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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편리해지자

[오찬호의 틈새] 새벽에 일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희망하나요?

최근 '조직의 역동성을 방해하는 몇 가지 착각'이란 주제로 기업 강연을 준비하면서 예전에 직장인을 상대로 진행했던 글쓰기 수업의 한순간이 떠올랐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여 년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했던 이들이 회사에 신뢰가 생길 때가 언제였는지를 차분하게 고민하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모두가 의외의 답을 비슷하게 하고 있음에 적잖이 놀랬던 적이 있었다.

참된 조직의 역동성은 때론 동적인 것과 무관했다. 심지어 아주 정적인 것들로만 설명되기도 했다. 회식의 부작용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남과 얽히기 싫은 걸 존중하자는 차원과도 무관하다.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적당한 파이팅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역동성, 성공하면 확실하게 보상하는 역동성, 실패에도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는 역동성 등등은 결코 불필요한 게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조직을 신뢰한다고 말하진 않았다. 믿는다는 건 고마운 감정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성취의 경험은 역동적이다. 돈을 얼마나 벌었고 승진을 어디까지 했는지를 말할 땐 이미 말투부터가 살아 움직인다. 과감했고, 전진했고, 매진했고, 치열했고 등등의 저돌적 어휘에는 스스로를 존경하는 냄새가 듬뿍 담겨 있다. 그런데 내가 조직을 존경하는 순간이 있다. 보너스 많이 받을 때도 위로부터 인정받았다고 생각하지, 존경한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취의 들뜸이 감추고 있는 문제점이 시스템 안에서 결코 유난스럽지 않게 개선돼 나가는 것을 마주하는 감정은 좀 남달랐다. 누군가는 '조직이 속도를 조절하면서 바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뿐이겠는가. 가정에서도 아빠의 사업 번성, 엄마의 승진, 아이의 명문대 합격이 서로의 신뢰 관계를 보장하진 않는다. 신뢰는, 앞만을 향하다가 보지 못한 옆에 손을 뻗을 때 형성된다.

성취의 환희는 많은 것을 가린다. 지금에야 당연해도, 오랜 시간을 수면 아래에서 잠자코 찌그러져 있어야 했던 것들이 많았다. 조직의 역동성은 연차 같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로 이어졌고, 육아휴직 따위는 생각도 안 하는 우주의 기운을 만들었다. 초과근무를 정확히 따지는 건 역동성을 훼손하는 예의 없는 행동일 뿐이었다. 조직의 성과, 개인의 성취 그리고 기업의 성장이라는 표현이 강조될수록 차별과 혐오에 둔감한 표현들이 나부꼈다. 따지면, 대안도 없으면서 비판만 하느냐 따위의 말들이 역동적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니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의미 있게 인지한 사람들의 곧은 의지와 조용하면서고 과감한 결단이 몇 번 순환을 하게 되면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조직도 변한다.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이 지배하는 공간이, 원래 그런 건 없다면서 논리에 기반한 토론을 한다. 그리고 이를 비용의 차원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조직의 문화가 변하면, "에이, 그런 걸 일일이 어떻게 다 신경을 써?", "그런 거 따지려면 회사 안 다니면 되지" 등의 말이 얼마나 협소한 논거인지를 구성원들이 몸으로 이해한다. 어떤 변화는 속도의 문제와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하면, 조직은 천천히 좋은 쪽으로 움직인다. 그 기억은 분명 '흥분의 도가니'로 해석될 성질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몸에 새겨지는 '조용한 신뢰'로 이어졌다.

▲쿠팡이 올해 3개 분기 연속 2천억원대 영업이익을 거뒀다. 3분기 매출은 작년 동기보다 20% 성장한 12조8천억원대로 분기 기준 최대를 기록했다. 미국 뉴욕증시 상장사인 쿠팡Inc는 3분기 영업이익이 2천24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1.5% 증가했다고 5일 공시했다. 사진은 5일 서울 시내의 한 쿠팡 물류센터. ⓒ연합뉴스

새벽배송은 왜 삶을 지탱하는 필수 서비스가 되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국 사회의 방향과 속도는 더 이상 이전 상태로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배송이 빨라진 만큼, 사람들은 역동적으로 하루를 살고 있다. 새벽배송은 한국인들에게 '좀 편리하긴 하죠' 정도의 의미를 넘어 '삶을 지탱하는 필수 서비스'가 되었다. 막상 새벽배송이 불가능한 곳에선 "있으면 좋지만, 뭐 없다고 못 사나요" 정도의 추임새만 떠도는데, 가능한 곳에선 '없으면 큰일 난다'며 기겁한다. 응급실이 사라지는 것처럼 반응한다.

삶을 지탱한다? 이 얼마나 역동적인 표현인가. 아이들에게 냉동 볶음밥이나 해 줄 상황인데, 자기 전에 주문한 샐러드를 아침에 아이들에게 먹이는 그런 꼼꼼함이 선사하는 뿌듯함 때문일까? 새벽배송 덕분에 건강한 한 끼를 먹을 수 있음에 감동받는 걸까? 아침을 이렇게 '프레시'하게 시작하니 회사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걸까? 새벽배송 덕분에 나는 건강해지고, 나의 경쟁력은 지속될 거다.

이것뿐이겠는가. 늦은 밤에 직장 상사의 부친상 문자를 받았다고 치자. 다음 날 퇴근 후 바로 장례식장을 가야 하는데 적당한 넥타이가 안 보인다. 없으면 없는 대로 가면 될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큰일이다. 새벽배송의 시대엔 "집에 없어서"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클릭 한 번이면 아침에 집 앞으로 오는데 그런 건 다 핑계일 뿐이다. 새벽배송 덕분에 나는 비즈니스 예절 점수가 깎이지 않고 회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같은 것일까? 아이의 학교 준비물을 챙겨야 하기에 새벽 배송이 필요하다는 논리와 말이다. 모든 게 항상 제때 준비되어야만 하는 사회라서 새벽배송의 수요가 있는 건지, 공급이 있으니 모든 게 제때 준비되는 걸 기본값으로 여겨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 이유로 새벽배송을 신뢰한다. 그걸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 정도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를 신뢰할 수 있는지는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경쟁력 없으면 도태되어도 마땅하다고 하니까, 도태되지 않으려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잊지 말자. 그 몸부림, 절대 인간 본성이 아니다.

이런 토대 위에 무턱대고 새벽배송 금지라는 표현을 전면에 내세운 건 아마추어 같은 접근일 거다. 하지만 '금지'라는 표현이 '오늘과 다를 내일의 불편함'만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논의가 이런 식으로 튈지는 몰랐다. 사회에는 언제나 새벽에 반드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은 좀 놀랍다. 그걸 금지하자는 게 아닌데, 그걸 금지하자는 거냐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다.

본인이 선택한 노동이기에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은 무섭다. 그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이 새벽노동 '때문에' 건강을 잃는 명확한 사실이 본인 선택이라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공동체를 누가 신뢰한단 말인가. 양질의 일자리는 급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배달 노동을 양질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이건 쿠팡이 다른 중소기업보다 대우가 좋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집요하게 붙들고 따져야 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여기에 왜 너는 땀 흘리는 노동을 해봤냐 따위의 말초적 반론이 겹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새벽에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새벽 노동 금지가 타당한지를 묻는 건 고약한 심보다. 당장 밥벌이가 사라지는 걸 좋은 정책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쿠팡 물류센터로 사람들을 데려다주는 전세버스 업체에서도 일자리가 줄어든다며 항의했다. 그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사례 삼아 '누가 감히 새벽배송을 금지하려고 하는가' 따위의 말을 언론이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노동도 비판할 수 없다.

여기까지만 편리해지자

당신은 새벽에 일하는 노동자가 더 늘어나길 원하는가? 이 간단한 질문이 빙빙 돈다. 노동자 이야기를 하는데, 새벽배송이 선사한 역동적인 하루를 산다는 소비자들의 간증이 나부낀다. 그러니 조만간 전국 어디에서나 새벽배송은 기본값이 될 것이다. 그때는 누구도 변명할 수 없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의 소풍날에 김밥을 준비하지 않은 건 다 게으른 부모의 핑계일 뿐이다. 준비물 깜빡?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새벽배송의 나라에선, 사람 사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푸념은 등장할 수가 없다. 적응, 오직 적응뿐이다. 그리고 그 적응의 크기만큼, 새벽노동의 고충을 이해하는 그릇은 작아진다. 노동자의 건강보다, 내 삶의 지탱이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 사회, 당신은 신뢰할 수 있는가? 아니라면, 여기까지만 하자. 여기까지만 편리해지고 여기까지만 빨라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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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납작한 말들>(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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