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나는 모양 때문에 버려지는 '못난이' 농산물을 되살리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멀쩡하게 잘 자란 농산물의 이야기다. 그런데 신선한 농산물에도 농가를 괴롭히는 오랜 고민이 하나 있다. 바로 '시간'이다.
신선 농산물은 수명이 짧다. 밭에서 거둔 채소와 과일은 며칠만 지나도 시들고 무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농가는 수확하자마자 서둘러 팔아야 하고 그 약점은 고스란히 가격에 잡힌다.
풍년이 들면 한꺼번에 쏟아져 값이 폭락하고 작황이 나쁘면 물량이 모자라 값이 치솟는다. 어느 쪽이든 농가는 가격에 휘둘린다. 애써 기른 농산물이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에 넘어가거나 밭에서 갈아엎어지는 일이 해마다 되풀이된다. 식품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기에 식품과학이 할 수 있는 분명한 역할이 있다고 본다.
가공과 발효는 '시간을 파는 기술'이다
농산물의 가장 큰 약점이 '짧은 시간'이라면 그 시간을 늘려 주는 기술이 곧 해법이 된다. 가공과 발효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둘을 '시간을 파는 기술'이라 부르고 싶다.
원리는 간단하다. 신선한 배추는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지만 김치로 담그면 몇 달을 간다. 금세 무르는 과일도 잼이나 말랭이, 즙으로 만들면 사철 내내 팔 수 있다. 저장 기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둔다는 뜻이 아니다. 값이 폭락하는 수확기에 헐값으로 팔아치우지 않고 제값 받을 때를 기다려 1년 내내 나누어 팔 수 있다는 뜻이다. 가격 변동이라는 농가의 가장 큰 위험을 크게 줄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가공은 농산물의 몸값 자체를 올린다. 똑같은 콩이라도 그대로 팔 때보다 두부나 장(醬)으로 만들어 팔 때 값이 훨씬 높다. 1차 농산물(원물)을 2차 가공품으로 바꾸고 거기에 체험·관광까지 더하는 이른바 6차산업이 농촌의 새로운 길로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농산물에 가공이라는 손길을 더하는 것만으로 새로 더해지는 가치가 몇 곱절로 커지는 것이다.
발효-한국이 가장 잘하는 '시간의 과학'
여러 가공 기술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발효다. 발효란 미생물(곰팡이·효모·세균 같은 작은 생물)이 식품의 성분을 천천히 바꾸어 새로운 맛과 성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쉽게 말해 '시간과 미생물이 함께 빚어내는 변화'다.
발효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낸다. 하나는 보존이다. 김치와 장, 젓갈은 모두 오래 두고 먹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였다. 다른 하나는 풍미, 곧 깊은 맛이다. 갓 삶은 콩에는 없던 구수함이 메주와 된장에서 피어나고 갓 절인 배추에는 없던 감칠맛이 익은 김치에서 살아난다. 시간이 만들어낸 맛이다.
마침 충청과 대전은 예부터 청국장·된장·간장 같은 발효 문화가 깊은 고장이다. 소박하지만 깊은 발효의 맛이 이 지역 식문화의 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고 이 발효는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강점이 되었다. 2024년 케이푸드 플러스(K-Food+) 수출액은 130억 달러를 넘어 역대 최고를 기록했는데 그 중심에 김치와 장류 같은 발효식품이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발효식품과 비건(채식) 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김치가 역대 최대 수출을 기록했고, 유럽에서도 한 해 사이 수출이 40% 넘게 늘었다(농림축산식품부). 우리에게는 익숙한 발효의 맛이 세계 시장에서는 새롭고 건강한 음식으로 팔리고 있는 것이다. 발효가 곧 수출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발효와 발아, 맛을 넘어 '기능'을 더하다
식품과학의 눈으로 보면 발효의 가치는 보존과 맛에서 그치지 않는다. 발효 과정에서 몸에 이로운 성분이 새로 만들어지거나 늘어나기 때문이다. 발효는 소화를 돕는 형태로 영양 성분을 바꾸고 장 건강에 이로운 유익균을 품는다. 우리가 김치와 된장을 '건강식품'이라 부르는 데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곡물을 싹 틔우는 발아도 비슷하다. 밀이나 콩을 발아시키면 가바(GABA)나 폴리페놀 같은 생리활성물질(몸의 기능에 도움을 주는 성분)이 늘어난다. 발효와 발아를 잘 활용하면 평범한 지역 농산물을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기능성 식품'이라는 한 단계 높은 상품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보존을 넘어 맛을 넘어 건강이라는 가치까지 더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부가가치를 가장 크게 키우는 길이며 식품학자가 기여할 수 있는 핵심 영역이기도 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향미, 곧 향과 맛의 과학이다. 같은 재료라도 어떤 미생물로 어떤 온도에서 얼마나 발효하고 숙성하느냐에 따라 향과 맛이 크게 달라진다. 이 미묘한 차이를 과학으로 분석해 일정하게 관리하면 지역의 발효식품을 들쭉날쭉한 '집장' 수준에서 믿고 살 수 있는 고급 상품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커피와 차가 향미 연구를 통해 고급화의 길을 걸어온 것과 같은 이치다.
대전, 발효와 가공으로 농산물의 값을 두 배로
이 모든 가능성은 대전에 특히 잘 맞는다. 대전과 충청은 발효 문화가 깊은 고장이고 대전은 그 발효를 과학으로 풀어낼 연구 역량을 갖춘 과학도시다. 여기에 인근 충청 들녘에서 나는 풍부한 농산물과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못난이·부산물까지 더하면 재료는 충분하다.
지역의 농산물을 그저 신선한 상태로 헐값에 내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발효와 가공으로 저장성과 풍미와 기능을 더해 사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바꾸는 일. 그 일이 대전 안에서 지역의 청년과 가공업체와 연구기관의 손으로 이루어진다면 농가는 더 안정적인 소득을 얻고 지역에는 새로운 가공산업과 일자리가 생긴다. 같은 농산물의 값을 두 배로 올리는 길이 여기에 있다.
물론 좋은 발효식품을 만드는 것과 그것을 '믿고 사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소비자가 그 가치를 믿지 못하면 제값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지역 식품에 신뢰와 프리미엄을 입히는 마지막 이야기, '과학으로 만드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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