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년째 콜센터에서 상담업무를 하고 있는 여성 감정노동자입니다. 최저임금을 받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였으며, 해고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앞장서 "말 잘 듣는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주어진 일을 해냈고, 감정을 숨겼으며, 회사의 요구에 맞추어 우리의 요구를 참아 왔습니다. 여성 다수가 종사하는 콜센터 상담·서비스 노동 현장에서 그것은 '먹고 살기 위해 버티는'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친절은 기본값이었고, 침묵은 미덕으로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응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외주화와 계약 종료, 구조조정이라는 말 앞에서 개인의 성실함은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습니다. "말 잘 듣던" 내가 자본의 계산과 기업의 수지타산에 따라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게 되었으니까요.
계약만료로 일터를 잃은 뒤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우리가 왜?"라고 묻는 순간, 나는 '문제적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깨달았습니다. 말 잘 듣는 여성은 안전하지만, 질문하는 여성은 위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의 해고는 개인의 불운이 아닙니다. 이는 반복되는 구조의 단면입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여성 노동은 가장 먼저 외주화되고, 가장 쉽게 교체 가능한 비용으로 계산됩니다. 우리의 노동 가치와 인간의 존엄은 우리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감정노동은 필수적이지만 그 가치는 가장 낮게 책정됩니다. 저항은 "예민함"이나 "과격함"으로 치환됩니다.
이 구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투쟁들 속에 남아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에 대한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은 문재인 정부 시절 약속된 사안입니다. 그러나 6년이 넘도록 이행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올해 초 다시 공개입찰을 통한 업체 변경 입찰공고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최저임금을 받는 간접고용 감정노동자들의 밥줄을 가지고 이미 합의된 약속을 지키지 않기 위한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치졸한 수법임이 분명하지만, 정부는 그저 묵인합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는 한마디 물음도 던지지 않습니다. 공공서비스의 최전선에서 일하지만 고용은 외주화되어 있고, 책임은 분절되어 있습니다. '공공'이라는 이름 뒤에 '불안정'이 존재합니다.
왜 여성과 비정규·간접고용 노동은 늘 주변부에 머물러야 합니까. 왜 정권이 바뀌어도 고용 구조는 달라지지 않습니까. 노동을 비용 변수로만 다루는 정치와 자본의 이윤추구 때문입니다. 여성 노동을 보조적이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는 문화,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분산시키는 제도가 유지되는 한 이 악순환은 반복됩니다.
약속의 진정성
고공농성으로 버텨온 해고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절박합니다. 세종호텔 해고자 6명의 투쟁은 4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규직이었음에도 구조조정과 자회사 전환 과정에서 일터를 잃었으며, 노동자들은 복직을 요구하며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 공장 폐업으로 일터를 잃은 6명의 노동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장이 문을 닫는 순간 노동자들의 삶은 한순간에 불안정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의 비용은 언제나 노동자가 감당합니다. “복직과 고용승계는 없다”는 선언은 기업 이익이 우선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고공농성장을 찾았던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과 정청래 여당 대표는 눈물을 보이며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고 약속하고 고공농성 중단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농성이 해제된 이후 경찰의 공권력은 가장 낮은 곳에서 투쟁하는 이들을 억압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한 것입니까. 표를 얻기 위한 행보였습니까.
그날의 약속과 눈물이 진심이었다면, 생존을 건 투쟁을 기만한 것이 아니라면 이제 답해야 합니다. 노동자들이 고공에 올라 긴 시간을 버티며 바랐던 것은 가식의 눈물과 거짓된 약속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입니다.
인간의 존엄
노동자들의 투쟁이 언론에 소개될 때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공격적인 댓글로 비난합니다. "다른 직장을 찾아라", "노조는 떼쓰지 마라", "평생직장은 없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에 있습니다. 대기업 정규직이 싸우면 "귀족노조"라 하고, 비정규직이 싸우면 "떼쓰기"라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힐난하는 사이에 노동권은 후퇴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2조는 모든 국민의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 자본의 이익이 우선되는 구조 속에서 그 권리는 뒤로 밀려납니다. 해고는 정당화되고, 공권력 투입은 불가피한 조치로 설명됩니다.
이들의 투쟁이 돈을 얻기 위한 것 이었다면 이미 끝났을 것입니다. 노동을 단지 생계 수단으로만 여겼다면 이 긴 시간을 버틸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이므로 멈출 수 없습니다.
왜 꼭 투쟁이어야 하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러나 다시 묻고 싶습니다. 순응으로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IMF라는 이유로 수 많은 노동자들이 일터를 잃었지만, 그 순응으로 이 사회는, 서민들의 삶은 더 나아졌습니까? 그들이 희생하여 경제가 살아난들, 그 자식들의 삶은 더 윤택해졌습니까? 그들의 좌절과 포기로 배 불린 이들이 누구입니까? 그 자식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거나 거리의 해고자가 되어 일터를 잃고 다른 일터를 찾아 전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 인간이 정규직이든 아니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떤 정당을 지지하든, 어떤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든, 한 달에 얼마를 벌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존엄해야 한다는 전제에 대한 문제입니다. 투쟁은 과격함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택입니다. 지워지지 않기 위한 몸짓입니다.
멈춤, 그것은 또 다른 도약 그리고 시작
광장의 불빛과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 정권을 잡았다고 자임하는 이 정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성폭력 피해자 학생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던 선생님이 일터를 잃고, 최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는 거리에서 밥을 굶고, 자본주의 논리로 일터를 잃은 노동자는 여전히 고공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 현실 속에서 과거 소년공이었던 대통령이 집권한 오늘에도 노동자는, 약자는, 소수는 여전히 처참한 일상을 거리에서 투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멈춥니다. 여성의 멈춤은 기념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여성이, 소수자가, 약자가 멈추면 사회가 멈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보이지 않던 감정노동과 돌봄노동, 상담과 응대가 이 사회를 지탱해왔음을 가시화하는 집단적 실천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말 잘 듣는 여성으로만 존재하지 않겠습니다.
그날, 우리의 멈춤이 비록 당장 온 세상을 멈추진 못 할지라도, 이것을 짓밟아도, 무시해도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폭풍을 만들 듯, 세상을 바꾸듯 내일이 아니어도, 내년이 아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존재의 간절함이 어떤 것인지는 반드시 증명될 것입니다.
우리의 멈춤은 도약을 위한 시작이고 살아가고자 하는 한 인간의 바람입니다. 그 바람들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반드시,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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