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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교착 사태를 푸는 열쇠 '시민의회', 돌봄 문제에 적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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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교착 사태를 푸는 열쇠 '시민의회', 돌봄 문제에 적용하자

[복지국가SOCIETY] 돌봄시민의회가 필요한 이유

이 세상에서 가치있는 일 중 '돌봄' 아닌 것은 없다. 아이를 돌보는 일부터 나라와 지구를 지키는 일까지, 인류와 뭇 생명체가 존속하고 성숙해가기 위해 돌봄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가치관이자 실천이다.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돌봄이 가장 낮은 대우를 받고 있다. 예를 들면 아이 양육, 환자 간호, 노인 간병, 농작물 재배 등은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에게 맡겨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는, 사람들이 각자 임금노동자로서의 시간을 줄이고 돌봄인으로서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국가가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다.

또한, 매우 시급한 돌봄의 문제인데 주제의 민감성 때문에 해결이 유예되고 방치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고통없이 존엄하게 세상을 마감하고 싶은 환자들, 원치않는 임신으로부터 자신의 몸과 삶을 지키고 싶은 여성들, 군 복무로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을 잃는 것이 두려운 남성들, 조롱과 비난을 받지 않고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성소수자들, 이들의 어려움과 고통은 모두 돌봄의 주제다. 그리고 기존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해서 자꾸 미루는 문제들이다.

'정치적 교착상태'에 빠진 사회 문제들

국회, 지방의회 등 선거로 뽑히는 대표들의 문제는 첫째, 정작 자신들의 이익과 배치되는 문제들, 즉 선거법, 정당법 개정을 미루거나 왜곡시킨다는 것이고, 둘째, 표를 잃을 수 있는 인기없는 주제를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주제의 많은 부분이 존엄사, 임신중지, 성평등 등 돌봄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은 관련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무작위로 모여 오랜 시간 숙의를 한 후 해결책을 제시하는 '시민의회'의 방식이 제격이다. 사실상 시민의회 제도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민감한 돌봄의 주제를 다루어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존엄사, 임신중지, 동성결혼과 같은 의제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 사회 내 일부 유권자 집단의 심한 반발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다루기 꺼리는 주제들이다. 정치학자들, 특히 제임스 피시킨(James Fishkin), 데이빗 파렐(David Farrell), 그레이엄 스미스(Graham Smith) 등은 이를 '정치적 교착상태(political deadlock)'라고 부르며, 시민의회와 숙의민주주의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상당한 정책적 성과를 낸 사례들이 있다. 가장 성공적인 시민의회 사례로 종종 거론되는 것은 아일랜드에서의 임신중지 관련 시민의회다. 아일랜드는 전통적으로 매우 강한 가톨릭 국가로서, 임신중지 즉 낙태는 헌법상 거의 금지되었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16년 리오 버라드커 총리의 주도로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한 시민의회가 구성되었다. 시민의회 의원들은 성별·연령·지역 대표성이 고려되면서 무작위로 추첨되었다. 이들은 본 사안과 관련된 당사자들을 비롯하여 의사, 법률가, 윤리학자, 종교인들의 증언을 청취하며 오랜 기간 숙의한 끝에, 헌법의 제8조(태아 생명권 조항) 폐지를 권고했다. 이 권고는 국회 논의로 이어졌고 2018년 국민투표를 거쳐 통과되었다.

아일랜드는 동성결혼 문제도 시민의회 방식으로 해결했다. 전통적으로 동성애가 범죄시 되었던 아일랜드에서 동성결혼 역시 정치인들이 다루기 매우 꺼리는 문제였다. 그러한 가운데 2012년 헌법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 즉 시민의회가 구성되어 시민과 정치인이 함께 참여해 숙의한 결과 동성결혼 허용을 권고했다. 이어 2015년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아일랜드는 세계 최초로 국민투표를 통해 동성결혼을 승인한 국가가 되었다. 종교와 가족의 가치가 매우 강한 사회에서 시민의회가 시민들의 숙의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큰 관심사가 되고 있는 존엄사 문제도 시민의회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프랑스에서 존엄사와 조력 사망 문제가 오랜 기간 논쟁거리였는데 2022년 마크롱 대통령의 주도로 시민의회가 구성되어 숙의 끝에 일정 조건 아래 적극적 조력 사망을 허용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권고는 이후 마크롱 정부의 생애말기(end-of-life) 법안 논의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2025년에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부결되어 다시 재논의 중이다. 이 의제는 아직 완전히 종결된 사안은 아니지만, 시민회의가 정치권의 논의를 크게 진전시킨 사례로 평가된다.

벨기에 독일어권(동벨기에)에서는 돌봄 문제를 포함하여 기후, 교육, 지역개발 등의 의제를 상시적으로 다루는 상설 시민의회를 세계 최초로 설립했다. 시민들은 임기제로 계속 교체되며 정책 의제를 선정하고 정부에 권고한다. 많은 학자가 이를 숙의민주주의가 제도화된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돌봄시민의회적 접근 방식이 필요한 이유

일반적으로, 시민의회가 다루기에 특히 적합하면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의제로서, 임신중지, 존엄사, 동성결혼, 성평등 정책, 마약 정책, 기후위기, 선거제도 개혁, 헌법 개정, 이민 정책 등이 거론된다. 이것들 중 많은 부분이 돌봄과 관련이 있다. 돌봄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돌봄'시민의회의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 이러한 문제가 사회 안전과 통합을 해치는 '골칫거리'라는 인식을 넘어, 몸, 마음, 가족, 공동체, 사회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이를 걱정하고 돌보는 접근이 더 근본적이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돌봄시민의회가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취약한 존재를 보살피는 돌봄의 의제가 국회에서 다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돌봄이 필요한 취약한 존재는 대개 사회 내 영향력이 없고 의원들에게 로비를 할 수 있는 역량도 없다. 예컨대 장애아동, 치매노인, 좁은 사육장에서 고통받는 가축, 독약으로 죽어가는 나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돌봄시민의회, 그것도 상설 돌봄시민의회라면, 이러한 의제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숙의하여 돌봄과 공생이 실현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셋째, 곧잘 정치적·이념적 갈등으로 확대되는 의제도 돌봄시민의회가 다룰 수 있다. 현재 일베 등 극우사이트 폐쇄 논의가 한창 뜨거운데 이를 정부나 여당이 주도적으로 하기가 다소 껄끄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돌봄시민의회가 극우사이트 폐쇄 문제를 의제로 삼아 숙의할 수 있다.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극우의 문제는 돌봄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그들의 비난과 공격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는 문제이며, 또한 그러한 공격을 가하는 이들의 병든 마음을 돌아보는 문제다.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도 치유의 대상으로 보는 접근을 해야 극우의 움틈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다. 또한, 남성들의 군복무 문제, 여성혐오 및 여성안전의 문제, 시급하고 중요한 차별금지법 제정도 남녀 간 차별, 성소수자 혐오를 극복하는 돌봄의 관점에서 시민의회가 다룰 수 있다.

케어 컬렉티브(Care Collective)가 발간한 <돌봄선언>에 의하면, 돌봄의 어려움은 참여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참여민주주의의 심화는 시민의회와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이룰 수 있다. <돌봄선언>에 의하면, 돌보는 국가는 수직적·하향적이지 않고 규범과 강압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다비나 쿠퍼(Davina Cooper)가 말한 "창의적이고 수평적이며 생태적인 현재와 미래의 경향"을 도모한다.

올해 6월 24일 대전에서 시민의회전국포럼을 비롯하여, 대전시민의회포럼, 경희대비교문화연구소, 사회적협동조합 네트워크 RE,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주최로 '돌봄시민의회 시나리오 워크샵'이 개최한다고 한다. 이것이 한국에서 돌봄시민의회가 실현되어가는 도정의 첫 출발이 되길 소망해본다.

▲ 출처 : 프리픽(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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