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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배송을 넘어, 사람 중심의 시간 체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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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배송을 넘어, 사람 중심의 시간 체제로

[시민건강논평] 지금은 사회적 감속이 필요한 때

최근 새벽배송 논쟁이 뜨겁다. 야간 배송 노동이 얼마나 건강에 해로운지는 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불과 일주일 전에도 제주에서 과로에 시달리던 쿠팡 협력업체 소속 새벽배송 노동자 한 명이 교통사고로 숨지는 일이 있었다. 반건강적인 새벽배송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안타까운 죽음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동료 시민인 택배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새벽배송에 대한 규제와 제한이 시급히 필요하다.

물론 새벽배송과 연관된 산업 생태계가 넓고 촘촘하게 짜여진 상황이므로 그에 따른 반발과 여파가 클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새벽배송과 주7일 배송이 금지될 경우 연간 50조 원이 넘는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허나 특정 시간대 배송이 제한된다고 해서 상품 수요 자체가 소실되는 건 아닐테니 다소 과다 추정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또 설사 경제적 피해가 크더라도 건강권 보장이라고 하는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해 우리 사회가 감수해야 할 몫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과정에서 택배 노동자들의 생계가 위협받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다. 건강에 나쁜 줄 알면서도 많은 택배 노동자가 심야배송 제한에 반대하는 것은 그만큼 노동조건이 열악하고 이를 대체할 양질의 일자리가 적기 때문이다. 택배 물량이 줄더라도 소득이 보전될 수 있도록 배송료가 충분히 인상되어야 하고 이를 기업과 이용자들이 나눠 부담해야 한다. 아울러 물류 업체들이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도록 의무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가격 경쟁이 치열한 택배 업계의 현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요구가 허황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이윤이 크게 줄어드는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기업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경제성장에 몰두하는 정부 역시 기업의 이해관계에 치우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우리 시민들이 기업과 정부를 압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인적인 고강도 노동을 강요하는 회사들을 강력하게 규탄하고 필요시 대대적인 불매운동에 나서는 한편 정부를 향해 실효성 있는 규제 시행을 촉구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물론 새벽배송 서비스 이용자들의 편의가 감소되는 문제 또한 고려될 필요가 있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워킹맘'의 청원과 같이 새벽배송은 "저녁 늦게 퇴근하는 맞벌이 부모"에게 부족한 시간을 벌어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를 동등한 권리 간 충돌로 보는 건 곤란하다. 배송제한에 따른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하겠지만, 소비자의 권리가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이라는 보편적 인권보다 우선되어선 안 된다. 이는 대체 불가능한 권리이고 그 피해를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리의 위계를 인정하는 것이 곧 새벽배송이 절실히 필요한 '시간빈곤인'들의 사정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와 함께 사회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고 있는 동료 시민들의 기본권이 지켜질 때 나의 기본권 또한 지켜질 수 있다는 자각 아래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개인 선택의 자유가 일부 제한되는 것을 용인하면 어떻겠냐는 간곡한 요청인 것이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시기 건강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강제적 방역 조치에 따랐던 것처럼 말이다.

▲ 5일 서울 시내의 한 쿠팡 물류센터. ⓒ연합뉴스

새벽배송 반대운동에 동참하는 일은 우리에게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안겨준다. 첫째, 불편을 감수하는 자발적 실천을 통해 윤리적 불편함을 덜 수 있다. 앞서 새벽배송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청원인의 말 이면에는 새벽에 '저속노화' 식품을 받는 일과 택배 노동자의 '가속노화'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 감춰져 있다. 우리는 새벽배송에 저항함으로써 이것이 야기하는 노동자의 불건강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윤리적 가책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둘째, 오늘날 가장 긴박한 시대적 과제인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물류 산업의 막대한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즉각적인 방법 중 하나는 배송 대기 시간을 늘려 차량 이동 횟수를 줄이는 것이다. 우리는 새벽배송 제한을 비롯한 '느린 배송'을 선택하고 촉구함으로써 가파른 기후변화 속도를 늦추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셋째, 우리 삶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 시간체제에 대한 저항적 실천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우리는 새벽배송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만큼 삶의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생산적'인 일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배송은 갈수록 우리를 바쁘게 만드는 가속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회를 가속화하는 주범이 자본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무한한 자본축적을 위해 상품도, 사람도 더 빨리 유통·순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속화 논리는 우리의 시간 규범과 생활 방식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일례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가 자주 고장나는 까닭은 사람들이 걷거나 뛰기 때문인데, 이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도시적 습속이자 자본의 리듬에 익숙해진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가 말했듯이(<소외와 가속>, 2020), 사회적 가속이 문제인 것은 자유시간 뿐 아니라 우리가 '좋은 삶'을 꿈꾸고 누릴 수 있는 역량을 빼앗기 때문이다. 가속은 단지 자본의 힘과 역동성을 증대시킬 뿐이다.

가속체제는 비인간적인 '과로리듬'(김영선, <존버씨의 죽음>, 2022)에 적응하도록 강요하며 우리를 더 불행하고 더 아프게 만들고 있다. 지금은 사회적 감속이 필요한 때다. 덜 일하고 덜 소비하는 삶이 더 자유로운 삶일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간체제를 상상해야 한다. 그 일환으로 사람 중심 관점에 따라 새벽배송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가속체제에 맞서 우리 모두의 행복과 건강을 지키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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