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지역 의료 혁신을 위한 토론회' 가 개최됐다. 보건복지부·의료혁신위원회·대한전공의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주민과 전공의에게 의견을 묻는 토론회였다. '주민'의 의견을 듣는 자리라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보건의료는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주민의 의견은 정말 주민 자신의 것이었을까.
최근 우리 연구소가 충남의 한 농촌 마을을 찾은 것도 이 물음과 관련있다. 일차적으로는 여성 농민들의 건강 현황과 돌봄 부담 현황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주민 자신의 언어로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를 듣기 위해서였다. 캐롤 바키(Carol Bacchi)가 지적하듯, 어떤 현실이 '문제'로 어떻게 재현되는가(problem representation)는 정책 의제의 내용과 자원 배분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문제로 재현되지 않는 것은 정책 의제로 자리 매김하지도, 자원이 배분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화는 중요한 사회 운동의 과제이다.
언어화되지 않는 박탈
우리가 만난 한 여성 노인 분은 "나이 들면 안 아픈 데가 어딨겠나"라고 말하며, 농촌 노인의 건강을 위한 정책의 부재를 문제화하진 않았다. 그 분은 굽은 허리로 인해 손수레에 의지해 30분을 느릿느릿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다시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곳 저곳'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거의 매일 두세 군데의 읍내 병원에 가면서도 '아직은 병원에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의 '미충족의료'는 과연 없는 걸까? 통계는 이 노인을 '의료 이용 가능'으로 기록할 것이다. 심지어는 '과다 의료 이용'으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당사자의 언어, 그리고 지표상으로는 '문제 없음' 상태인 것이다.
아마르티야 센(Amartya Sen)은 박탈이 만성화된 사람일수록 자신의 상황을 박탈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인이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역량(capability)의 결핍으로서 박탈을 측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왕복 세 시간의 통원을 '아직 혼자 갈 만하다'고 말하는 노인은 더 나은 의료에 접근할 역량을 박탈당한 채 그 박탈에 익숙해져 온 사람이다. 이러한 박탈과 체념은 주민의 관점에서 언어화되기 어려우며, 통계의 '의료 이용' 수치로도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노인의 체념과 낮은 기대를 개인적 성향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이는 사회 구조의 제약으로 인한 산물이다. 특히 지금까지의 사회구조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본과 시장이었다. 어느 읍에 병원이 서고, 어느 길로 어떤 노선의 버스가 다니며, 어떤 진료과가 유지되고 폐과되는지는 대개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 이에 비해 주민의 필요와 경험이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나고 반영되는 구조는 형성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노인의 고된 의료 이용의 배후에는 주민의 요구를 탐색하고, 그에 응답하는 공적 주체가 부재한 상태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이 동의할 것 같다.
지방분권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에 대해
분권은 중앙과 지방 중 누가 주민의 필요를 채우는 책무를 할 것인가와 관련된 주제이다. 최근에는 의견이 갈리는 듯 하다. 한쪽에서는 지방은 행정 역량도, 전문인력도, 재정도 부족하니, 준비되지 않은 지방에 맡기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시장에 맡겨진 의료가 농촌 노인을 박탈로 내몬 것이, 시장이 '준비되지 않아서'였는지 말이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준비 여부가 아니라, 의료를 직접 이용하는 주민이 결정의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중앙이 떠안는 것 역시 해법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주민을 결정에서 배제하는 주체를 시장에서 중앙으로 바꿀 뿐, 주민은 여전히 결정권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분권을 둘러싼 근본적인 논쟁 지점이 있다. 분권은 흔히 중앙의 권한을 지방으로 옮기는 일로 이해되지만, 그렇게 옮겨진 권한이 상상하는 '지역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만약 그 주체가 지방정부와 공무원이라면, 분권은 결정의 자리에 앉는 행정 주체의 위상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바꿨을 뿐, 주민을 결정에서 배제하는 구조 그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주민이 결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분권이 이루어진다면 지방정부가 아무리 자율적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더라도 그 정책은 주민의 삶과 마주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농촌에서 마주한 또다른 장면도 이를 보여준다. 올해 3월부터 정식으로 시행된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돌봄의 공백을 메우겠다는 취지로 마련된 정책이지만, 정작 우리가 만난 주민들은 그 용어조차 낯설게 느끼는 모습이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주민이 그 용어를 몰랐다기보다는, 그 정책이 주민의 삶 속에 존재하는 요구와 맞물려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물며 연계할 기관도, 사람도, 자원도 마땅치 않은 농촌의 실정에 맞지 않게, 중앙에서 표준화된 방식으로 설계된 정책이라는 점에서 그 괴리는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지방은 아직 역량이 없다"는 진단 역시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것은 '주민이 결정의 주체가 되는가'라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누가 더 효율적으로 행정을 다루는가'라는 기술적 물음으로 탈정치화하는 잘못된 진단이다. 게다가 그 '역량'이라는 것은 결정에 참여하며, 실패하며, 나아지는 비선형적인 과정을 지난하게 거듭해 가며 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제 정의의 권한을 주민에게로
그렇다면 분권을 둘러싼 질문도 다시 쓰여야 한다. 물어야 할 것은 "지방이 중앙만큼 잘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문제로 정의할 권한을 갖느냐"이다. 단지 권한을 중앙과 지방 사이에서 나누는 일로만 분권을 이해하는 한, 주민은 여전히 문제화 과정의 바깥에 머물게 된다. 분권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시장에 떠넘겨진 결정을 공적 영역으로 되찾아오고, 그 문제화의 권한을 주민에게 돌려주는 과정일 때, 곧 주민이 자기 삶의 결핍을 스스로 결핍이라 부를 수 있는 언어를 가질 때다. 노인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요구할 수 있게 하는 언어를 갖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요구에 기반하는 정치가 되는 것이야말로 분권의 목적이자, 성과 평가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다만 분권이 주민의 요구에 기반해야 한다는 말은, 표출된 요구의 목록을 그대로 행정에 반영하자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노인의 체념은 그대로 '수요 없음'으로 반영되고, 박탈은 다시 통계의 이면에서 지워질 것이다. 요구에 기반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떤 요구가 왜 말해지지 못하는지를 함께 묻는 일이다. 그러므로 요구 기반의 분권은 주민을 '정책 대상자' 또는 ’정책 수혜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다시 강조하자면 분권이 지향해야 할 것은 서비스를 고를 권한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할 권한이며, 그 권한이 주민에게 닿을 때 비로소 "필요 없다"는 체념도 하나의 요구로 이해될 수 있다. 분권은 행정의 효율을 따지기 전에, 누구의 침묵까지를 요구로 들을 것인가를 먼저 묻는 일이다.
모택동이 남긴 유명한 어구 중, "조사 없이는 발언권도 없다"는 말이 있다. 농촌 주민의 건강과 돌봄을 말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는 답을 들고 가기 전에 농촌의 삶부터 들어야 한다. 그 들음은 농촌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답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어떤 요구가 왜 말해지지 못했는지, 그 부재의 맥락을 살피는 일이다. 주민이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견디며,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왜 "필요 없다"고 말하는지 듣는 데서 비로소 문제 정의의 권한은 주민에게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지방이 아직 멀었는지를 논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 '멀었다'는 판단이 누구의 자리에서 내려진 것인가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