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38세 로비야(Lovijah)이고, 세 딸(18세, 12세, 7세)의 엄마이자 '명(Myong)'의 딸입니다. 제 어머니는 1970년에 네덜란드로 입양되었고, 국제 입양으로는 45번째 아동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2012년 4월 24일, 긴 암 투병 끝에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항상 어머니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숨기지 않으셨지만, 그 경험이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또한 백인으로 이루어진 어머니의 네덜란드 양가족을 통해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인 입양인인 어머니와 수리남인 아버지의 혼혈입니다. 수리남은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브라질과 이웃해 있습니다. 노예제 시절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으로 끌려왔고, 수리남은 힌두스탄, 자바인, 크리올, 중국인 등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어머니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힘들어하셨습니다. 수리남 문화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셨고, 그 언어도 유창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는 제 뿌리나 어머니의 출신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도 자신이 버려진 이후 몇 년 동안 고아원에 살다가 네덜란드로 왔다는 것 외에는 많은 것을 알려주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계셨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사람들을 돕는 네덜란드 TV 프로그램인 <Spoorloos (행방불명)>를 보곤 했습니다. 이 방송을 볼 때마다 저는 호기심에 어머니에게 뿌리를 찾으라고 권했지만, 어머니는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호기심은 제 안에 남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 저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40세에 대장암 진단을 받았고, 너무 젊은 나이였기에 의사들은 암이 가족력일 수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다행히 유전적 요인은 아니었지만, 저희 남매는 30세부터 정기적인 검진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의료적 가족력에 대해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어머니의 친가족에게 암이 있다면? 어떤 종류일까? 유전일까?' 이런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수 없었고, 그것이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점점 제 뿌리를 찾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습니다. 한국과의 유일한 연결은 어머니뿐이었으니까요. 저는 DNA 검사(MyHeritage, MyTreeDNA, Kamra325)를 통해 친척을 찾으려 했지만 결과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큰딸이 BTS와 K-팝, K-드라마에 빠지면서 저도 제 뿌리와 더 접하게 되었고, 조금씩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제 자신에게 집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찾아가는 여정이었죠. 그 과정에서 저는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트라우마와 반복되는 감정·행동의 패턴,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어머니와 그녀의 입양,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상처를 의식적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입양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한 인터뷰를 읽게 되었고, 그 글은 제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이제 저 자신이 엄마가 된 지금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사랑을 주는 법을 알지 못했고, 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문장에서 저는 수많은 해답을 찾았습니다. 제가 어떤 부분에서 힘들었는지, 왜 그런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사람은 흔히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입양과 고통의 여정을 더 깊이 돌아보면서, 제 마음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제가 특정 상황을 대하는 방식, 어머니가 했던 방식이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행동했던 방식이고, 저도 같은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세대 간 트라우마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떻게 전해지는지 알고자 파고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사랑을 알지 못했고, 느껴본 적도 없었습니다. 첫 아이(저보다 1년 먼저 태어나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제 언니)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도, 사랑을 주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제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저는 사회가 아직 입양 세대 간에 어떻게 고통이 이어지는지, 그리고 입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은 입양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도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문제에 다가가 치유하며 악순환을 끊지 않는 한, 이런 고통을 짊어지며 이어받고, 다시 다음 세대에 전합니다.
저는 한국 사회에서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작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몇 세대가 더 이런 짐을 짊어져야 할까요?
제가 어머니의 친부모에 대해 더 알 수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제가 DoKAD(한국 입양인의 후손)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자리를 만든다면, 시선은 달라집니다. 오래된 고통과 잘못된 습관을 끊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일어설 시간입니다. 입양인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을 위해.
기획: 한국 입양인 2세(DoKADs) 마이테 마음 & 마릿 킴
번역:김혜담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