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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은송리 호남 첫 교회터’논쟁…교회·예배당 ‘별도 건물’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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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주 ‘은송리 호남 첫 교회터’논쟁…교회·예배당 ‘별도 건물’ 재해석

김중기 오래된미래연구소 이사, 왕실의궤·고지도·증언 등 종합해 규명

호남 첫 개신교회 ‘은송리교회’ 터를 둘러싼 논쟁이 교회와 예배당을 서로 다른 건물로 봐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면서 한층 구체적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 남장로회가 전주 완산의 은송리(현 전주시 동완산동) 언덕에 세운 이 초기 교회는 호남 선교의 출발점이자 전주서문교회의 뿌리로 그 터의 정확한 위치를 둘러싼 학계와 교계의 관심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모양새다.

전북연구원과 (사)오래된미래연구소, 구바울기념의학박물관 등이 주최·주관하고 전주문화원이 후원하는 은송리 첫 교회 관련 학술포럼이 20일 오후 2시부터 전주 예수병원 인근 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포럼에서 김중기 오래된미래연구소 이사는 ‘미국 남장로회 호남 첫 은송리교회에 관하여’를 주제로 한 발표를 통해 “미국인 선교사들을 도왔던 조선인 정해원이 매입해 교회로 개조한 초가와, 문헌에 등장하는 ‘은송리 예배당’은 서로 다른 한옥일 가능성이 크다”며 기존 통설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까지는 1893년 정해원이 구입한 초가 한 채가 곧 ‘첫 예배당’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김 이사는 “선교사 기록과 왕실 의궤, 지도, 초기 교인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교회와 예배당이 분리된 공간이었음을 시사하는 정황이 명확하다”고 강조했다.

▲호남 개신교의 첫 교회인 전주서문교회의 전신인 '은송리교회터'. 동완산동 언덕에서 전주시내 쪽을 바라본 사진의 중앙 공터가 은송리교회터이다. ⓒ프레시안

김 이사가 먼저 주목한 자료는 1899년 작성된 『조경단준경묘영경묘 영건청의궤』다.

황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조경단을 새로 설치하고 완산을 성역화하기 위해 작성된 이 문건에는 완산 은송리 선교사들의 주택과 토지 등 재산 내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교사들이 본채 2채와 행랑 2채의 와가들을 비롯하여 모두 8채의 초가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김 이사는 특히 이 주택들 중 ‘예배당’으로 여겨지는 초가의 규모가 8칸이라고 기록된 점을 주목한다.

반면 해리슨 선교사는 1901년 보고서에서 “집(house)를 증축해 봄에 (6칸에서 2칸을 늘려)8칸으로 확장했다”고 적고 있어, 의궤가 작성되던 시점(1899년)까지는 교회가 아직 6칸 규모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설명이다.

김 이사는 “1899년 의궤에 나온 8칸 예배당과, 1901년 이후 8칸으로 커진 교회를 같은 건물로 보기에는 시차와 칸수에서 맞지 않는다”며 “두 건물이 별개였다는 가설이 오히려 기록에 충실하다”고 지적했다.

‘행운슈퍼 옆’과 ‘백운정 근처’…갈라지는 두 지점

터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은 이미 교계 안팎에서 여러 갈래로 진행돼 왔다.

서문교회는 오랫동안 동완산동 307번지, 이른바 ‘행운슈퍼 옆 공터’를 첫 교회터로 기억해 왔고, 2015년 전주 기독교계 일부는 서완산동 좋은교회 옆 부지를 새로운 후보지로 제시했다.

여기에 2024년 김경미 연구자가 「완산도형」을 분석해 동완산동 명륜맨션 일대를 ‘첫 예배당’ 후보지로 제기하면서 지도가 논쟁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이번 포럼에서 김 이사는 이 지도와 의궤, 항공사진, 구술 자료를 교차 분석해 교회와 예배당의 위치를 분리해 비정했다.

그는 “정해원이 매입해 해리슨이 사랑방을 개조한 ‘첫 교회’는 전주부성 서문 밖 전주천을 건넌 은송리의 언덕 기슭, 도시 쪽으로 더 내려간 집”이라며 “이는 「완산도형」의 맨 아래 초가이자 서문교회가 오랫동안 증언으로 지켜온 ‘행운슈퍼 옆 공터’ 위치가 가장 자연스럽게 겹친다”고 설명했다.

반면 일부 연구자들이 첫 교회 건물로 추정하는 「완산도형」 속 ‘미국인 점옥처’ 영역 좌측 상단의 직사각형 초가는 별도의 예배당 건물으로 보아야 하는데 현재 관음정사 언덕을 돌아 옛 백운정 마을 안쪽, 거성연립 근처에 자리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해원이 ‘하은송리’에 주택을 샀고, 선교사들의 벽돌주택이 ‘완산 백운정 부근 높은 지대’에 있었다는 김세열 목사의 기록과, 「완산부지도십곡병풍」에 나타난 상산정·하산정의 위치도 근거로 제시했다. 벽돌주택 옆의 직사각형 초가도 당연히 백운정 근처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위치를 명륜주택 근처로 추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김 이사는 “의궤에 기록된 선교사 소유 토지가 최소 18두락(약 1800평)에 달해, 명륜맨션·진료소 주변 평지로는 전체를 설명하기 어렵다”며 “완산칠봉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1954년 항공사진, 1918년 전주지도 등을 겹쳐보면 전주선교지부는 관음정사 옆 능선을 돌아 백운정 마을 일부까지 포괄하는 상당한 규모의 선교 단지였다”고 확인했다.

초기 교인들의 ‘발로 기억한’ 자리

문헌과 지도 분석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것은 초기 교인들의 증언이다.

김 이사는 특히 서문교회 5대 담임목사 김인전의 사촌 김대전, 그의 모친 이숙정, 전주 첫 세례자 ‘유씨 부인’ 김성희의 아들 유춘경 등으로 연결되는 증언의 계보에도 주목했다.

▲전주서문교회의 증언자들. 맨 왼쪽 사진 앞줄 가운데가 이숙정, 가운데 사진 맨위 빨간 동그라미가 유춘경, 그 앞 왼쪽 첫번째가 김대전이며 오른쪽 사진은 1943년 전주서문교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맨처음 세례를 받은 김성희 집사에게 전달한 선물. ⓒ

1921년 전주여자성경학교 1회 졸업생이자 서문교회 여집사·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한 이숙정은 어린 아들 김대전과 주일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서천교를 건너 완산칠봉으로 소풍을 갈 때마다 “이곳이 우리 교회의 옛터란다”라며 지금의 행운슈퍼 옆 공터를 가리켰다고 한다.

김대전은 훗날 서문교회 장로이자 『전주서문교회 100년사』 집필자가 되어 이 증언을 수차례 후배들에게 전했고, 현재까지도 김상수 장로 등의 구술로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증언자인 유춘경은 1897년 전주 첫 세례자 5인 가운데 한 명인 김성희의 둘째 아들로, 그 교회에서 20살 때 세례를 받은 모친의 손을 잡고 은송리 옛 교회터를 자주 찾았다고 회고했다.

김 이사는 “김성희는 자신의 세례, 자녀들의 유아세례, 1905년 다가동 이전까지의 과정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라며 “그 아들이 ‘어머니 따라 와서 놀던 곳’으로 기억한 자리, 그리고 그 증언을 이어받은 아들의 기억을 가볍게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논쟁의 교회 사진, 서문이냐 매계냐

이번 발표에서는 오랫동안 서문교회 첫 예배당 사진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정읍 매계교회 예배당이라는 반론이 제기된 10칸 일자형 초가 사진 문제도 함께 다뤄졌다.

해당 사진은 테이트 선교사가 건물 앞에 서 있는 버전, 인물만 지워진 버전 등으로 전주·정읍 양측 교회사에 중복 등장해, 어느 교회의 ‘첫 집’을 찍은 것인지 논쟁이 이어져 왔다.

▲테이트 선교사가 서있는 맨 왼쪽의 사진과 테이트선교사만 지워진 사진, 테이트선교사가 기고문에 첨부한 사진(왼쪽부터) ⓒ

김 이사는 “6·25전쟁 때 소실된 매계교회 첫 예배당은 ‘ㄱ자형’이었고, 그 건물을 실제로 보았던 원로 교인들이 ‘사진 속은 우리 교회가 아니다’라고 한목소리를 낸다”며 “반면 사진 속 건물은 정면 5칸, 전후툇집 10칸짜리 일자형 초가로, 선교사들과 서문교회 기록이 전하는 은송리 예배당의 규모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매계교회 측에 전해진 사진은 서문교회 사진에서 테이트 선교사를 제거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분명하다”며 “테이트가 1917년 전주선교지부 설립 25주년을 회고한 글 말미에 바로 이 초가 예배당 사진이 추가로 편집돼 실려있다는 사실과 이 사진에 ‘자신이 설립한 교회 앞에 서 있는 테이트 목사’라는 설명문이 첨부되어 있는 점이 곧 서문교회 사진임을 말해 준다”고 덧붙였다.

지역 교회사·근대사 새로 짜는 출발점

은송리교회 터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옛 교회터 찾기’ 수준을 넘어, 호남 개신교 수용의 현장과 전주 근대도시 형성의 공간사를 동시에 다시 짜는 작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완산 언덕에 세운 초가와 기와집, 진료소와 우물, 소나무 숲과 백운정·청학루로 이어지는 능선은, 선교의 기억과 왕실 의례, 도시의 확장이 겹쳐지는 드문 현장이라는 평가다.

김중기 이사는 “문헌이 부족해 오랫동안 추측과 구전에만 의존해 왔던 은송리 논쟁이, 이제 의궤와 회화식 지도, 항공사진, 증언사료를 교차시키는 단계로 올라섰다”며 “교회와 예배당을 분리해 보는 시론은 더 많은 자료와 반론을 통해 다듬어져야 하지만, 적어도 은송리 언덕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호남 선교의 첫 걸음이 찍힌 자리를 찾는 일은, 지역 교회사 복원은 물론 전주 근대도시사 연구의 기초를 다시 놓는 일”이라며 “이번 포럼을 계기로 학계와 교계, 지역사회의 공동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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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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