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2026년 상반기 대한민국은 반도체가 장악했다. AI 반도체 호황을 등에 업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한국 경제의 침체 분위기를 단숨에 반전시켰다. 두 기업의 존재감은 증시에서도 압도적이었다. 두 기업의 시가 총액은 코스피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고, 올해 코스피 상장사 전체 순이익의 약 70%가 두 기업에서 나올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곧이어 호황의 과실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SK하이닉스의 대규모 성과급은 삼성전자 노조의 반발을 불러왔고, 총파업 직전까지 치달았던 노사 갈등은 정부 중재 끝에 가까스로 봉합됐다. 비슷한 시기 논의의 범위는 기업 내부에서 사회적 분배로 확대됐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AI 인프라 시대의 과실은 특정 기업만의 결과가 아닌, 반세기에 걸쳐 전 국민이 함께 쌓아온 산업 기반 위에서 나온 것"이라며 초과세수의 일부를 청년 창업, 농어촌 지원, 노후 보장, AI 전환교육 등에 활용하는 '국민배당금'의 구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익의 사회적 분배에 대한 물꼬는 정부가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급격히 선회했다.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새로운 국가 성장동력으로 제시하며, 지금 필요한 것은 분배가 아닌 대규모 투자임을 선언한 것이다. 정부는 'AI 혁명'이 저성장과 인구감소라는 위기에 직면한 한국 경제를 다시 도약시킬 마지막 기회이며, 이를 위해 국가가 기업 투자와 산업 육성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총 1600조 원. 국가 한 해 예산의 두 배를 웃도는 이 초대형 투자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정부의 언어는 유난히 호전적이었다. 산업통상부는 국제질서가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의 시대로 재편됐다고 진단했고, AI 경쟁을 국가의 미래가 걸린 '전쟁'으로 규정했다. 반도체 전략에는 속도전, 거점전 같은 군사 용어가 붙었고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는 '총력지원' 체계가 제시됐다. AI 산업은 더 이상 개별 기업이 시장에서 경쟁하는 산업이 아니라,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전장으로 재정의됐다.
이 전쟁의 핵심은 '선점'이다. 먼저 깃발을 꽂고 생산능력을 확보해야 승리한다는 논리 속에서, 속도는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 사업을 지연시키는 규제와 인허가 절차는 해소해야 할 장애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행정적 절차를 아무리 줄여도 발전설비와 송전망 구축, 용수 확보라는 물리적 시간까지 압축할 수는 없다. 결국 정부가 구상하는 AI 산업의 확장 규모와 속도는 전력 인프라에 달려있다.
정부도 이를 숨기지 않는다. 이번 발표에는 별도의 장을 할애해 'AI 시대를 선도하는 전기국가 비전'을 제시했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2035년까지 AI 데이터센터 18.4GW(기가와트)와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약 6.3GW가 새롭게 들어선다. 약 24GW가 넘는 신규 전력수요로, 이는 우리나라 최대전력 수요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원전, SMR(소형모듈원자로), 화석연료 발전을 모두 끌어모으고, 송전망 확충과 AI 데이터센터 전용 요금제 도입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전력은 더 이상 산업을 뒷받침하는 기반 시설에 머물지 않는다. AI 시대의 전력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전략 요소이자, 국가가 직접 확보하고 관리하는 전략적 자원처럼 다뤄지고 있다. 물론 전기화(Electrification)는 기후위기 대응에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전기화가 탄소중립 정책인 동시에 산업 경쟁력을 위한 국가 전략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수요의 확대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상수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들은 AI 인프라를 민간 투자 사업으로만 보지 않고, 에너지와 환경, 지역사회의 수용성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공공정책 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약 3년간 신규 데이터센터 허가를 중단한 뒤, 현재는 에너지 효율과 지속가능성 기준을 충족하는 사업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데이터센터 전력수요가 국가 전력소비의 20%를 넘어서자, 신규 계통연결 정책을 도입해 자체 발전과 재생에너지 조달을 의무화했다. 미국에서는 뉴욕주가 최초로 50MW 이상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을 1년간 중단하는 모라토리엄을 도입했다.
지금까지 에너지 전환은 화석연료를 전기로 대체하는 데 집중해 왔다. 기후위기 대응과 AI 산업 경쟁력이 동시에 국가 전략이 된 지금, 전기국가로의 전환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명분과 추진력을 얻고 있다. 이제는 어떤 연료를 전기로 바꿀 것인가 보다, 팽창하는 전력수요를 사회가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지가 새로운 쟁점이 되고 있다.
기술의 효율은 높아질 수 있고 재생에너지 비중도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총 전력수요가 더 빠르게 늘어난다면 효율 개선의 절감 효과는 상당 부분 상쇄될 수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가 2030년까지 두 배 이상 증가하고, 추가 수요의 절반은 재생에너지로 충당되지만 40% 이상은 천연가스와 석탄이 담당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AI 산업의 확대가 화석연료 발전의 확대를 일정 기간 불가피하게 만들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하고, 운송하고, 저장하려면 발전설비와 송전망, 저장시설을 확충해야 한다. 그만큼 더 많은 광물과 토지, 물과 연료가 필요하며, 당연히 채굴 지역과 발전시설, 송전망이 들어서는 지역사회에 새로운 환경∙사회적 문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현재의 AI 산업정책은 공급해야 할 전력의 규모는 정밀하게 계산하면서도, 그 전력을 만들기 위해 소모될 자원과 피해를 떠안을 지역사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전기국가가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은 전기만이 아니다. 그 전기를 만들기 위해 어디까지 자원을 동원하고, 그 대가를 어느 공동체와 생태계가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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