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앞바다를 메워 땅으로 만든 전북 새만금은 그야말로 황금의 땅 '엘도라도'이다.
전 세계에서 국가가 가진 1억 평의 대파노라마는 전북 서해안의 새만금이 유일하다. 단군 이래 한국의 최대 역사(役事)라는 닉네임도 붙어 있다.
전북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33.9㎞)를 쌓아 올려 만든 새만금은 내부 토지 2만9100ha와 담수호 1만1800ha 등 총 4만900ha(409㎢)의 땅을 껴안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새로운 토지는 서울의 3분의 2, 파리의 4배에 해당한다. 만약 우리나라 전 국민에게 땅을 나눠줄 경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약 9.9㎡씩 돌아가는 크기이다.
광대한 토지 만들기는 1960년대 중반 극심한 한발과 1970년대 초 세계적인 식량파동에 따른 대응로 1971년 '군산시 옥서지구 농업개발사업 계획'으로 시작했다.
1980년대 초 냉해로 쌀 흉작 등 식량안보 문제가 발생했고 1987년 옥서지구 인근인 김제·옥서·부안을 통합하는 '새만금 간척종합개발사업'이 발표된다.
이후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11월에 착공했으니 첫 삽을 뜬 후 올해 11월로 만 35년이 된다.
그 세월이 오죽 길었을까? 이재명 대통령도 올해 7월 16일 새만금개발청 업무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새만금 얘기는 하겠다, 하겠다 하면서 벌써 35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가만히 놔뒀으면 한 100년 할 뻔했다"고 지적했다.
한 세대를 묵묵히 보내야 했던 새만금의 소사(小史)는 정치적 재활용으로 얼룩진 부끄러운 민낯이 숨어 있다.
정치권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새만금에 올인해온 전북도민들을 대상으로 '희망고문'을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경재 전북애향본부 기획처장은 "대선 때만 되면 새만금의 화려한 개발프로젝트가 후보들의 단골메뉴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다"며 "밑그림을 그렸다가 바꾼 수만 헤아려도 여러 차례"라고 말했다.
'새만금 기본계획(MP)'은 공식 행정절차상 변경만 지난 2011년 최초 수립한 이후 2014년 변경과 2021년(제3차) 변경 등 세 차례에 이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정사업을 넣었다가 빼고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리는 등 부분변경을 고려하면 열 손가락으로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새만금 밑그림이 사실상 '누더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왔던 이유이다.
새만금 개발 원칙은 그동안 '모호성'에 갇혀 있었다. 역대 정부마다 방향과 속도와 기본이 수시로 바뀌고 뒤집어지는 등 크게 흔들려 왔다.
새만금 잼버리가 파행으로 마무리된 지난 2023년 8월에는 윤석열 전 정부가 새만금 예산을 무려 78%나 삭감하는 '국책사업 대살육'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북은 언제나 가슴에 멍만 들었다. 땅을 가졌다는 죄로 국가예산 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돌아온 것은 절망과 좌절뿐이었다. 오죽하면 이재명 대통령도 "이제는 '희망고문'을 끝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할 정도였을까.
어둠의 세월을 버틴 새만금이 새로운 신천지를 향하는 물꼬를 틀 수 있었던 것은 올 2월 27일 발표됐던 현대차그룹 9조원 투자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로봇 제조부터 AI데이터센터, 수소생산, 재생에너지 발전까지 5개 사업을 새만금 일원에 동시에 추진한다는 계획이 골격을 이루는데 전북도 역사상 단일기업 투자로는 가장 큰 규모다.
현대차그룹은 당일 군산 새만금컨벤션센터(GSCO)에서 정부 5개 부처와 함께 '새만금 로봇·수소 첨단산업 육성 및 수소 AI 도시 조성을 위한 투자협약(MOU)'을 체결했다.
당시 협약은 정부 부처와 광역지자체, 민간기업이 단일 투자 건에 공동 서명한 사례이자 전국적으로도 전례가 드문 케이스이다. 정부가 새만금을 국가 차원의 미래산업 실증 거점으로 공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9조원의 구성을 사업별로 뜯어보면 지역민들의 기대를 더해준다.
전북자치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이 계획 중인 5개 사업의 총 투자 규모는 약 9조원이며 2027년부터 순차적으로 착공에 들어간다. 이를 통해 기업 추산 약 16조원의 경제유발 효과와 함께 7만1000명의 직·간접 고용 창출이 기대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은 AI 데이터센터인데 사업기간도 2027년부터 2029년까지 3년이다. 9조원 투자가 내년부터 곧바로 시작되는 '현금'인 셈이다.
여기에는 약 5조8000억원이 투입돼 100메가와트(MW) 규모로 구축되며 1단계로 GPU 5만장을 도입해 피지컬 AI 연구개발 인프라로 활용하게 된다.
같은 기간에 약 1조3000억원을 투입할 재생에너지 발전은 AI 데이터센터와 수소 사업에 필요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다.
약 1조 원을 투자할 수전해 플랜트는 200MW 규모로 건설해 연간 3만 톤의 그린수소를 생산한다. 생산된 수소는 새만금 내 수소모빌리티와 수소 AI 시범도시 등에 공급되며 외부 수급 없이 생산지에서 바로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형' 에너지 자립 구조를 목표로 한다.
2028년부터 2년 동안 약 4000억원을 투자할 로봇제조는 물류·배송용 로봇을 연간 최대 3만대 양산하는 것을 목표로 새만금에 생산거점을 마련하는 사업이다.
이 공장이 가동되면 협력업체와 부품업체의 연쇄 입주가 이어지며 대규모 고용 창출 효과도 기대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새만금개발청 업무보고에서 현대차 9조원 투자와 관련해 "그 투자내역이 사실은 엄청난 대규모이다"며 "이것(9조원)은 초기 투입비용 정도 예상한 것이고 사업이 성공적으로 확장된다면 '엄청난 대규모'에 곱하기 몇 배 몇 십 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옆에 있는 한성숙 총리도 "엄청 큰 사업이고 이게 로봇 파운더리까지 가고 전체로 연결되면 이곳에서 실증할 수 있는 것도 굉장히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로봇계의 TSMC를 만들겠다는 아니겠느냐"고 말했고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세상에 상정 가능한 모든 로봇을 만드는 공장을 새만금에 구현하겠다, 이게 (현대차의) 꿈이다"고 설명했다.
새만금에 로봇계의 TSMC가 완성된다면 다양한 로봇기업들이 설계한 제품을 생산하는 '로봇 제조 허브'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로봇과 관련한 특정 기업의 공장 하나가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이 활용하는 공통 생산기지로 새만금이 급부상하는 셈이다.
정부는 현대차 투자를 새만금의 첫 번째 '앵커 투자'로 보고 이후 다른 로봇기업과 부품기업들의 추가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런 구상이 성공하려면 단순한 공장으로는 부족하고 △로봇 제조시설 △모터·감속기·센서 같은 부품업체 △AI 데이터센터 △시험·인증센터 △연구기관과 대학 등이 함께 모여 산업 생태계를 형성해야 한다.
'새만금에 1000조(兆)'를 담아내기 위해선 지금부터 전북도와 정치권, 지역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지금부터 이런 밑그림을 그리고 생태계 형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기업친화 분위기 조성 등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전북도의 각오는 단단한다. 정부의 방향에 맞춰 현대차 9조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총력전을 경주한다는 방침이다.
이원택 전북도지사는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체 불가능한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국가이자 세계가 찾아오는 혁신의 무대로 만들겠다'는 담대한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펼쳐 보였다"며 "정부의 AI 국가 전략에 발맞추어 새만금을 전 세계 기업과 인재, 자본이 앞다투어 찾아오는 '글로벌 AI 밸리'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붓겠다"고 강조했다.
이원택 도지사는 "현대차와 엔비디아 등 글로벌 기업이 주도하는 피지컬 AI 생태계가 새만금에서 꽃피울 수 있도록 로보틱스·자율주행·스마트 팩토리의 국가급 실증 단지를 적극 유치하겠다"며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가 도시와 세상을 연결하며 번영을 이끌었듯 새만금이 대한민국과 세계를 잇는 '글로벌 AI 협력의 다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만금개발청은 '새로운 문명을 여는 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새만금청은 "새만금이 펼쳐나갈 미래는 그간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새롭고 놀라운 모습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혼돈의 한 세대를 견디고 새로운 발전적 모멘텀을 계기로 '신천지'를 꿈꾸고 있는 새만금, 이제 남은 과제는 현대차 9조원 투자의 현금을 1000조원 이상의 초거대 자산으로 키워나가는 일이다.
그것만이 새만금을 말 그대로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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