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에게 근로자 참여 하에 각 사업장이 스스로 위험 요인을 파악하는 위험성 평가를 매년 실시하도록 정한다. 그런데 이 때 위험의 기준은 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주류 인종의 성인을 전제하고 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난 다양한 몸은 고려되지 못한다. 여성이 대표적 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산하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 위험성 평가팀은 '젠더 관점을 포함한 위험성 평가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세 편의 글을 기고한다.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 수전은 병원에서 주로 '가벼운 일'을 한다. 그녀의 하루는 서거나 무릎을 꿇고 손이 닿는 모든 곳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로 시작된다. 침대 주변과 의자, 커튼봉, 의료기기 표면을 닦고, 하루 150개가 넘는 쓰레기통을 비운다. 이처럼 불편한 자세로 반복 작업을 수행해야 하지만, 대형 쓰레기를 옮기거나 무거운 청소장비를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의 일은 '가벼운 일'로 여겨진다. 캐런 메싱의 <일그러진 몸>(72–73쪽)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사례는 성별에 따라 분리된 업무가 실제 노동 강도보다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평가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여성 노동자의 신체 부담은 공식적인 평가 과정에서 쉽게 가려지고 과소평가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위험을 보다 정확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젠더 관점의 위험성 평가가 필요하다.
해외 지침이 말하는 산업안전에서 '젠더 관점'의 필요성
해외의 여러 산업안전 관련 지침은 산업안전보건 정책 전반에 젠더 관점을 도입할 것을 권장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작업장 내 안전과 건강정책의 성주류화를 위한 가이드라인」(10 Keys for Gender Sensitive OSH Practice – Guidelines for Gender Mainstreaming in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에서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 고용 형태, 사회적 역할, 사회 구조, 생물학적 차이가 남녀가 직장에서 경험하는 위험과 건강 영향의 양상을 다르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ILO는 특히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을 강조하는데, '성 주류화'는 입법·정책·프로그램을 기획·집행·모니터링·평가하는 모든 과정에서 성별 관점을 통합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ILO가 성 주류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성 주류화를 통해 남녀가 겪는 구체적인 위험과 작업환경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현실적인 산업안전보건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당 가이드라인은 이러한 원칙을 구체화하여 10가지 실천 항목을 제시한다.
한편, EU의 여성 권리와 성평등 위원회(The Committee on Women's Rights and Gender Equality)역시 2014-2020년 EU 산업안전보건 전략 체계에 젠더 관점을 반영할 것을 권고했다. 위원회는 '여성이 수행하는 일은 안전하고 덜 위험하다'는 오랜 고정관념이 "조사 부족 → 위험 미발견 → 조사 필요성 부재 → 조사 지연 → 위험 비가시화”라는 악순환을 낳는다고 비판했다. 이 악순환 속에서 여성 노동자의 실제 위험은 더욱 숨겨지고, 정책의 우선순위에서도 뒤로 밀리게 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업무 특성과 근골격계 부담, 젠더 기반 폭력, 감정노동 및 심리사회적 위험 등 기존 평가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배제되었던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반영하고, 남성과 여성의 경험을 분리해 분석할 수 있는 통계·연구체계가 갖춰져야 하며 이를 기반으로 산업안전 정책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ILO와 EU 모두 직장 내 안전과 건강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성 주류화 접근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성별에 따른 차이를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정책 전 과정에 이를 반영할 때만이 산업안전보건정책의 실효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해외 '젠더 관점' 위험성 평가 및 개선 사례
여러 국가에서는 산업안전보건 정책과 위험성 평가 제도에 젠더 관점을 반영하여, 기존 제도에서 간과되었던 성별에 따른 위험 차이를 드러내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호텔·숙박, 미용, 돌봄 등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업종을 중심으로 성인지적 근로감독(Gender-sensitive labour inspection)을 시행하고 있다. 호텔 및 숙박업 근로감독에서는 기존 위험성 평가에서 고려되지 않았던 감정노동과 근골격계 부담이 주요 위험요인으로 드러났다. 노동자의 62%가 요통을, 58%가 목·어깨 통증을 호소했으며, 10명 중 7명이 고객 응대 과정에서 감정적 스트레스를 경험한다고 응답하였다. 감독 결과, 산업안전보건기관은 서비스 과정의 감정노동을 위험요인으로 공식 인정하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휴식제도 및 인체공학적 설계를 반영하도록 지침을 개정하였다.
또한 재택 돌봄 산업 감독에서는 여성 돌봄노동자의 장시간 노동, 가사 이중부담, 감정소진이 주요 위험요인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따라 근로감독관은 신체적 위험뿐 아니라 심리사회적 위험(psychosocial risk)을 근로감독의 핵심 항목으로 포함하고, 휴식시간 확보·노동시간 제한·정서적 부담 완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이러한 개선의 기반에는 오스트리아의 성인지적 근로감독 점검요소(Gender-Überprüfungsfragen zur Arbeitsplatzevaluierung)가 있다. 이 점검표는 산업안전 감독 시 성별에 따른 위험 인식의 차이를 반영하기 위해 구성된 것으로, 대표적인 질문은 아래와 같다. 이 점검체계는 위험성 평가 전 과정에 성별 관점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도록 하는 실질적 도구의 역할을 한다.
▲ 여성노동자(남성)에 대한 위험과 부담이 과소평가되거나 아예 인식되지는 않았는지
▲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의 특정 위험을 인정하거 않거나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예를 들어, 노동환경에서의 정신적 스트레스, 과도한 복장규정, 가임기 위험에 대한 무시 등)
▲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성별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하고 앞서서 위험분석과 평가조치를 시행하고 있는지
▲ 산업안전보호조치를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여성과 남성을 대표하는 노동자가 적절하게 참여하고 있는지
독일은 산업안전보건법(Arbeitsschutzgesetz)과 그 시행령을 통해 위험성 평가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여기에 성인지적 관점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근로제공 및 모성보호 시행령(Verordnung zum Schutze der Mütter bei der Arbeit)은 사용자가 임산부와 수유부에게 발생할 수 있는 유해·위험요인을 평가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제1조). 또한, 사용자는 평가 결과를 임산부 및 수유부뿐 아니라 다른 근로자와 근로자대표에게도 공유해야 하며(제2조), 그 결과에 따라 근로조건 재설계, 직무전환, 유해작업 제한 등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한다(제3~5조).
이와 더불어 독일은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한 '산업안전보건 체크리스트(Gender Mainstreaming Checklist for OSH)'를 개발하여 위험성 평가 절차를 구체적으로 보완하였다.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산업안전보건 데이터(직원 수, 부서, 사고 통계 등)가 성별로 구분되어 기록·평가되는가?
▲ 위험성 평가를 받는 여성·남성 노동자의 수와 분포가 파악되는가?
▲ 산업안전보건 조치에 여성과 남성의 특정 위험요인(physical, psychosocial)이 모두 포함되는가?
▲ 정보 제공과 예방 프로그램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동등하게 접근 가능하게 설계되어 있는가?
▲ 아르바이트·단시간·비정규직 등 비전형 노동자가 보호체계에 포함되는가?
▲ 관리자·안전전문가 등 산업안전보건 담당자의 젠더감수성이 확보되어 있는가?
▲ 산업안전보건위원회나 운영위원회 등 의사결정기구에서 성별 분포가 고려되는가?
▲ 젠더감수성을 저해하는 구조적 제약이나 장애 요인은 무엇인가?
독일의 사례는 위험성 평가를 법적 의무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젠더 관점을 체계적으로 내재화한 제도적 모델로, 산업안전보건의 목적이 단순한 '평균적 노동자 보호'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신체·사회적 조건을 가진 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안전을 위해: 젠더 관점 위험성 평가
결국 젠더 관점에서의 위험성 평가는 '특정 집단을 위한 특별 대우'가 아니라, 위험을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위험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표준 노동자의 몸에 맞춰진 제도와 장비, 평가 기준은 여성, 이주노동자, 장애인, 고령 노동자의 몸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자연스럽게 가려버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정교한 절차를 갖추어도 위험성 평가는 절반의 진실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위험을 제대로 파악하고 예방하려면, 그동안 평가 과정에서 배제되어 온 사람들의 경험과 목소리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위험성 평가가 진정한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위험을 상상하는 방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평균적 노동자를 중심에 두고 위험을 예상해 왔다면, 이제는 더 다양한 몸과 조건을 가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위험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잘 맞지 않는 보호구, 누군가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기준, 누군가의 고통이 기록되지 않는 평가표를 그대로 둔 채로는 결코 안전한 일터를 만들 수 없다.
젠더 관점의 위험성 평가는 현재의 일터가 지닌 위험을 새롭게 보기 위한 하나의 상상력의 도구다. 이 상상력이 확장될 때, 비로소 위험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고, 안전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할 수 있다. 다양한 노동자의 목소리와 경험을 포함한 위험성 평가만이 모든 노동자가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위험성 평가도 이러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확장된 접근을 도입해야 한다. 그것이 산업안전보건이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이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더 안전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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