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한국은 대학 문제가 정말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이전에도 대학 위기론은 주기적으로 반복되곤 했으나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라 보인다. 지난 십여 년간 누적되어 온 대학 재정 위기에 더하여 인재 유출 문제가 국가적 의제로 부상했다. 둔감한 교수사회에서조차 '이대로면 망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지고 있으나, 대학의 인식에서는 여전히 지난 세기에 머물러 있는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고등교육은 여전히 남의 영역일 뿐이다.
정치의 무책임 속에서 교수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그것이 오늘날 대학개혁론이 하나의 담론적 유행으로 등장한 이유다.
먼저 역사적 맥락을 간단히 짚어보자. 지금까지 한국 대학의 주요한 기능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고등교육을 '싸게 많이' 공급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잉 학력 사회'에 대한 관습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졸자의 대량생산을 통해 한국 사회는 높은 생산성과 역동성, 안정성을 빠르게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급격한 사회변동에 집단적으로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학습능력과 민주적인 시민의식을 아울러 갖춘 시민들을 단기간에 길러낸 한국의 대학 체제가 한국의 근대적 성장을 가능케 한 주요한 요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박리다매 모델의 한계는 명확했기에 1990년대 이후 정부의 주도로 대학은 '품질 개선' 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교육·연구 환경을 비약적으로 개선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비용의 상승을 수반한다. 등록금 의존도가 높은 한국 대학의 혁신 시도는 급격한 등록금 인상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의 지속적인 등록금 인상은 '대학교육의 박리다매'라는 기존의 합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기에 적지 않은 논란과 반발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한국 대학 체제의 기본 규칙을 설정했다고 할 수 있는 2010년대 초의 '반값등록금' 정책이다.
정책을 도입한 이들의 의중이 무엇이었든, 지난 15년간 지속된 등록금 통제정책의 지속은 두 가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재정 규모 확장이 봉쇄된 대학들은 이후 급격한 물가상승에 직면하면서 긴축재정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는 교육·연구·인건비를 포함한 전반적인 비용 감축으로 이어졌다. 시간강사 문제, 학문후속세대 문제, 우수인력 유출문제, 대학원 진학 미달 등 진영을 떠나 한번쯤은 마주하게 되는 여러 대학 문제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학 재단 적립금이 문제라는 반론도 있으나, 이는 국공립대 역시 교육·연구환경의 악화로 고통받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 등록금 통제 하에서 각종 예산 지원사업을 미끼로 정부가 대학을 통제하는 구도가 강화되면서 불필요한 구속·제약이 늘었다. 물론 이를 정부가 대학에 다양한 혁신과 개혁을 요구할 기회로 볼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정권·교육부에서 그 정도의 시야를 갖춘 행위자는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다.
'통제하되 책임지지 않는' 정부의 외면과 방치 속에서 서서히 말라비틀어져 가던 대학의 현실은 이후 한국 사회가 거대한 변화들을 마주하면서 비로소 조금씩 조명받게 된다. 우선 모두가 알고 있는 학령인구의 감소 및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지방(대)소멸 위기가 있다. 학생 수의 감소는 비수도권 소재 대학의 존폐위기를 가져오고, 대학의 소멸은 다시금 해당 지역 청년 인구 및 관련 상권의 축소를 초래한다. 대학의 지속이 지자체 및 지역 정치인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인한다.
그 중요성에 비해 덜 주목받고 있는 다른 요인은 국제화다. 간단히 말해 각국이 고급 인력 유치 경쟁에 뛰어들면서 더 많이 교육받은 사람이 더 쉽게 해외로 나가버리는 인력유출 문제가 현실적인 쟁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산업·지식장이 발전하면서 이제 빠른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지식생산의 모델을 바꾸어야 생존경쟁이 가능하다는 절박감도 점차 확산되었다. 오늘날 대학개혁론의 범람은 이처럼 2010년대의 게임 규칙을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지금 대학개혁 논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상황을 요약하기란 어렵지 않다. 논의의 주 무대는 학술지나 보고서가 아닌 언론지와 SNS, 뉴미디어이며, 발화자는 대체로 고등교육·대학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이공계·경제학 분야의 교수들이다. 고등교육 전공자가 희소할뿐더러 대학에 관련 전공자를 위한 자리도 부족한 사범대 혹은 한국 학계의 현실을 고려하면, 언젠가 고등교육 전문가가 등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누구라도 입을 여는 게 옳은 일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현재 제시되는 대학개혁 논쟁이 대체로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현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개혁론 상당수는 전체 대학보다는 개별 학과 단위에서나 고민해볼 사항에 머무르며(스케일은 작고 디테일은 없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가혹한가?) 한국 대학의 역사적 궤적, 사회적 기능, 지식생태계 내의 위치와 같은 사항에 대한 인식은 없다.
"일부 해외 명문대학처럼 성과보상을 많이 주고 경쟁을 강화하면 된다"는, 정책이라기보다는 레토릭이라 할법한 개혁론과 "그건 한국의 현실과 안 맞다"는 뻔한 반론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양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위기와 개혁은 외면할 수 없는 쟁점이니만큼, 우리의 대화를 좀 더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제언을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자.
첫째, 우리는 세계적인 경쟁 못지않게 한국 대학의 전통적인 목표, 즉 고학력 중산층 시민의 안정적인 공급 역시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진정한 위기는 한국 대학이 국제적인 경쟁력만이 아니라 그 전통적인 기능 수행에서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있다.
둘째, 개별 대학의 경쟁력 확보도 중요한 과제지만, 지식생태계 전반에서 전체 대학의 분업화된 지형 역시 논의의 시야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 현대 대학개혁론은 대체로 극소수의 '상위권' 대학 및 지역거점대학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실제로 교육과 연구 모두에서 다수는 그 바깥의 영역에 있는 대학들이다.
셋째, 교수 처우 못지않게 대학의 행정이나 연구·교육 지원 체계 등 대학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요인들 역시 고려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지속가능성의 고민을 포함한다.
넷째, 이제 교수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정치권만 바라보며) 혼자 외치는 대신, '대화와 논쟁'을 좀 제대로 해보면 어떨까? 치열한 토론이 논변의 질을 높인다는 가르침을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때가 됐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대학 체제가 축적해온 갖가지 실패와 시행착오의 경험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다. 단지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배울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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