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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최고 존엄' 김일성 사진 찢은 北 당국자…그럼에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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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최고 존엄' 김일성 사진 찢은 北 당국자…그럼에도 살아남았다?

통일부, 남북 대화 문서 공개…'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후속 회의에서 입장 차 좁히지 못했다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남북은 1991년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지만, 30년이 지난 현재 북한은 사실상의 핵 보유국으로 간주되고 있다. 공동선언 채택 이후 남북은 '핵통제공동위원회'를 창설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논의를 이어갔지만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30일 통일부는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진행된 32차례의 남북 간 핵문제 협상 과정을 기록한 3836쪽 분량의 남북 회담 문서를 공개했다. 여기에는 △'핵문제' 협의를 위한 대표접촉(1991.12.26.~12.31.)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을 위한 대표접촉(1992.2.19.~3.14.)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1992.3.19.~1993.1.25.)의 진행 과정과 회의록 등이 포함돼 있다.

통일부는 "이번에 공개되는 문서는 최초로 남북 당사자 간 북한 핵문제를 협의했던 시기의 회담 문서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 과정과 이후 남북 대표간 접촉 및 회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 1991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됐던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의 합의에 따라 세 차례의 접촉을 진행했고 이에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가 탄생했다. 이 합의는 이후 1992년 2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공식 발효됐다.

이어 남북은 위 선언에 근거해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합의했고 1992년 3월 19일 판문점 북측지역인 통일각(현 판문관)에서 1차 회의를 개최했다.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핵 사찰 문제를 두고 남북은 입장 차를 보였는데, 남한이 한미 군사 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겠다고 밝히면서 갈등이 증폭됐다.

남한은 남북 상호 사찰을 실시하면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문제가 검토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놨고, 북한은 남한이 이 두 사안을 연계하는 방침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2년 12월 17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제13차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에서 양측의 주장 및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북한 측 위원장이었던 최우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는 팀스피리트 훈련이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이에 남한 측 위원장이었던 공로명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는 누가 외세에 더 의존적이고 사대적이냐면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는 1992년 12월 15일 자 <중앙일보> 사진을 최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최 위원장은 "그런 건 가져가세요"라고 말했고, 공개된 회의록 문서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으나 최 위원장이 해당 사진을 찢은 것으로 보인다. 공 위원장이 "왜, 그런 걸 찢을"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 측 대표단은 "오늘 완전히 도발" 이라고 대응했고, 회의록에는 '쌍방 소란'이라고 적시돼 있어 당일 회담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었다.

해당 회의에 위원으로 참석한 김수길 북한 외교부 연구원은 "그쪽에서 도발하려고 계획적으로 이게 계획했구만요"라고 따졌고 공 위원장은 "그러니까, 요 다음부터는 그런 얘기는 하지말라 이 얘기야"라며 응수했다.

이날 상황에 대해 기자들과 만난 회담 문서 공개 관련 관계자는 "공로명 장관이 자유로운 회담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북한은 자주적이고 주도적으로 해결하자는 당사자 원칙을 강조하면서 우리한테 왜 미국을 추종하냐고 따졌는데, 공 장관은 북한이 한국 전쟁을 소련과 공모해서 하지 않았냐는 증거로 사진을 제시했다"라며 "그런데 최우진은 그거 아마 보지도 않고 찢었던 것 같다"라고 추정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진을 찢는 것은 북한 내부의 관행을 봤을 때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다. 이에 이후 최우진 위원장 신변에 변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이 관계자는 "외무성 부상까지 승진했고 임동원(당시 통일원 차관)과 실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고 전했다.

수 차례 고성이 오갔던 이날 회의에서 양측은 별다른 합의를 하지 못했고 다음 회의 날짜도 잡지 못했다. 이후 해가 지난 1993년 1월 25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남북 위원장 간 접촉이 있었으나 여기서도 양측은 별다른 합의를 하지 못했고, 결국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위원회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 1992년 12월 10일 남북한은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제12차 핵통제공동위원회를 열고 상호핵사찰 규정 마련을 위한 논의를 재개했으나 한미간 팀스피리트훈련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였다. 남측 공로명(오른쪽) 대표와 북측 최우진 대표가 무언가를 전달하며 웃음을 띠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부는 지난 2022년 처음으로 회담 문서를 공개한 이후 이를 정기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통일부는 이번에 2022년 공개문서 중 비공개 결정했던 문서 832쪽 분량을 재심의하여 추가로 공개하기로 했는데 수행원 명단과 남한 기자가 북한에 가서 취재하고 남한으로 보낸 취재 내용과 쌍방제안 및 합의사항 등이 포함됐다.

추가 공개 대상은 △적십자 파견원 접촉 △적십자 예비회담(1971.8.~1972.8.) △적십자 본회담(1972.8.~1973.7.) △적십자 대표회의 및 실무회의(1973.11.~1977.12.) 등이다.

공개된 남북회담 문서 원본은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통일부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국회도서관 △국회부산도서관△호남권 통일+센터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이번 8차 공개부터는 열람 장소를 경기·강원·충청권 통일+센터까지 확대해 전국에서 열람이 가능하다고 통일부는 전했다.

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남북관계 및 국제적 사안들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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