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金海)의 고대 왕국은 가락국(駕洛國) 또는 가야국(伽耶國)입니다."
김종간 김해향토문화연구소장(숭선전 참봉·前 김해시장)은 최근 보도자료를 내고 이같이 주장했다.
김 소장은 "한국의 역사에 5가야(五伽耶)는 있지만 그 속에 금관가야는 없었다"며 "서기 940년에 고려 태조가 입으로 금관을 만들었다. 6가야(六伽耶)가 있다면 김해는 가야국(伽耶國)이고 아라가야·고령가야·대가야·성산가야·소가야 등이 있었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또 "김해의 고대 역사는 서기 42년 수로와 김해의 선주민 구간사회 부족장과 그 백성들에 의해서 창국된 가락국(駕洛國) 또는 가야국(伽耶國)이 서기 532년 까지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김 소장은 "서기 532년 신라에 합병되고 금관군(金官郡)이 되었고 서기 680년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고 서기 757년 김해소경(金海小京)이 되면서 김해(金海)의 이름이 생겼고 서기 940년 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금관(金官)은 신라 합병 후 신라의 지방 자치주로 금관군(金官郡)에서 생겼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 금관(金官)에서 왜 김해(金海)가 되었을까?
김 소장은 "김해(金海)의 이름은 신라 왕권이 가장 강력하게 자리 잡았고 신라의 삶이 가장 풍요롭게 꽃필 때 생겼다"면서 "금관소경(金官小京)에서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많은 이들이 김해(金海)를 금해로 쇠바다 철의 바다로 해석하고 있다"며 "가장 옳은 해석이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옛 가야국의 토기·철기·해양문화는 결코 다른 나라보다 뒤떨어지지 않고 앞섰다"고 하면서 "국가유산 회현동 패총의 회청색 경질 토기와 역사기 초 서기 20년대의 중국 왕망시대(王莽時代 AD 9~22) 화천과 탄화(炭化) 된 쌀알 등이 그것을 웅변해준다"고 밝혔다.
특히 김 소장은 "대성동고분군에서 쏟아져 나온 철정과 철기류는 물론 통형동기와 파형동기 등은 풍부하고 앞선 해양 교류를 증명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이러한 문화는 가야국시대의 것이었다면 신라에 병합된 가야국 힘의 증명은 바로 김유신가(家)다"며 "김유신은 신라에 항복한 가야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증손자다. 할아버지 김무력, 아버지 김서현에서 김유신으로 이어진 가락국 직계 왕계는 흔들림없이 신라의 통일·신라의 안정·신라의 번영을 위해 신라 백성으로서의 그 본분을 다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신라 왕권으로부터 무한의 믿음과 보은의 이름 김해(金海)의 이름을 얻었다는 것.
김 소장은 "가락국(駕洛國)의 별칭이 가야국(伽耶國)이듯이, 김해(金海)는 철의 바다 쇠바다의 뜻과 김해(金海)의 김(金)은(땅으로) 김수로, 海는(바다로) 허황옥을 뜻한다"고 말했다.
김종간 소장은 "금관(金官)은 김 씨가 벼슬을 한 지역이라는 하대의 의미를 담았다면, 김해(金海)는 쇠바다 즉 철기문화의 보고 또는 수로왕 허왕후의 나라의 의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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