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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한강·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면의 '불협화음'을 말할 공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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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한강·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면의 '불협화음'을 말할 공간이 필요하다

[<연극in> 폐간 반대 연속기고④] 말이 사라질 때

2012년 처음 발행된 웹진 <연극in>은 지난 12년 동안 한국 연극계와 공연예술계를 대표해온 상징적인 저널이었다. 그러나 서울문화재단 대표와 경영진이 바뀐 지금,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일방적 진단을 받고 폐간 절차를 밟고 있다. 웹진 <연극in> 폐간 대책위원회는 기고를 통해 공연예술의 언어와 기억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편집자

공연 시장이 유례 없는 호황이라고들 말한다. 대극장 공연의 가격은 20만 원을 호가하고 K-뮤지컬이 토니상을 수상했다. 해당 뮤지컬의 창작자는 대통령과 만나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노력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BTS, 한강,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 세계시장이 주목하는 텍스트가 한국의 힘을 보여준다며 SNS를 들썩이게 했다.

하지만 문화예술 강국이라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돈 안 되는 문화예술의 가치를 멸시한다. 식당, 공연장, 미술관, 심지어 서점까지도 사진 찍을 만한 곳인지 여부가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작품의 사진, 작품을 보고 있는 자신의 사진 등 다양한 각도의 사진을 찍고, SNS를 비롯한 여러 미디어에 게재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가 된 것이다.

모두가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는 이미지의 세상에서 텍스트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한국문학을 읽고 비평하는 법을 가르치는 국어국문학과는 이미 대학에서 통폐합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연극과 영화, 예술을 가르치는 전공 역시 취업률이 낮아 대학평가에 불리한 전공이라며 대학본부의 구박을 받는다. 그러니 경영자의 입장에서 글로 가득한 웹진은 수지타산이 좀처럼 맞지 않는 구닥다리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숫자가 전부라면 말이다.

<연극in>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말을 만들어내는 매체였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반응하고 목소리를 냈다. 기획자들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필자들을 발굴했고, 그에 힘입어 2019년 <연극in>에서 페미니즘 시각으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는 칼럼을 썼다. 전문적으로 연극비평이나 연구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연극 현장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저 관객으로 가끔 공연을 보러 다니는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연극in>의 독자가 됐다. 내가 미처 몰랐던 연극 소식을 알게 되었고, 문화예술인들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엿볼 수도 있었다. 다원예술, 장애예술, 블랙리스트 등 다양한 문화예술계의 의제가 <연극in>에서 공론장을 만들었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연극인들의 생활 전반을 돌아보는 기획도 인상 깊었다.

극장이 멈춘 코로나 기간에는 연극인들이 코로나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조망했다. 때로는 치열한 고민을, 때로는 따듯한 돌봄을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폐간이 선언된 순간까지도, <연극 in>은 연극인들의 삶의 조건과 실태, 관계망을 질문하고, 한국예술이 지금 만나는 현장에 주목했다. 연극 장 밖의 이야기들과 항상 접속하고 시대의 흐름을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뿐만아니라 <연극 in>은 장애 예술, 극장의 접근성, 성폭력 반대 등 연극계뿐 아니라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의제들을 담아내는 곳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식의 담론 생산은 연극비평잡지나 학회에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하지만 학술지나 종이잡지의 접근성이 현저히 낮아진 지금, 시민들이 학술지에 접근할 방법은 많지 않다. 학술지를 읽는 비연구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웹진은 다르다. 여러 포털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으며, 클릭 한 번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니 대중들도 웹진이 생산하는 ‘말’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지난 6월 3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열린 제11차 대학로포럼에서 웹진 <연극in> 잠정 휴간 사태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웹진 <연극in> 폐간 대책위원회

<연극in>에서 기획했던 장애 연극과 관련된 담론을 살펴보자. 휠체어 장애인이 볼 수 있는 연극이나 장애 예술을 위한 다양한 워크숍 소식을 접할 수도 있다.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다. 장애 연극을 창작, 비평, 연구하려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연극 in>과 만날 수밖에 없다.

한국문학 연구자들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 '장애연극의 접근성과 재현의 딜레마'에는 <연극 in>의 기획, 대담, 칼럼 등 다양한 글이 인용된다. 김지수의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장애연극? 물길을 만들어온 장애연극!!—장애예술에 대하여'(웹진 <연극in>, 서울문화재단, 2019.10.24.), 정소은 정리·김지수 권지현 백수연 신재 이연주 대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장애예술 #3—장애연극 창작자편'(웹진 <연극in>, 서울문화재단, 2019.12.5.) 김지수·양근애·임대륜·임지윤·하은빈·홍성훈의 대담 '장애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연극in>, 2023.11.9.) 양근애의 '보이(지않)는 장애 (장애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웹진 <연극in>, 2023.11.9.)와 '장애는 재현할 수 있는가(보이는 것과 은폐된 것을 질문한다)'(웹진 <연극in>, 2023.11.30.) 등이다.

장애연극에 관해 가장 활발하게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 매체가 <연극in>이기 때문이다. 이는 <연극 in>의 확장성이 연극 장을 넘어서 한국문학 학술 장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연극in>은 연극인들이 만들고 연극인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매체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호흡하고 확장되는 플랫폼이다. 한국문화의 세계화로 떠들썩한 지금, <연극in>의 사업예산 축소와 사업 재편을 이야기하는 것은 왜일까? 약 10년간의 역사를 축적한 플랫폼을 버리고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서일까?

<연극in>의 발행 주체인 서울문화재단은 예술창작지원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는 공공기관으로서, "예술가를 위한 도시, 시민이 예술로 즐거운 도시"를 표방한다. <연극in>이 이 프레이즈와 충돌하는 것일까? <연극in>이 예술가를 위한 매체임은 분명하니 후자를 질문해 보자. 시민이 예술로 즐거운 도시는 무엇일까?

가을을 맞아 한국 전역에서 온갖 축제가 열리고 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몰린 김천김밥축제부터 진주유등축제, 한강불꽃놀이축제까지 축제가 없는 주말이 없을 정도다. 환하게 웃는 사람들의 얼굴과 들뜬 표정이 담긴 사진이 SNS에 넘실거리고, 축제 주최 측은 방문객 수와 경제적 파급효과 등을 수치화한다.

축제 관련 예산은 해마다 증가한다. 물론 서울문화재단이 케이팝과 먹거리로 흥겨운 지역축제를 기획하거나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즐거운'이라는 말이 내게 불편한 것은 '시민이 즐겁지 않은' 예술의 위치를 자연스레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랑시에르는 정치를 '몫 있는 자'와 '몫 없는 자'를 나누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는 정치와 치안을 구분하면서, 치안은 기존의 질서와 안전을 지키는 것, 즉 '몫 있는 자'들의 몫을 지키는 것이며 정치는 '몫 없는 자'들을 위한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롭고 즐거운 공동체에 '불화와 노이즈를 발생시켜야 한다. 왜 누구는 몫이 없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연극in>은 기꺼이 이 불협화음을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연극인의 공공성을 주장하고, 문화예술인의 '몫'을 주장했다. <연극in>은 "시민이 예술로 즐거운 도시"를 만들기에는 너무 불편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연극in>은 예술인 생활 보호나 문화예술계 성폭력 반대 등을 통해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발신해 왔다. 즐겁고 유쾌한 말은 시장이 충분히 해주고 있으니, 공공성을 가진 재단에서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in>이 만드는 '불화'는 시민이 즐거운 도시에는 불필요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문화예술의 '정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길 바란다.

서울문화재단의 홈페이지에는 다양한 포럼, 축제, 전시 등의 이벤트들이 메인 배너를 차지하고 있다. 빼곡히 들어선 사업들은 서울문화재단의 평가보고서를 현란하게 수놓을 것이다. 새롭고 혁신적인 사업들이 오래되고 낡은 '불편한' '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말' 없이 문화예술은 존재할 수 있을까. 공공의 자원은 누군가는 즐겁지 않은 '말'을 기꺼이 하는 데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동안 '말'이 사라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해왔다. 식민지, 독재, 검열, 블랙리스트 등 말과 함께 예술이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 말을 지키기 위해 싸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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