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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진의 아름다운 우리가락] 사랑을 노래한 우리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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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진의 아름다운 우리가락] 사랑을 노래한 우리 음악

전통음악 속 사랑의 다채로움

2월은 사랑의 계절이라 했던가. 발렌타인데이가 지나고 거리의 붉은빛이 서서히 걷히는 이맘 때 문득 궁금해진다.

서양에서 온 이 기념일이 있기 훨씬 전 우리 조상들은 사랑을 어떻게 노래했을까?

흥미로운 점은 우리 전통음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곡을 찾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궁중음악에는 예악(禮樂)의 절제가 선비들의 음악에는 유교적 품위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은 더 깊고 더 절절하게 때로는 더 대담하게 스며들어 있다.

정월대보름, 달빛 아래 윷을 던지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했다. 신분의 벽 앞에서 애태웠고 떠나보낸 임을 그리워했으며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를 위해 눈물 흘렸다. 그 마음을 소리에 담았다.

오늘은 우리 전통음악에 담긴 사랑의 다양한 결을 따라가 본다.

죽어서도 함께하고 싶은 사랑, 판소리 ‘사랑가’

사랑을 노래한 우리 음악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다.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가장 문학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 춘향가에서도 사랑가는 단연 백미로 꼽힌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백년가약을 맺고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는 이 대목은 판소리가 발생한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될 만큼 오래된 더늠이다.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어허 둥둥 내 사랑이야.“

느린 진양조 장단에 우조의 씩씩한 선율이 얹힌 '긴 사랑가'는 장엄하면서도 숭고하다. 이 대목에서 두 사람은 생전의 사랑을 넘어 죽음 이후까지 함께하기를 약속한다.

"너는 죽어 꽃이 되되 벽도홍 삼춘화가 되고 나도 죽어 범나비 되어 춘삼월 호시절에 네 꽃송이를 내가 덤쑥 안고 너울너울 춤추거든 네가 날인 줄 알으려무나." 복사꽃이 되어달라는 이도령에게 춘향은 "꽃 되기는 싫소"라 답한다. 나비가 새 꽃을 찾아갈까 두렵다는 것이다.

그러면 종로 인경이 되라 한다. 자신은 인경을 치는 망치가 되어 밤낮으로 함께하겠다고. 춘향은 그것도 싫단다.

그러다 결국 이도령이 제안하는 것은 글자가 되는 것이다. 춘향은 땅 지(地), 땅 곤(坤), 그늘 음(陰), 아내 처(妻), 계집 여(女) 자가 되고, 자신은 하늘 천(天), 하늘 건(乾), 날 일(日), 볕 양(陽), 지아비 부(夫), 사나이 남(男) 자가 되어 '계집 여 변에 똑같이 붙여 서서 좋을 호(好) 자로만 놀아보자'고 한다.

한자의 구조를 이용한 이 언어유희는 조선 후기 서민들의 해학과 재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사랑의 간절함을 담고 있다.

학자들은 이 대목의 매력을 '긴장'에서 찾는다. 달콤한 말로 춘향을 어르는 이도령에게 춘향은 번번이 "그것도 싫소"라 답한다.

관습의 틀 안에서 춘향을 소유하려는 양반 도령과 현실의 관습과 규범을 넘어서는 사랑을 꿈꾸는 기생의 딸. 둘의 사랑은 육체적 합일에는 이르지만 정신적 합일은 춘향가의 끝을 기다려야 한다.

이 내재된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감이야말로 사랑가가 수백 년을 살아남은 비결이다.

이어지는 중중모리 장단의 '자진사랑가'는 사뭇 다르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흥겨운 장단에 맞춰 온갖 먹을거리를 권하고 서로 업고 노는 장면이 펼쳐진다.

둥글둥글 수박에 강릉백청을 붓고 단참외를 권하는 사설은 사랑의 달콤함을 미각으로 표현한다. 느린 사랑가의 장엄한 맹세와 자진사랑가의 경쾌한 희롱, 이 두 결이 어우러져 사랑의 다채로운 면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랑가가 단순한 연애 장면이 아니라는 점이다.

옥에 갇힌 춘향이 변학도의 수청 요구를 거부하며 죽음의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대목에서 나눈 사랑의 맹세에서 비롯된다. 전반부의 사랑이 후반부의 고난을 이기는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춘향가에서도 사랑가 대목은 생략되지 않는다.

홀로 빈방에서 그리워하다, 가사 ‘상사별곡’

판소리가 민중의 사랑을 노래했다면 정가(正歌)는 선비들의 사랑을 담았다.

정가란 가곡, 가사, 시조를 아우르는 전통 성악의 정수로 십이가사(十二歌詞)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 중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해 풍류방과 누정에서 향유되던 이 노래들 중 '상사별곡(相思別曲)'은 그 이름처럼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 즉 상사(相思)의 정을 노래한다.

"인간 이별 만사 중에 독수공방 더욱 섧다. 임 못 보아 그리운 이내 심정을 누가 알리. 맺힌 시름 허튼 근심 다 후리쳐 던져두고, 자나 깨나 깨나 자나 임 못 보니 가슴 답답.“

첫 구절부터 가슴을 친다. 세상의 온갖 이별 가운데 홀로 빈방을 지키는 것이 가장 서럽다는 고백. 상사별곡은 18세기부터 불리기 시작해 19세기에 대표적인 가창 가사로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가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격조 높은 노랫말이 특징인데, 이 노래의 화자는 떠나간 임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운다.

"어린 양자 고운 소리 눈에 암암 귀에 쟁쟁, 보고지고 임의 얼굴 듣고지고 임의 소리.“

임의 모습은 눈에 아른거리고 목소리는 귀에 쟁쟁하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꿈에서라도 만나기를 바라지만 꿈에서조차 임은 오지 않는다. 결국 화자는 하나님께 빈다. 임이 다시 생기게 해달라고 전생과 이생의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상사별곡의 선율은 계면조로 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준다. 5박 장단 위에 가성(假聲)을 많이 쓰며, 음을 떨어 내리는 퇴성법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음악적 요소들이 노랫말의 애절함을 한층 깊게 만든다.

판소리 사랑가가 사랑의 환희와 맹세를 직접적이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면 상사별곡은 이별 후의 그리움을 절제된 언어와 품위 있는 선율로 담아낸다. 같은 사랑이되 그 결이 사뭇 다른 것이다.

▲ 2020 기획공연 : 풍류명가 정악 中 상사별곡. ⓒ국립국악원

고개를 넘어 떠나는 임, 민요 속 사랑

민요에는 사랑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대개 이루어지지 않거나 이별로 끝나거나 그리움으로 남는다. 우리 민요가 품고 있는 사랑의 정서는 '한(恨)'과 맞닿아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은 단순한 이별 노래가 아니다. '아리랑'과 '쓰리랑'이라는 말은 고대 북방 샤머니즘의 장례문화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는 의미로 추정된다는 학설도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아리'가 '긴(長)'의 뜻을 지니므로 '아리랑'은 곧 '긴 고개'를 의미한다고 한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떠남이요 이별이다.

그런데 그 이별 앞에서 화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원망하되 저주하지 않고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말로 미운 정을 표현한다.

가지 말라 붙잡지도 않고 보내면서도 완전히 보내지 못하는 마음. 이것이 우리 민요 속 사랑의 특징이다.

밀양아리랑은 또 다른 결의 사랑을 보여준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한겨울에 꽃을 본다는 것은 기적이요 기쁨이다. 그토록 귀하고 반갑게 나를 봐달라는 호소다.

이어지는 가사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에서는 님 앞에서 쭈뼛거리는 수줍음이 느껴진다. 직접적인 고백 대신 자연에 빗대고, 행동으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민요의 화법이다.

서양의 사랑 노래가 소유와 열정, 정복과 성취를 말한다면, 우리 민요는 부재와 그리움, 기다림과 체념을 노래한다.

이것은 문화적 차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사랑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늘 충만하기보다 무언가가 부족할 때 곁에 있을 때보다 떠나고 난 뒤에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사랑의 계절, 우리 음악과 함께

이렇게 돌아보니 우리 전통음악 속 사랑은 참으로 다채롭다.

판소리 사랑가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맹세와 한자 유희의 재치가 있고 상사별곡에는 홀로 지새는 밤의 그리움과 선비적 절제가 있으며 민요에는 고개를 넘어 떠나는 임을 보내는 애달픔과 수줍은 고백이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 음악 속 사랑은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하루 이틀의 설렘이 아니라 평생을 아니 죽음 이후까지 함께하고픈 마음을 담고 있다.그리고 그 사랑은 대개 완성되지 못한 채 그리움으로 남는다.

신분의 벽에 막히거나 이별로 끝나거나 기다림 속에 늙어간다. 그래서일까 우리 음악의 사랑 노래에는 어딘가 쓸쓸한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삶의 진실에 가깝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아직 2월이 다 가기 전, 우리 음악 속 사랑을 들어보면 어떨까.

유튜브에서 '춘향가 사랑가'를 검색하면 여러 명창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김소희, 조상현, 안숙선 등 명창마다 조금씩 다른 더늠을 비교해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상사별곡은 국립국악원의 정가 음원에서 찾아볼 수 있고, 아리랑은 굳이 찾지 않아도 어디선가 흘러나온다.

초콜릿과 장미 대신, 천 년을 이어 온 사랑의 정서를 만나본다.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어허 둥둥 내 사랑이야"를 흥얼거리며 우리 음악이 말하는 사랑의 무게를 느껴본다. 따뜻한 봄이 오기 전, 모두에게 좋은 사랑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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