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커피업계는 언제나 “다음 해의 트렌드”를 이야기한다. 산미 중심의 라이트 로스팅, 특정 산지의 싱글 오리진, 발효 가공의 실험들…. 흐름을 읽는 건 필요하지만 유행이 취향을 지배하는 순간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커피는 수많은 음식 중 하나이고 본질적으로 기호식품이다. 누군가에게 최고의 한 잔이 다른 누군가에겐 불편한 한 잔일 수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을 현장에서 자주 잊는다.
산미는 분명 커피의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산미만이 커피의 전부는 아니다. 한 잔에는 단맛의 윤곽(수용성 고형분의 농도와 로스팅에서 형성된 향미 화합물), 고소함과 쌉싸름함의 균형(클로로겐산 유도체·퀴닌류의 비터 계열), 감칠맛과 질감(오일·다당류가 만드는 점도와 바디), 여운(애프터테이스트)까지 복합적으로 겹친다.
좋은 커피를 정의하려면 결국 조화와 균형의 언어를 피해 갈 수 없다. 특정한 산미를 ‘고급’의 표식처럼 절대화하는 순간, 커피의 넓은 스펙트럼을 스스로 좁히게 된다.
“맛있다”는 말도 조심스러운 단어다. 사실 더 정확한 문장은 “내 입에는 맞다”다.
바리스타와 로스터는 자신의 기준을 세우되, 손님 앞에서는 번역자에 가까운 역할을 해야 한다. 손님이 산미를 선호하지 않을 때 라이트 로스팅 싱글오리진만 권하는 건 친절이 아니다. 브라질 내추럴의 너트·초콜릿 계열, 수마트라의 허브·스파이스 결, 미디엄 로스팅의 단정한 단맛 같은 다른 경로를 열어 주는 게 직업적 성실성에 가깝다.
한 잔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 것보다, 취향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 더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다.
커피를 지나치게 특별한 존재로 떠받드는 분위기도 돌아볼 때다. 커피는 문화·역사·물리·화학·식품학 같은 여러 학문이 교차하는 흥미로운 소재이다. 그래서 더 겸손해야 한다.
추출의 물리(분쇄 입도·유속·퍼콜레이션), 향미의 화학(揮발성·비휘발성 화합물의 형성과 소실), 인체의 영양·생리(카페인 대사·감각 지각), 문화사(산지와 도시의 소비 양식)… 어느 하나도 단박에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기초 없이 물리·화학을 들먹이며 단정하는 설명은 현장에서 오해를 만든다. 아는 만큼만 정확하게 말하고 모르는 건 출처를 열고 확인하는 태도가 업계의 신뢰를 지킬 수 있다.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을 지키면 커피는 더욱 즐기기 좋은 아이템이 될 수 있다.
먼저 유행과 기준을 분리한다. 트렌드는 소개하되 보편의 기준(깨끗함·균형·복합성·일관성)을 먼저 점검한다. 그리고 취향 질문이 먼저다. “산미를 좋아하나요, 고소한 쪽을 좋아하나요?”, “오늘은 우유가 들어가도 괜찮나요?” 같은 두세 문장이 한 잔의 성공률을 결정할 수 있다.
또한 정보의 정확성을 지켜야 한다. 추출·로스팅·가공에 관한 설명은 실험값과 기본 원리를 기반으로 과장 없이 전달해야 한다. “그라인더를 바꿨더니 바디가 좋아졌다”가 아니라 “입도 분포가 좁아져 택션(입 안의 질감)이 더 매끈해졌다”처럼 관찰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언어를 쓰는 것이 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다.
메뉴 구성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라이트–미디엄–다크 로스팅의 폭, 산지·가공·블렌드의 폭을 최소한으로라도 열어 두어야 한다. 손님의 취향 지형이 넓다는 현실을 메뉴에 반영하는 일은 그 자체로 존중의 표현이다.
업계 안의 커뮤니케이션도 바뀌어야 한다. 누군가의 선호를 “뒤떨어졌다”거나 “입맛이 덜 훈련됐다”고 규정하는 순간, 커피는 환대를 잃는다.
훈련은 취향을 확장할 수 있어도 취향을 표준화하진 못한다. 스페셜티의 어휘를 공유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 어휘를 손님에게 강요하는 순간 전문성은 오만으로 읽힌다. “당신의 입맛이 틀리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먼저 나가야 그 다음에 새로운 향미의 문이 열릴 수 있다.
이 글이 ‘산미를 낮추자’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산미는 여전히 커피의 생명력이다. 다만 산미가 하나의 해석일 뿐 유일한 해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는 말이다.
과일 산미의 명료함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구운 곡물의 고소함과 단맛이 주는 안락함을 찾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커피가 가진 폭과 깊이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우리는 한 방향의 깃발을 내려놓고 다양성의 지도를 펼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커피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커피의 이름이 아니라 태도다. 한 잔을 권할 때 남의 기호를 먼저 묻는 태도, 모르는 건 배우고 아는 건 정확히 말하려는 태도, 유행을 좇되 기준은 지키는 태도.
이 세 가지가 쌓일 때 비로소 커피는 음식으로서도, 문화로서도 제자리를 찾는다. 올해의 마지막 잔을 고른다면, ‘정답’ 대신 ‘존중’을 먼저 떠올리자. 그 순간부터 커피는 더 맛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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