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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인 어머니로 인한 공백, 그러나 한국은 제 삶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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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인 어머니로 인한 공백, 그러나 한국은 제 삶이 됐습니다

[한국 입양인 2세 이야기] ⑦ 입양으로 인한 단절, 가사지 않는 고통

제 이름은 심철수(Shim Cheol-soo, Robert Holloway)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고, 아버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입니다. 어머니는 한국인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1966년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에 있는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이후 시애틀로 이주하여 저와 제 누나를 낳았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는 저와 누나가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고 탐구하도록 강하게 격려하셨습니다. 미국 음식을 젓가락으로 먹게 하시기도 할만큼 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가 본 적은 없지만, 늘 제 삶의 길 위에 존재한다고 느꼈던 한국과의 진심 어린 유대를 맺었습니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수년을 보냈지만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그 뜨거운 열망을 이어받았고, 또 다른 우리 가족이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어디인지는 모른다는 사실은 제 안에 큰 공허함을 남겼습니다. 동시에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답을 찾을 때까지 계속 가렵고 괴로운 고통과도 같았고,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필자 ⓒ필자 제공

어린 시절부터 저는 자연스럽게 아시아 문화에 끌렸습니다. 제 친구들 대부분이 아시아인이었고, 학교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를 공부했으며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습니다. 직접 교류할 수 있는 한국인도 없었고, 한국어를 배울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이런 다른 아시아 문화들이 제 영혼을 채우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제 한국 문화와 뿌리에 대한 갈망은 너무나 강해서, 고등학교 졸업 후 전공을 고르고, 어떻게 세상에 기여할지를 결정할 때 한국과 관련된 일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18살에 하와이 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당시 하와이 대학교에서는 미국 내 두 번째로 큰 한국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년 반 후,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그 나라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제 마음 속 한국으로의 끌림이 너무 강해 꼭 직접 한국에 가야만 했습니다. 결국 저는 한국으로 와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저는 진정한 '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사회가 마치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요. 마치 고향을 떠나 학업이나 직장을 위해 몇 년을 살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자신감과 흥분과 비슷했습니다. 길을 알고, 교통수단을 알고, 맛집을 알고,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 달라진 도시의 풍경을 보는 설렘. 저는 전생에 한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고 이번에 돌아온 것처럼 느꼈습니다. 모두가 가족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는 기꺼이 어른 남성을 '아저씨', 여성을 '아줌마' 혹은 '이모'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인종차별이나 낯섦의 시선 같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귀던 여자친구는 주위의 시선과 뒷말을 견디지 못해 저와 헤어졌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지하철에 서 있는데 어떤 여성이 갑자기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진짜인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빨리 흘려보내고, 제가 한국에 온 본래의 이유에 집중하려 했습니다. 저는 환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언어는 현지의 문화를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한국어에는 영어로 번역할 수 없는 단어와 개념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한(恨)'이라는 단어는 전쟁 이후 한국의 정신, 희망, 겸손한 인내를 표현하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를 이해할 때, 비로소 그 문화와 사람들의 경험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어로 대화할수록 상대방과 제 마음이 조화를 이루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어는 제 뿌리와 저를 연결하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단 1년만 머물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고 지난 15년간 법률 관련 및 한국어 동시통역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는 제 생계이자 삶입니다. 현재 저는 36살이고, 시카고에서 아내와 네 자녀(10세, 7세, 4세, 2세)와 함께 살며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4분의 1만 한국인'인데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한국 문화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우리 가족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한국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은 제게 너무도 당연합니다.

저는 약 8년 동안 미국의 한글학교에서 입양인과 2세대 청소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제 아이들도 그 학교에 다녔습니다. 2023년부터는 입양인을 위해 온라인 한국어 수업 멤버십인 '스피크 위드 서울'(Speak With Seoul)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입양은 제 삶의 방향, 자기 정체성 탐구, 가족 구조에 깊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입양의 역사는 분명히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그 영향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부모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모를 모르는 사람의 가슴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습니다. 답을 찾지 못한 잎사귀가 자신이 어느 나무에서 떨어졌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입양인들은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나는 왜 버려졌을까?"

"나는 왜 필요 없었을까?"

"나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일까?"

그리고 하루 중 무작위로 찾아오는 순간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인지 의심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부모를 찾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그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유로 입양인이 친부모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없게 하는 것 말입니다. 제3자가 가족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생활 침해가 아닐까요?

입양인의 자녀들은 입양의 트라우마에서 조금은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부모의 뿌리를 찾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상처 때문에 그 불을 이어가지 못한다면, 제가 가족을 위해 그 불씨를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입양인의 자녀인 저는 어머니 쪽 가족을 찾기 위해 직접 DNA 검사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상처 때문에 가족 찾기를 거부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일찍 세상을 떠난다면, 제 아이들은 저의 어머니 쪽 가족을 찾을 권리조차 박탈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국 국적과 입양 자료 접근에 관한 제 입장은 분명하며, 저는 저희에게 이것이 허용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에 살았을 때 저는 단지 제 정체성의 일부인 문화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민권이 없었고, 한국 국적을 신청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군대에 가야 했기에 관광비자로 머물렀습니다. 결국 한국인과 함께 일하며 한국어를 더 배우고 싶어 불법으로 일하기까지 했습니다. 저 또한 한국의 아들인데, 우리의 뿌리를 찾기 위해 이런 불편을 감수해야 할까요? 우리의 뿌리를 찾는 과정은 단순하고 투명하며, 장벽이 없어야 합니다.

▲이 글을 쓴 로버트 할리 씨와 부인, 자녀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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