘을 가동해 폭력과 기물 파손의 확산을 촉발한다. 무능한 군대가 무정부 상태를 막지 못하면서 쿠데타의 가능성이 생긴다. 꿈같은 장면과 그로테스크한 인물 묘사를 활용하여, 크라스나호르카이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잔혹한 투쟁을 능숙하게 묘사한다. 그 누구도 공포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탄탱고>
맨 앞의 인용문은 <사탄탱고>를 시작하는 글이다. 크라스나호르카이 출생지와 유사한 외딴 시골 지역이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첫 소설, 1985년에 출간된 <사탄탱고>의 배경이다. 이 소설은 헝가리에서 문학적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작가의 출세작이 되었다. 공산주의 붕괴 직전의 헝가리 시골에 있는 버려진 집단농장 주민들을 그린다. 모두가 희망을 잃고 무기력에 잦아들 즈음에 죽었다고 믿었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 이리미아스(Irimiás)와 그의 친구 페트리나(Petrina)가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다.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는 기적을 실현할 인물이다. 기다림 끝에 기적의 희망은 실현될까. 책의 제사는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이고 밑에 "F.K."라고 적혀 있다. "F.K."는 프란츠 카프카를 말하며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다. 제사에 비추어 그들의 희망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듯하다.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후터키는 마을 남자들이 누구나 껄떡거리는 슈미트 부인과 밤을 보내고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있던 참이다. 그녀의 남편 슈미트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해서 번 8개월 치의 품삯을 받아서 주민 크라네르와 함께 돌아오고 있다. 들키기 전에 현장을 모면한 후터키는 슈미트와 크라네르가 그 돈을 가로채 마을을 떠날 계획임을 알아내고 자신의 몫을 요구한다. 이제 그들은 돈을 삼등분해 날이 저물면 이 저주받은 마을을 떠날 생각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도입부의 함축적인 문장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사실주의 작품처럼 보인다. 희망부재를 기본으로 깔고 치정과 배신이 한바탕 펼쳐질 줄 알았더니 소설은 좁은 차선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유턴한다. 슈미트 부부와 후터키가 있는 집으로 크라네르 부인이 와 소식을 전한다. 그녀는 흥분해서 1년 반이나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마을로 귀향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야반도주 계획은 중단되고 이들은 이리미아시를 영접할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후터키가 보기에 이리미아시는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도 성을 지을 수 있는 위대한 마법사"이다. 과거에 마을을 구해낸 적이 있는 그가 돌아온다면 마을이 다시 소생할 것이란 희망이 사람들 사이로 퍼진다.
사람들은 술집에 모여 이리미아시를 기다린다. '소식' '부활' '천국' 등의 단어가 소제목에 사용되고 내용도 살짝만 바꾸면 성서적인 풍경과 닮았기에 소설은 바야흐로 알레고리 성격으로 전환한다. 뒤에 가서 더 뚜렷해지지만, 카프카적 분위기 또한 스멀거리기 시작한다.
제목인 '사탄탱고'는 술집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마을 사람들이 추는 춤과 연결된다. 기괴한 음주가무 장면은 종말론의 풍경이라기보다 우스꽝스럽고 암담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탄탱고'는 사탄이 추는 춤이자, 사탄을 위해 추는 춤이다. 혹은 사탄 같은 춤일 수도 있겠다. 작품 전체를 지시하는 단어이자 소설 중간쯤의 이 그로테스크한 춤판을 가리킨다. 술집 장면은 세계의 비참이자, 헝가리의 사회상이며 실존적 위기를 두루 포괄한다. 작가의 유대성에 기대면 메시아를 기다리는 희망을 가장한 비참한 세속성을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탄과 관련한 상징적 장치는 거미줄이다. 술집은 거미줄투성이이며 술집 주인이 슈미트 부인에게 품는 욕정을 통해서 슈미트 부인의 남성편력이 밝혀진다. 정작 슈미트 부인은 이런저런 남자와 몸을 섞지만,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는 이리미아시뿐이다. 이리미아시의 귀향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신약성서의 한 장면인 양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광신자인 헐리치 부인은 남편에게 계시록을 읽으라고 윽박지르고 난장판 사이에 호르고시 부인이 사라진 어린 딸 에슈티케를 찾아 술집에 나타나지만 아무도 그녀와 그녀의 딸에 신경 쓰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술에 절어 탱고를 추며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고는 헐리치 부인은 왜 심판의 순간이 늦어지는지를 의아해하고 한탄한다. 날이 밝아 창밖이 환해질 무렵에 춤판과 술판은 그치고 사람들은 지쳐서 깊은 잠에 빠진다. 술집에 도착한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는 눈앞의 광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여기까지가 1부이고 이제 이리미아시의 연설과 함께 2부가 시작한다.
버림받은 소녀 에슈티케의 자살과 승천
등장인물이 모두 특이하지만 소녀 에슈티케는 더 특이하다. 아버지는 자살했고, 언니들은 방앗간에서 몸을 팔며, 오빠는 악당을 꿈꾸면서 심심하면 소녀를 학대한다. 술로 소일하는 어머니를 비롯, 가족은 소녀를 방치하고, 마을 사람들은 소녀가 약간 모자라거나 미쳤다고 생각한다. 소녀는 소외된 마을에서 한 번 더, 혹은 가장 소외된 존재다. 어느 날 다정하게 굴며 돈을 빼앗아 간 오빠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소녀는 분노와 슬픔에 잠겨 키우는 고양이를 죽인다. 고양이 사체를 안고 벵크하임 성으로 가서 쥐약을 먹고 자살한다. 소녀는 나중에 승천하는데, 이 자살과 죽음은 소설 전체와 겉도는 듯 괴상하게 이어진다.
누가 사탄이고 왜 탱고를 추는가
과잉과 기괴가 넘쳐나는 이 소설은 엉뚱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잘 읽힌다. 파카레스크 소설 양식을 계승한 <사탄탱고>에서 당연히 중심인물은 이리미아시이다. 그의 실체는 마을의 구세주가 아니라 권력에 부역하는 정보원이다. 이리미아시가 마을 사람들을 현혹해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고 그들은 열광적으로 호응하며 마을을 버리고 길을 떠난다.
그는 파카레스크(악한)를 넘어 사탄일 수도 있다. 부활과 승천, 출애굽 등 신구약을 아우르는 상징이 넘쳐나고 수미상관으로 원을 닫아버리는, 고전주의를 연상케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기법까지 이 소설을 한 마디로 규정하긴 힘들다. 힘차게 달려온 서사는 당사자를 배제한 채 간접화법으로 희미하게 주저앉고 이때 황당하게 의사란 인물이 플롯에 치고 들어온다. 당연히 밑밥을 깔아 놓았지만, 무슨 역할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던 의사가 대미를 정돈해버린다. 문자 그대로의 수미상관으로 소설이 끝난다.
<사탄탱고>는 읽기 어려운 소설이 아니다. 다만 한마디로 뭐라고 규정하기는 힘들다. 몰락과 폐허를 버텨가는 인간군상의 현존을 이렇게 포스트모던한 작법으로 동시에 모더니즘의 전통을 배면에 깔면서 형상화한 작가의 역량은 칭찬을 거듭해도 과하지 않다. 첫 작품으로 세계 문학사의 기념비를 세운 드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작가는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많은 것을 사탄보다 더 교활하게 <사탄탱고>에 담았다. '사탄탱고'를 춘 실제 주인공이 어쩌면 크라스나호르카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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