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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학살"이라는 군인 증언에 동물 살처분은 이주노동자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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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학살"이라는 군인 증언에 동물 살처분은 이주노동자에게 넘어갔다

[기고] 살처분과 축산업…처분되는 동물과 처분해야 하는 인간의 처지

1.

"이거 대량학살이잖아요."

15년 전 구제역 살처분 현장에 동원되었던 한 군인의 증언이다.

살아있는 돼지를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고 찍어 누르는 일이었다. 살처분으로 돼지 350만 명(동물 수를 '명'으로 표기하는 것은 동물권 운동을 하는 이들이 쓰는 종평등 언어다)이 죽었고, 연 인원 200만 명의 사람이 죽이는 일에 동원되었다. 공무원과 군인 189명이 다쳤고, 12명이 사망했다.

백신이 나왔고, 구제역은 잠잠해지는 듯 했다. 얼마 안 가 조류독감이 터졌고,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터졌다. 소와 닭과 돼지는 땅에 묻히고 렌덩링 기계에 갈리고 총살을 당해 처분된다. 15년 전 대량학살이라던 군인의 증언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다만 한국말이 서툰, 그래서 증언이 어려운 이주노동자에게 죽이는 일이 맡겨졌다.

이주노동자의 증언은 잘 들리지 않았다. 땅에 묻히는 소와 돼지와 닭의 모습도 언론은 잘 보여주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살처분 노동자의 증언과 살처분된 동물들의 비명이 자꾸만 겹쳐 들렸다.

▲살처분이 끝난지 이틀 지난 돼지 농장의 모습. 쓰레기를 태운 흔적 위에 석회가루가 뿌려져 있다. ⓒ정윤영

기어이 '기후재난'이라 부르는 시대에 살고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코로나 19와 처음 경험하는 산불과 폭염, 폭우. 재난이 일어나면, 인간은 재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한다. 어떤 재난이든 인간, 국민의 지위를 가진 존재들은 대응메뉴얼에 따라 대피소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는 존재들, 도망쳐도 대피소로 갈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재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가야하는 존재도 있다. 위험한 줄 알면서, '지옥'인 줄 알면서도 간다. 누군가는 망가지고 부서진 현장을 처리해야한다. 그 누군가는 대부분 비정규직이거나 일용직이거나 이주노동자다. 재난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는 뒤치다꺼리를 해야하는 존재가 되고, 재난으로부터 대피하지 못하는 존재는 쉽게 '처분'되고 만다.

재난이 일상이 되어가는 지금, 더 먼저 그리고 더 아프게 재난에 내던져진 존재들이 있음을 본다. 인간의 자격을 얻지 못한 존재는 구덩이에 묻혀도 괜찮은지, 국민의 지위를 갖지 못한 존재에게 '지옥'을 떠넘겨도 정말 괜찮은지,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묻게 된다.

2.

"여긴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해요."

한 육가공 공장의 단기 알바노동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긴 컨베이어벨트에 육계라 부르는 아기새가 매달려 있다. 죽은 닭을 부위별로 자르고 포장하는 일은 나이가 든 여성, 혹은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몫이었다. 노동자들은 감염병에 걸린, 혹은 걸릴지도 모를 소와 돼지와 닭을 살처분하는 일을 학살이라고, 누군가를 죽여야하는 곳을 지옥이라고 했다.

공장에서는 지옥같은 일을 매일, 하루 여덟 시간 혹은 열다섯 시간씩 한다. 중복을 며칠 앞둔 '대목'에는 그 공장에서만 하루에 38만 명의 닭이 도살되어 포장되었다. 알바노동자는 일주일 알바 기간 중 제일 오래 열다섯 시간 일한 날, 그날 자기가 포장한 닭만 1만쯤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리 단기 알바로 왔지만 숙련자 못지않게, '악마의 추격이라도 받는 듯이'(업튼 싱클레어, <정글>, 2009.) 빠르게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업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고,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선배 노동자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옆 사람과 대화할 틈도 없고, 거대한 기계소리에 옆 사람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눈앞에 도착한 닭을 비닐에 넣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폭우처럼' 닭이 쏟아지고 1분 만에 눈앞에 닭이 '산처럼' 쌓인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닭이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손목을 아프게 하는 '무거운 일거리'일 뿐이다. 손목이 아플수록 닭의 다리를 잡는 손이 거칠어진다. '전투에 나가는 기분'이었고 '동물을 향한 전쟁에 동원되는 군인'같았다. 해가 질 때까지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 공장 밖에는 아직 살아있는 닭들이 도살을 기다리고 있다. 저 닭들이 모두 죽어야 집에 갈 수 있는 건가? 싶다던 알바노동자의 말은, 돼지들을 모두 땅에 묻어야 집에 간다는 생각뿐이었다던 살처분 노동자의 말과 겹쳐 들렸다.

▲도축장으로 가는 트럭 안에 닭들이 실려있다. ⓒ정윤영

그곳에서 닭은 한 마리, 두 마리도 아닌 한 개, 두 개로, 이거, 저거로 불렸고 머리, 다리같은 부위로 불렸다. 알바노동자는 동물이 명(命)으로 불리려면 공장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공장과 농장 바깥에서 마리가 아니라 명이라고 외치는 그 목소리가 닭이 살아가는 곳, 또 닭이 죽어가는 곳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목이 잘린 닭과 '덜렁거리는 여린 뼈', 똥이 묻은 닭의 가슴을 그는 사진으로 찍고 싶었다. 그가 아는 한 닭은 생명이고 그래서 우리가 먹는 것이 살아있는 생명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삼계탕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오는 닭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모두가 알기를 바랐다. 그럼 동물의 삶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촬영은 곧 포기했다. 이미 공장은 내부공정을 볼 수 있도록 개방했고, 공정과정을 찍은 촬영물을 동물복지기업 홍보영상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똥 묻은 가슴과 목 잘린 닭의 사체는 공장 바깥에 있을 때나 폭력이었다. 공장 안에서 이 '학살'을 폭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닭의 삶과 죽음보다는 당장 시큰거리는 손목과 언제인지 알 수 없는 퇴근시간, 너무 짧은 점심시간에 화가 났다. 퇴근이 늦어져 잠을 못 잤다는 선배, 만 원 짜리 손목보호대가 부담스러워 2000원짜리를 샀다는 동료 앞에서 닭의 죽음은 폭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장 안에서, 알바노동자에게 동물의 권리와 복지는 '혼란'스러운 문제였다.

학살이 일상이 되고, 폭력이 폭력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 세상은 타락의 가장 깊은 나락으로'(오마르 하마드, <가자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 2025)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어떻게 하면 공장 바깥의 '동물해방'이라는 구호가 공장 안에도 전해질까. 공장 안 노동자와 닭의 비명이 공장 바깥과 어떻게 연결될까. 노동자의 권리와 닭의 죽음이 어떻게 맞닿을 수 있을까.

▲한 돼지 농장의 돈사에 네팔어로 가위, 클립과 같은 단어와 작업 순서 등이 적혀 있었다. ⓒ정윤영

3.

'인도적'으로 사육, 생산된 축산물에는 동물복지 인증마크 스티커가 붙는다. 인도적 사육, 생산은 일을 하는 노동자의 몫이 된다. 소, 돼지와 닭은 상품으로서 조심히 다뤄야하며, 생명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도록 다뤄야 한다. 노동자에게는 동물의 복지와 권리가 성가신 일거리, 짜증나는 추가 노동일 뿐이다. 공장에서 태어나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부위 별로 잘리는 대량생산 시스템, 분당 몇백 마리가 산처럼 쏟아지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고 그 생명을 존중하려 해도 쉽지 않다.

수의직 공무원이 도살장에서 일한 경험을 기록한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죽음>(리나 구스타브손, 2021)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도살장 노동자는 도살장 안으로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돼지를 발로 밀치고 물을 뿌려 안으로 들이민다. 발로 차지 말라고, 물을 뿌리지 말라고 지적하자, 노동자는'안 가려는데 어쩌라고요?'라며 짜증을 감추지 않는다.

동물의 권리와 노동자의 권리 사이에서 작가는 혼란스러워한다. 도살장에 현장실습을 온 수의대생의 '저렇게 좁은데 합법이냐', '저렇게 때려도 되냐'는 물음에 작가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그저 '질문을 멈추지 말아요.' 당부할 뿐이다.

답은 어렵다. 다만 고기를 만들기 위해 한 해에 돼지 2000만 명, 닭 10억 명이 죽는 것, '학살'같은 일이 '쓰기 쉬운' 사람들의 몫이 되는 것, 그게 진절머리났다. 재난을 이유로 소와 돼지, 오리와 닭의 목숨이 처분되어도 괜찮은 것, 언젠가 나에게도 그 차례가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이곳은 쓸모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하는 곳, 쓸모없어졌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처분될 수 있는 곳이니까.

그러니까 내게는 처분되는 동물과 처분해야하는 인간의 처지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거대한 축산업 안에서 그저 동물이 먼저 처분되었고 '쓰기 쉬운' 사람이 죽이는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함께 벗어나자고 말하고 싶었다. 이 굴레라는 것은 혼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동물해방이라는 말은 노동해방이라는 말과 함께 외쳐야하는 말이었다.

계속되는 감염병과 기후변화로 인한 여러 재난에, 축산업은 동물의 강제 임신부터 사육과 도살, 포장까지 '원스톱'으로 이루어지는 '스마트 축산', 넥타이를 매고 출근할 수 있는 '미래 축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축산업의 목표는 수익창출과 생산비 절감. 이곳에서 노동자는 비용이 되며 동물은 상품이 된다. 아무리 넥타이를 매도, 똥이 가슴에 묻지 않아도 축산업의 굴레에서 노동자도 동물도 착취와 수탈의 대상일 뿐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너의 해방이 나의 해방이라고, 함께 외칠 구호를 만들자고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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