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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이영식 교수 "가야사 의미 새롭게 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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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이영식 교수 "가야사 의미 새롭게 보아야 할 때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만의 역사로 생각해왔던 까닭에, 가야 역사 탈락됐다"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의 의미를 새롭게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영식 경남 김해 인제대 명예교수는 최근 이같이 피력했다.

이 교수는 "가야의 역사는 2000년 전에 남쪽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1400년 전에 북쪽 내륙지역에서 마감되었다"며 "흔히 6가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삼국유사>를 저술했던 고려시대 일연스님의 생각일 뿐이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삼국지> <삼국사기> <일본서기>등의 문자기록과 가야의 고고학 자료에 비추어 보면 12곳 이상의 나라들이 각기 독립된 역사를 누려왔다"면서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과 무려 600년 동안이나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독립국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영식 교수. ⓒ프레시안(조민규)

이 교수는 "가야가 멸망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통합되기 꼭 100년 전의 일이었다"며 "100년 먼저 망했던 것과 6배나 되는 600년 동안 함께 우리 고대사를 구성해 왔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렇게 간단한 산술계산의 의미조차 존중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야의 역사는 홀대되어 왔다"고 하면서 "삼국시대라는 말이 대표적 일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고대사를 고구려·백제·신라 삼국만의 역사로 생각해왔던 까닭에, 가야의 역사는 탈락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영식 교수는 "가야사의 탈락은 우리 고대사의 이 빠진 복원을 뜻한다"며 "600년 동안이나 가야인으로 살았던 고대의 부산·경남·경북·전라도 일부의 역사가 무시되었다. 더구나 일본은 가야사 탈락의 공백을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식민사관으로 파고들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가야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서기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5만의 군사를 휘몰아 가야를 공략했던 사건을 전환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전기가야에는 경남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이었다. 후기가야에서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大加耶)가 중심이었다. 경남 함안의 아라국(阿羅國)은 전기와 후기 모두에 큰 세력이었다"고 밝혔다.

또 "전기에는 남해안의 동래·김해·창원·마산·함안·고성·사천·진주 등이 남해의 바다를 통해 전해지던 선진문물을 바탕으로 번성했다. 후기에는 고령·합천·창녕·함안·의령·산청·거창·함양 등의 서부경남을 중심으로 가야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삼국유사>는 가야사의 무대를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서 지리산까지로 기록했습니다만, 낙동강 동쪽의 부산·양산·창녕·지리산 서쪽의 진안·장수·임실·남원·순천 등에서도 가야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즉 경남과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라도의 약간이 가야의 역사 전개되었던 무대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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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규

경남취재본부 조민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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